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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리고 그 후
작가 : 전Yeah
작품등록일 : 2019.10.7

2014년, 갑작스레 일어난 사태 이 후 인류는 멸망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사태에서 살아남은 이설전은 변해버린 환경과 그것에 적응해가는 자신에게 회의감을 가지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일상을 쓰는 아포칼립스 일상물.

 
01 - 그리고 그 후
작성일 : 19-10-07 22:49     조회 : 404     추천 : 0     분량 : 9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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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시간 후 – 7,085,476,872

 12시간 후 – 6,784,102,062

 24시간 후 – 5,853,587,988

 2일 후 - 4,579,889,234

 일주일 후 – 1,289,546,341

 한 달 후 – 687,532,876

 6개월 후 – 102,891,875

 

 그리고 그 후

 

 

 

  강렬한 햇살이 자비 없이 작렬하는 도로 위, 설전은 미간을 찌푸리며 리어카의 위치를 확인한다. 리어카와 자신의 거리를 재보고 비상시의 동선을 파악한 그는 목이 타는지 탄띠에 찬 수통주머니 안에서 수통을 꺼낸다.

 

  설전은 수통을 들고 흔들어 보았다. 찰랑거리는 무게감이 아직 물이 남아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수통 마개를 열고 입에 가져다 댔다가 멈춘다.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그는 수통을 내려놓다가 다시 수통을 들어 입 쪽으로 가져다 대본다. 아무래도 수통 안에 들어있는 물의 양에 고민하는 듯 보인다. 그러다 확신에 찬 듯 수통을 다시 내려놓은 그는 수통 마개를 잠근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이다. 구름 한 점 없는 게 이렇게 속상할 줄은 설전은 예전엔 생각도 못 했다. 내리쬐는 햇빛과 끓어오르는 아스팔트가 지금 날씨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설전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짜증을 냈다. 그늘에 들어가서 좀 쉴까. 설전은 생각을 마치자마자 바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지럽게 쓰러져있는 진열대에 걸터앉은 설전은 어깨에 멘 소총을 내려놓으려다 다시 깊은 한숨을 쉬더니 그만두었다. 설전은 바닥에 널브러진 과자 중 감자칩 과자를 집어 유통기한을 확인한 뒤 봉지를 뜯었다. 사실 유통기한이 얼마나 지났든 뜯어볼 요량이었지만. 짭짤한 내음이 설전의 코와 식욕을 자극했다. 설전은 과자봉지에 손을 집어넣더니 갑자칩 한 움큼을 쥐어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입 속에서 감자칩을 씹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씹은 갑자칩을 목으로 넘기자마자 설전은 바로 한 움큼의 감자칩을 입 속에 다시 털어 넣었다. 텅 빈 슈퍼마켓에서 감자칩 씹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설전은 감자칩을 입에 탈탈 털어 넣고 봉지를 버리며 욕을 내뱉었다.

 

  “아오, 개XX들! 과자 좀 많이 처넣으라고!”

 

  또 한 번 한 숨을 내뱉은 설전은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햇살은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번엔 K-2 소총의 총열을 만져보았다. 그늘에 있었음에도 소총의 총열은 아직 뜨거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그는 다음엔 전투 조끼의 탄창 주머니에 넣어둔 탄창을 만져보았다.

 

  이 녀석들도 뜨겁네. 아오, 저기 나가면 햇빛에 더워 뒤지는 것 보다 이 녀석들한테 익어서 뒤지는 게 더 빠를지도. 설전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대충 돌아보고 건진 거 없다고 구라치면 안 되나. 설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음흉하게 웃어 보였으나 바로 고개를 젓더니 마음을 바꿨다.

 

  “정신 차려, 이설전.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 이렇게 장난칠 상황은 아니잖아.”

 

  설전은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눈을 살짝 아프게 만들 정도로 밝게 설전을 비추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설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구름 한 점 없는 정말 깨끗한 하늘이었다. 설전의 미간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설전은 전투 조끼 주머니들을 손으로 더듬거려가며 안의 내용물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빈 곳은 없었다. 설전은 좋아 라고 살짝 소리친 뒤 다시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전은 리어카에 철제 파이프와 플라스틱 파이프를 가득 싣고 느릿느릿 대형마트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그의 입에서 욕이 한마디 씩 자동 재생되고 있었다. 설전의 이마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목에선 땀줄기가 샤워라도 한 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에 닿아 따갑고 거슬렸지만 쉬어갈 수는 없었다.

 

  설전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는 붉게 물들어 산꼭대기에 앉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설전의 미간에는 주름이 편의점을 나설 때보다 배는 더 깊게 파였다.

