진희는 회장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음에도 신경은 온통 주아에게 쏠려있었다. 주아가 자랐다는 고아원을 찾아 어떻게 오게 됐는지 물었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지라 그때의 원장은 사망하고 난 후였다. 당연히 그때 당시의 보육교사들도 그만뒀거나 죽었거나.
'대체.. 세살배기가 어떻게 고아원까지 갈 수 있었던거지..? 분명 누군가 데려다줬거나 일부러 거기에 뒀을텐데'
궁금한건 산더미였지만 세월은 그 궁금증을 풀게 놔두지 않았다. 겨우 찾은 딸의 지난 27년을 되짚어보기에는 상황과 조건이 녹록치 않았다.
그리고 진희는 겨우 찾은 딸을 이런 복잡한 회사들 비즈니스 생리에 끼우고 싶지도 않았다. 최대한 숨길 수 있을 때 까지 숨기다 밝히거나 밝혀지는 날 주아와 함께 해외로 갈 작정이었다.
비단 이 생각을 하는게 진희 하나는 아니었다. 눈치빠른 우영 역시도 주아를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봐야할지 깊은 고민에 잠겨있었다. 자신의 엄마라는 사람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딸을 찾았음에도 밝히지 않는것은 다시 또 잃을까 하는 우려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하.. 일이 갑자기 복잡해졌군..'
*
샌드위치를 먹다 중간에 일어난 주아 때문인지, 한개로는 모자란 찬영도 반개쯤 먹고서 테이블을 정리했다. 세시가 넘어가자 손님들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다. 일하면서 틈틈히 주아를 살피는 찬영은, 당최 알수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서비스 정신 하나는 투철한 주아,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마감을 하고 있다. 진희가 또 저녁을 먹자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찬영이 머뭇거리며 커피숍을 나가지 않고 서성인다. 첫날엔 정장을 입고와서 일하는데 애를 먹어서 그런지 오늘은 청바지에 맨투맨을 입고 온 걸 보고 일할 마음이 있긴 있구나 했던 주아.
"저기.."
할말 있으면 하라며 쇼케이스 안에 있는 조각 케이크를 정리중인 주아. 커피머신은 언제 씻은건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정산도 끝난 모양이었다.
"왜 그래요? 할 말 있어요?"
대답하지 않고 자꾸 머뭇거리는 찬영이 거슬려 주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저녁 같이 먹자고"
"사장님이 데려오래요?"
"아냐! 그냥.. 나 혼자 먹기 싫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희는 오전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덕분에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주아를 데려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만약 바쁘지 않았다면 손수 저녁을 준비해 주아를 또 초대할 셈이었다.
"친구랑 먹어요, 아님 동생분이랑 드시든지요"
냉담한 반응에 주눅이 든 찬영. 자신이 그런 성격이 아님을 더 잘 알기에 부아가 약간 치밀기도 했지만, 밥 같은 건 잘 챙겨 먹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저녁 한낀데 뭐 같이 먹어주면 안되냐? 데이트 해달란 것도 아니구만"
툴툴거리며 바닥의 타일만 비비는 찬영. 스텝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주아가 시큰둥한 얼굴로 가자며 문을 나선다. 그냥 같이 밥 한끼 먹자는 그 말에 짜증났던 기분이 확 풀리는 자신이 어색하다.
"어디 가실건데요? 그럼 기사분은 가라고 하시는게 낫지.."
"아니, 차 타고 가면 되지. 우리 밥 먹을동안 기다리라고 하면 되잖아?"
"우리 밥 먹는동안 기사님보고 기다리라고 한다고요?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뭐가? 그 사람 하는 일이 그건데 왜?"
왠지 모르게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에게 하대하는 투가 맘에 들지 않는 주아다. 자라 온 환경의 차이 따위는 주아에게 크게 따질만한 문제가 되지 않고, 인성문제라고 생각해버리는 주아.
"됐어요, 갈 데 있으면 택시타요 그냥. 저분도 일찍 퇴근하시는 날이 있어야지"
주아의 말을 들은 찬영은 괜히 머쓱해졌다. 자신이 마치 나쁜놈이 된 듯한 기분에 시무룩해지는것도 있었다. 그런데 대책없이 저녁먹자고 던진거라 어디갈지는 차마 정하지 못한게 그제야 생각나 초조해지고 있는 찬영
"어디로가요?"
"어? 아..."
택시를 타고서 말은 못하고 어버버거리는 찬영을 보며 주아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기사님, 이 근처에 맛있는 국밥집으로 가주세요"
"국밥요? 알겠습니다~!"
주아를 보며 활짝 웃어보인 기사는 골목골목을 돌아 간판만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허름한 식당 앞에 차를 세웠다.
"감사합니다~"
찬영이 식당의 간판을 보고 오만상을 찡그리는데 주아가 택시비를 계산하고 찬영을 밀어내며 택시에서 내렸다.
"아... 내가 예약을 못해서 잠깐 어디갈까 고민한건데.."
예약은 커녕 어디갈지 생각도 안한 찬영이지만 차마 이런 곳에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심도 깊이 내적갈등중이었다. 그런 찬영의 말투와 표정을 캐치하지 못할 주아가 아니었다.
"먹기 싫으면 가요. 난 국밥 무지하게 좋아하거든요"
끼익- 드르륵
찬영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채 문을 열고 들어가버리는 주아를 보며 찬영도 마지못해 따라들어갔다. 주아의 맞은편에 앉아 멀뚱히 메뉴를 보는 찬영을 가뿐히 무시하고선 돼지국밥 두개를 시킨다.
"근데 여기 적힌게 순대국밥은 뭐고 따로국밥은 또 뭐야?"
"... 그걸 몰라요? 순대들어간게 순대 국밥이고 밥하고 국이 따로나오는게 따로국밥이지"
"아..? 난 처음이라 몰라서"
잠깐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 주아. 그리고 들어와서 한참을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찬영. 뚝배기 그릇이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아주머니의 말을 어디로 흘려들었는지 자기 앞으로 당기다 뜨거웠는지 오두방정을 떤다.
"아아아아아뜨뜨뜨뜨!!!"
"어휴... 아까 아주머니가 조심하라 그랬잖아요! 먹어보고 싱거우면 소금으로 간해요. 새우젓도 조금 넣고"
말을 들어도 뭔지 잘 모르겠는 찬영이 주아가 하는걸 보고 따라하는데, 분명 먹어보고 간하라는 주아의 말도 어디로 들은건지?
"소금 그만큼 넣어도 괜찮아요? 나 좀 짜게 먹는데"
그러면서 부추까지 넣어서는 휘휘 젓는 주아. 찬영이 눈을 한번 꿈뻑거리더니 똑같이 저어서 한 술 뜨고는 사레가 들렸는지 물 한컵을 벌컥벌컥 마신다.
"켁!! 너무 짠데.. 아우.. 깜짝 놀랬네"
"깜짝 놀란건 내가 먼전데요..? 먹어보고 간을 하라니까. 이리줘요 그냥. 이러다 국밥 구경만 하다 집에 가겠네"
주아가 찬영의 그릇을 가서는 밥을 반절 덜어내고서 물을 붓는다. 그리고 다시 돌려주는데, 찬영이 한술 떠보더니 그제야 입에 맞는지 활짝 웃는다.
"우와? 맛있네"
"국물 한숟갈 먹고 뭐래요.. 덜어놓은 밥은 조금씩 국에 넣어 먹어요. 이미 소금기 잔뜩 배였을테니 또 한꺼번에 다 넣으면 짜서 못먹어요"
무심한 듯 한마디 던지고는 이내 먹기 시작하는 주아. 사실 찬영은 이게 맛있는거라는 생각보단 그냥 주아와 같이 있는 시간이 그저 좋을 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어보였다.
"아~ 배부르다~"
혼자 밥먹는게 싫어 잘 챙겨먹어 버릇하지 않는 주아도 꽤 맛있게 먹은 듯 했다. 찬영도 거의 그릇을 다 비운 걸 보고서 처음에 봤던 찬영의 이미자가 조금씩 정화되는 것 같은 주아.
"처음 먹어보는데, 맛있다. 다음에 또 와서 먹자!"