 

  젠장. 너무 늦었어! 늦장을 피우지 말걸. 내가 미쳤지. 욕설을 내뱉는 와중에 설전은 이런 시간까지 늦장을 부린 자신을 마구 자책하기 시작했다. 별 거 없을 줄 알면서! 왜! 호기심이란 놈은 왜 이리 나를 괴롭히냐. 그냥 지나쳤으면 이 시간까지 고생하지도 않았을 텐데, 괜히 성인용품... 아니다. 내 불찰인걸. 지금 후회해봤자 나오는 건 그냥 자괴심과 자학을 통한 자기만족에 불과해. 지금은 발걸음을 옮기는 거에만 신경 쓰자.

 

  심호흡을 크게 한 그였지만 한 번 솟아오른 흥분과 열은 쉽게 내려가질 않았다. 제길. 생각해보니 열 받네. 그깟 빗물 저장고가 뭐라고! 일단 비가 와야 뭐라도 할 거 아냐! 망할 빌어먹을! 비도 안 오면 개똥망일 시설을 왜 지금 시기에 만들겠다고! 그깟 것 때문에 내가 지금! 응? 지금 무슨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후... 진정해. 소수를 세자. 2, 3, 5, 7, 11, 13, 17, 19, 23, 29, 31, 37, 41, 43, 47... 고마워요, 어떤 만화의 망할 신부님. 당신 덕에 좋은 거 배워서 잘 써먹습니다.

 

  설전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속마음이나 생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입 밖으로 계속. 만약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미친놈이라고 수군거렸겠지만 아쉽게도 이 길 위에 그 말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다리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대형마트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설전을 맞이하고 있었다.

 

  설전은 대형마트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는 산 중턱에 걸터앉아 잠을 잘 기세로 어둠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 왔으니 잠시 쉬어도 되겠지. 설전은 리어카의 손잡이를 내려놓고 리어카 위에 올라가 대형마트와 해를 등지고 다리 입구에서 반대편 길을 바라보았다.

 

  정겨운 동네다. 설전은 20년 이상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의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 시절이 고스란히 추억에 녹아들었다. 추억이 동네 곳곳의 담벼락, 가게, 건물, 아스팔트 길에 스며들었다. 설전은 그 스며들어 가는 추억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동네 곳곳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래, 저기 떡볶이집의 떡볶이는 아줌마 성격 닮아서 존나 매웠지. 저기는 원래 만화책 대여점이었는데. 망할 때 즈음 일부러 연체해서 만화책을 먹튀 한 적도 있었고.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그래 어릴 적에 여기서 길을 잃어서 엉엉 운적도 있었지. 생각해보면 멍청하단 말이야. 5분 거리에서 길을 잃었다고 엉엉 울다니. 나도 어릴 적엔 엄청 멍청했구나. 어릴 적부터 될 성 부른 개병신이었던 거군.

 

  그는 계속해서 추억을 잡아채어 동네를 도배했다. 그는 끈질기게 사라지려는 추억을 억지로 붙들고선 어떻게든 동네의 구석구석 자신의 추억을 집어넣었다. 필사적이라고 해야 할까, 시시콜콜한 기억들까지도 찾아내어 현실의 시야에 덧칠하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설전은 문득 수 십분이 지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깜짝 놀라 시계를 바라보았다. 6시 45분. 잠시 쉬기로 한 지 고작 10분이 지나있었다. 시계가 고장 난 건 아닐까? 설전은 재빠르게 마트 옆의 산을 바라보았다. 해는 이제 거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 붉은 빛은 여전히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이제 움직이자. 어두워지면 위험해. 설전은 이제 뒤를 돌아 리어카 손잡이 쪽으로 몸을 옮기려 했다.

 

  어디선가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 자신이 내지 않은 소리에 설전은 재빠르게 소총을 견착한 다음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그 속도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2초 내. 과장을 보태서 1초밖에 안 걸렸다고 해도 쉬이 믿을 정도의 날렵함이었다. 그러나 설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냐, 어떤 놈이냐, 같은 말은 내뱉지 않고 그저 조용하고 과묵하게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눈알과 고개를 빠르게 돌릴 뿐이었다. 그가 찾아낸 소리의 근원지에는 한 여자가 서있었다.