"그래요~ 다음엔 먹고 싶은거 생각해서 말해요. 또 버벅거리면 다신 같이 안먹을거니깐"
잠깐 밥을 먹을 때 다정했던 것 빼곤 사실상 시큰둥하고 무뚝뚝한데도, 또 그런 스타일의 여자를 가장 싫어하는 찬영인데도 주아가 그렇게 행동하는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래~"
저도 모르게 활짝 웃는 찬영을 보며 주아가 고개를 돌린다. 집까진 걸어가도 충분하다며 주아가 먼저 작별인사를 하려는데, 찬영이 주아의 손을 잡는다.
"걸어가도 되는거면, 나도 같이 가. 그래도 바래다주고 가야지"
"..괜찮아요"
"그냥 한번쯤은 사람이 호의를 베풀땐 받을줄도 알아라!"
머쓱해진 찬영이 목소리를 높였다가 머리를 긁적인다. 하이톤의 음성에 놀라 커진 눈으로 쳐다보던 주아도 그 모습에 피식, 헛웃음을 내비친다. 가까운 줄 알았는데, 찬영이 걷기에는 버거운 30분 거리에 있는 주아의 집. 걷는 동안 찬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대학은 어디나왔어?"
"돈 없어서 못갔어요"
"에이, 진짜? 성적 안되서 그런거 아니고?"
"한국대 법대 붙었어요"
"헐..... 그럼 무슨수를 써서라도 가야했던거 아냐?"
"무슨수로요? 그 많은 등록금을 어떻게 메꿔요"
"부모님한테 말했어야지?"
찬영의 말에 주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가로등 불빛때문인지 주아의 얼굴이 한층 더 그늘져보이는 건 기분탓일까?
"부모님 없어요. 돌아가셨어요"
그제야 아차 싶은 찬영. 화제를 돌려본다.
"아... 언제 돌아가신건데?"
"몰라요,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세살때부터 거기서 자랐다고 원장선생님이 말씀해주시던데요?"
첩첩산중이다. 말을 꺼내는 족족 좋지 않은 대답들만 나오니 찬영으로써는 미칠지경. 결국 화제돌리기는 실패하면서 연신 헛기침만 해댄다.
"흠..."
"오래 된 일인데요 뭘. 별스러울것도 없어요. 고아원에서 자란게 부끄러운것도 아니니까요"
"그..그래! 그게 뭐라고? 그럼 쭉 일만 했겠네?"
"그렇죠. 혼자 사는데 누가 절 챙겨주겠어요?"
주아가 대단해보이기도, 안쓰러워보이기도 한다. 곱게 자란것만 같은 주아의 과거가 그렇게 힘들었을지 짐작도 하지 못했던 찬영은 괜시리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고 혼자 부끄러워졌다. 부모님이 안계시다는 주아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자신은 뭘 하며 살아왔는지,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크흠.. 야! 앞으로 저녁은 나랑 같이 먹자!"
뜬금없는 찬영의 말에 또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주아. 갈수록 이해가지 않는 캐릭터다. 저렇게 선전포고하듯 말하면 같이 먹고 싶다가도 그럴 의지가 사라질 수 있다는 걸 모르는걸까? 하지만 주아도 항상 혼자 먹기 싫어 딱히 챙겨먹어 버릇하지 않았으니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별일 없음 가끔 저녁 같이 먹어요. 매일은 부담스럽네요"
"알았어, 너 폰 잠시 줘봐라"
왜 그러느냐 되묻지는 않고 순순히 폰을 건넨다. 손으로 몇번 터치하더니 폰을 다시 돌려주는 찬영.
"뭐에요?"
"내 번호 저장했다. 혼자 지내는데 무슨 일 있으면 도움 청할데도 없을거잖아?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찬영의 과한 배려와 관심이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직장동료라고 봐도 무방했으니 고개만 끄덕거리고서 작별인사를 하곤 그대로 올라가버렸다.
'환경이 사람을 망치기만 하는 건 아니군..'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편히 살아왔는지, 다시 한번 주아의 뒷모습을 보며 반성하는 찬영. 그게 찬영의 터닝포인트가 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