 

  너덜너덜하고 소매가 다 찢어진 노란 후드 티를 걸쳤으며 회색 민소매 티셔츠와 파란색 핫팬츠를 입고 때 묻은 하얀 운동화를 신은 갈색 머리의 여자가 두 손을 들고 설전을 향해 천천히 오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지만 노을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반짝거리고 있었고 여자의 귀엽고 예쁜 외모가 그 아름다움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대략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모습을 한 그녀는 설전이 겨냥한 소총을 보았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를 본 설전은 멈추라는 경고조차 전혀 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방아쇠 고리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여자는 당황하며 말했다.

 

  “자... 잠시만요! 쏘지 마세요! 사람이에요! 사람이라고요!”

 

  여자는 다급하게 말하며 설전의 행동을 나무랐다. 그러나 설전은 견착을 떼지 않고 그저 여자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반응이 없자 여자는 더욱 당황하며 횡설수설하더니 입을 열고 설전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혹시나 싶어 정말 사람인가 하고 와 본 거뿐이에요! 정말이에요! 다른 나쁜 뜻은 없었어요!”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설전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여자는 멍청하게 두 손을 내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설전은 그런 여자의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 본 다음 견착을 떼며 말했다.

 

  “뭐야, 진짜 사람이었잖아.”

 

  “그럼 거짓말인 줄 알았단 말이에요! 너무하네요! 사람한테 총이나 겨누고!”

 

  “미안해.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너무 긴장한 것 같군. 사과할게.”

 

  “뭐, 저도 이해해요.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믿지 못하겠죠.”

 

  여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전히 두 손은 계속 들고 있었다. 설전은 그냥 총에서 견착만 떼었을 뿐 여전히 총구는 그녀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심기가 불편한 듯 설전이 겨눈 총을 보고 한마디 했다.

 

  “이봐요! 언제까지 숙녀한테 그런 위험한 물건을 들이대고 있을 생각이죠?”

 

  “아, 이거? 미안. 그래도 좀 의심이 가서 말이지. 사람이라고 해도 예쁜 얼굴로 사람을 홀리는 강도가 있을지 모르잖아?”

 

  “하... 강도라니. 그래도 예쁘다고 해줬으니 한번은 봐 드리죠.”

 

  여자는 은근 기분이 좋은 듯 싱긋 미소 지으면서 설전을 바라보았다. 전투조끼에 제법 군인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리어카에 뭔가를 싣고 가는 것처럼 보이자 여자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 내용물을 천천히 살폈다. 리어카 안의 탐색을 마친 여자는 실망하며 설전에게 따졌다.

 

  “그래도 저는 멍청한 강도겠네요. 고작 파이프를 싣고 가는 남자를 덮치려고 했으니까요.”

 

  “뭐, 어찌 알겠어. 유혹해서 접근한 다음, 숨겨둔 무기로 날 협박해서 내 거주지를 약탈할지도 모르니까.”

 

  “의심도 많고, 경계심도 많고.”

 

  “그래서 여태껏 살아 남은거지. 해서 말인데 나는 네가 지금 무척 위험해 보인단 말이야.”

 

  “어째서죠? 혹시 내가 여자인데 혼자 다녀서? 아니면 혹시 숨겨둔 무기로 뒤통수를 칠까 봐?”

 

  “정답.”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설전은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한 다음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일단 몸수색을 해볼 거야. 그 후에 이 총구 방향을 결정하도록 하지.”

 

  “뭐야, 그냥 변태였네. 내 몸을 보고 싶다면 그냥 보고 싶다고 말해요. 여자 본 지 오래 되셨나 봐?”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안 하면 벌집으로 만들겠어.”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래서 뭘 하면 되죠? 변태 아저씨?”

 

  “일단 뒤를 돌아봐. 그 등 뒤에 권총 같은 걸 숨겨 놨을 수도 있으니까.”

 

  “하여간 의심도 많으셔라. 알았어요. 일단 등을 보여주면 되는 거죠?”

 

  여자는 한 숨을 쉬며 뒤를 돌았다. 여자의 뒤태는 생각보다 훨씬 날씬하고 예뻤다. 긴 갈색 머리는 여전히 노을에 반짝거렸으며 그녀의 허벅지 뒤쪽 역시 노을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설전은 여자의 뒤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침을 삼킨 설전은 싱긋 미소까지 지었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설전은 좋아 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설전은 혀로 입술을 적신 후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 그런 상태에서 티를 올려 상체를 전부 드러내!”

 

  “알았어요! 근데 이왕 볼 거면 앞쪽이 낫지 않나요? 그게 더 보기 좋을 텐데.”

 

  “구시렁대지 말고 어서 하라는 대로 해!”

 

  여자는 알았다면서 서서히 후드티와 민소매 티셔츠를 동시에 벗기 시작했다. 설전은 요동치는 심장을 멈추려고 애를 썼다. 피가 도는 게 느껴진다. 그것도 빠르게. 흥분감이 설전의 온몸을 자극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전은 숨이 거칠어짐을 느꼈다. 안 된다. 설전은 재빠르게 호흡을 조절하려고 노력했다.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심장의 고동이 온몸에 울려댔다. 침착하자. 소수를 세자. 2, 3, 5, 7, 11, 13, 17, 19, 23... 설전은 서서히 자신의 몸이 진정됨을 느꼈다.

 

  어느새 여자의 옷은 허리에서 등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녀의 매끈하고 잘록한 허리가 노을에 의해 그 굴곡이 더욱 선명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설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숨을 멈췄다. 몸의 떨림도 멈췄다. 심장도 격하게 뛰던 아까와는 다르게 침착하고 낮은 소리로 고동 칠 뿐이었다.

 

  그리고 한 발의 총성이 적막한 상황을 깨트렸다. 설전의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왔다. 리어카 안에 떨어진 탄피가 그 총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고 있었다. 설전은 견착을 떼었다. 확실하게 맞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설전의 총알은 정확히 명중했다. 그녀의 등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뒤를 돌며 설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려 후드티는 물론 회색 민소매 티셔츠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입에서 흘린 피보다 뚫린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피로 인해 물든 게 더 많았다.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설전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어떻게...?”

 

  여자는 뚫린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가슴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검붉은 핏물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려는 지렁이의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오징어나 문어의 살아있는 다리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흘러내리던 여러 줄기의 검붉은 실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녀의 가슴에서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흡사 촉수라고 불리는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여자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설전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언제.. 알아낸 거지..?”

 

  “처음부터.”

 

  설전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여자는 얼굴을 뒤튼다. 기괴하게 턱과 얼굴이 뒤틀리더니 이윽고 턱이 말도 안 될 정도의 크기로 벌어진다. 그녀가 혀를 내밀자 혀는 인간이 내밀 수 없을 정도의 길이로 쭉 뻗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손은 뼈가 뒤틀리는 소리를 내더니 살가죽이 찢어지면서 낫과 같은 갈고리가 튀어나왔다. 그 갈고리는 팔 전체로 변했으며 여자의 등은 심하게 굽어졌다.

 

  등에서도 갈고리 같은 게 튀어나온다. 그녀의 몸에서 갈고리가 달린 4개의 팔이 기괴하게 꿈틀거린다. 설전을 향해 짐승의 소리를 내는 여자에게선 노을에 의해 아름답게 빛나던 아름다운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 있는 건 여자가 아니라 한 마리의 괴물이었다.

 

  “너무 순순히 말을 들어줘서 그런지 내심 흥분해서 타이밍을 놓칠 뻔했지 뭐야. 일이 너무 잘풀리면 혹시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잖아. 아, 말해줘도 모를려나.”

 

  “어떻게... 안 거냐...”

 

  “네가 나한테 말을 걸자마자 알았지. 그건 불가능하니까.”

 

  “왜... 불가능...?

 

  설전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총을 견착했다. 여자, 아니 그것은 설전을 향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듯, 아니 뒤뚱거리는 모습으로 그것은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설전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아쉽게도 설전의 방아쇠가 더 빨랐다. 설전의 총에서 여러 번의 총성이 울린다. 총성이 울린 직 후 설전을 향해 돌진하던 그것은 비틀거린다. 설전은 비틀거리는 그것을 바라본다.

 

  이번에도 설전은 목표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그것의 입을 중심으로 아랫입술 위 쪽 부분 전체, 다시 말하자면 머리의 반 이상이 완전히 날아가 없어져 있었다. 그것의 긴 혀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머리가 있던 허공을 추하게 휘적거렸다. 비틀거리며 앞을 향해 갈고리를 휘두르던 그것은 이윽고 두 걸음 걸어가다 그대로 쓰러졌다.

 

  설전은 계속해서 총구를 그 괴물에게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으나 그만두었다. 탄을 아껴야지. 자원은 최대한 아껴 쓰는 게 나아. 설전은 견착을 떼고 리어카에 걸터앉았다. 어느새 대형마트의 그림자가 설전의 등 뒤까지 드리웠다. 설전은 등 너머의 그림자를 의식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동네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녹은 추억들을 치덕대며 발랐지만 동네는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결국, 설전은 마음 속 깊숙이 억눌렀던 자신의 심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여기가 정말 내가 살던 곳이었나. 정말 이 폐허가 내가 자라나던 그 곳인가? 설전이 곳곳에 붙여둔 추억들은 이미 없어진 뒤였다. 아니, 없어진 게 아니라 썩어 문드러져 껍질이나 허물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며 길거리를 나뒹굴고 있었다.

 

  이윽고 그 껍질들은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고 물체가 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서서히 설전에게 익숙한 형태로 변하였고 결국 설전이 현재 보고 있는 그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하였다. 설전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추억들이 무엇으로 변했는지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백골이었다. 그리고 다 썩어가는 시체였다. 거리 곳곳에는 다 부서져 나뒹구는 뼈와 그나마 살점이 붙어서 악취를 풍기는 시체들, 정확히는 뼛조각에 붙은 살점들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은 다 부서져가는 폐허와 다를 바 없는 건물들이 그가 덧칠한 추억들을 계속 벗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설전은 견딜 수 없었다. 이것이 내 추억들이라고? 이 추하고 다 부서져 있는 것들이?

 

  설전은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 추억들이 저리 끔찍할 리 없어. 저건 거짓이야. 그래,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야. 설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나 변한 건 없었다. 아니 변했다면 해가 저물어가면서 더욱 어두워지는 동네의 모습 정도였다.

 

  그제야 설전은 인정했다. 이게 현실이야. 추억으로 포장하고 나 자신을 속여도 변하는 건 없어. 자기만족과 내 자존감을 위한 거짓일 뿐이지. 설전은 다시 동네 곳곳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다 부서져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건물잔해들. 거기에 깔려서 부서져 있는 백골들과 시체들. 그리고 도로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뼈 잔해들. 이게 설전이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설전은 리어카 손잡이로 몸을 옮겼다. 손잡이를 들고 리어카를 끌기 시작한 설전은 동네를 다시 돌아봤다. 대형마트의 그림자가 드리운 다리와는 다르게 그곳은 아직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동네뿐만이 아니라 끔찍한 몰골의 시체들조차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설전은 오래 보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대형마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분명 빛이 향하는 곳에 있음에도 대형마트는 그 빛을 가리고 그 거대한 몸을 이용해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설전의 몸도 어느새 그 그림자 안에 녹아들어 천천히 대형마트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설전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다리의 중간까지 온 설전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침이면 일어나 창을 열고, 상쾌한 공기에 나갈 준비를 하고. 한 손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든 채. 만원 버스에 내 몸을 싣고. 귀에 꽂은 익숙한 라디오에서 사람들에 세상사는 즐거운 사연, 들으면서 하루가 또 시작되죠, 화사하게 빛나는 햇살이 반겨주네요.”

 

  해는 어느새 산 너머로 사라졌다. 전등 하나 켜지지 않아 더욱 어두워져 가는 이 도시에서 설전은 마침내 대형마트에 도착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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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 - 공성전 (1) 2019 / 11 / 6 218 0 10846   
19 19 - 다이나믹 듀오 (4) 2019 / 11 / 6 219 0 12222   
18 18 - 다이나믹 듀오 (3) 2019 / 11 / 4 222 0 10764   
17 17 - 다이나믹 듀오 (2) 2019 / 11 / 4 231 0 11760   
16 16 - 다이나믹 듀오 (1) 2019 / 10 / 31 225 0 11107   
15 15 - 레볼루션 (2) 2019 / 10 / 31 211 0 10703   
14 14 - 레볼루션 (1) 2019 / 10 / 28 219 0 12400   
13 13 - 동창회 (4) 2019 / 10 / 28 220 0 12191   
12 12 - 동창회 (3) 2019 / 10 / 23 228 0 12501   
11 11 - 동창회 (2) 2019 / 10 / 23 218 0 10800   
10 10 - 동창회 (1) 2019 / 10 / 21 225 0 14861   
9 09 - 비의 레퀴엠 (3) 2019 / 10 / 21 206 0 13302   
8 08 - 비의 레퀴엠 (2) 2019 / 10 / 16 229 0 15640   
7 07 - 비의 레퀴엠 (1) 2019 / 10 / 16 215 0 18556   
6 06 - 쏴야 할 곳을 봐라 (2) 2019 / 10 / 14 237 0 16689   
5 05 - 쏴야 할 곳을 봐라 (1) 2019 / 10 / 14 227 0 18130   
4 04 - 이렇게 파란 하늘 아래에서 (3) 2019 / 10 / 10 234 0 11981   
3 03 - 이렇게 파란 하늘 아래에서 (2) 2019 / 10 / 10 210 0 14859   
2 02 - 이렇게 파란 하늘 아래에서 (1) 2019 / 10 / 7 247 0 19488   
1 01 - 그리고 그 후 2019 / 10 / 7 405 0 9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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