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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더럽(The Love)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9.9.3


"나, 다른 사람 같이 좋아해도 돼?"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관계와 사랑
그것의 시작,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하여.

#대학생 #캠퍼스물 #악의꽃 #섹슈얼리티 #조별과제 #폴리아모리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쯤 지상엔 마땅히 눈 둘 데가 없기 때문이다(8)
작성일 : 19-10-03 03:21     조회 : 223     추천 : 0     분량 : 3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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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

 

 

 

  해에게서 연락이 온 건 다음 날 낮 열두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미안…… 점심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급하게 볼 일이 좀 생겨서.”

 

  본래는 한 시쯤 같이 밥을 먹은 뒤, 잠깐 노닥거리다 ‘욕망과 섹슈얼리티’ 강의에 함께 가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해의 일방적인 통보에 기분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급한 일이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뭐, 급하다니까…….’

 

  다만 후에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그 이유가 타당치 않다고 생각될 경우, 내 실망스러움에 비례하여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갑작스레 떠버린 시간에 나는 잠깐 동안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밥만 먹고 곧장 도서관엘 가는 게 나을까, 아니면 대충 집에서 시간을 때우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게 나을까. 다음 강의까진 대략 2시간 정도가 남은 상태였다. 밖에서 별다른 계획도 없이 때우기엔 꽤나 긴 시간이었고, 그렇다고 집에 들어갔다 나오기엔 적잖이 번거롭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

 

  문득,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한 경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시간! 교활한 균형의 마술사여,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매력적인 창부여!’

 

  책의 글쓴이도 마침 누군가에게 바람을 맞곤 갈 곳을 잃었던 게 아니었을까. 딱히 뭘 하기엔 어정쩡한 시간이라 그저 멍하니 벤치에 앉아선 흘러가는 구름이며, 바람이며 지켜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하나하나 적어냈던 게 아니었을까. 시간은 어떠하고, 하늘은 어떠하며, 공기나 바람은 또 왜 그리 맑고 잔잔한지에 대해서.

 

  그러고 시답잖은 생각을 반복하며 나는 하나 둘 초를 세었다. 대략 십 초에 한 번씩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나를 한 차례 휘감고는 다시 어딘가로 흘러가버렸다.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슬슬 배가 고파오자 나는 앉아있던 벤치에서 슬그머니 일어난 다음, 학교 정문의 밥집 거리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혼자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것보다야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것이 기분전환에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랜만에 밥이 먹고 싶어 들어간 백반 집에 익숙한 얼굴이 앉아있었다. 정휘였다. 그리고 그 맞은편엔 놀랍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긴 생머리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정휘는 나를 보곤 어색하게 웃으며 그보다 더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자는 반쯤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다시 밥을 먹는데 열중했다. 옆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미모의 소개팅녀 같았다.

 

  나는 정휘에게 신경 쓰지 말고 먹으라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순두부찌개를 주문했다. 본래는 백반을 시킬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저 둘을 보니 왠지 순하고 부드러운 것이 먹고 싶어졌던 것이다. 아마 속이 끓어 그런 것이겠지.

  정휘의 소개팅녀가 밥을 극도로 천천히 먹는 스타일이었던 탓에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둘은 식당 안에 머물러 있었고, 그리하여 식당을 나와서는 내가 그들의 뒤를 따라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개팅으로 만났으나 아직 사귀는 단계까진 가지 못한 남녀를 뒤따라 걷는 행위는 내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까지 재미있다거나 흥미진진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끔찍한 일에 더 가까웠다. 몸의 균형이 우연찮게 계속 흐트러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서로를 향해 팔이며 손가락이며 들이댄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대략 2초에 한 번씩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뒤뚱뒤뚱 걷고들 있는데, 아주 꼴사납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더는 못 보겠단 생각에 옆의 샛길로 발길을 돌렸을 때였다.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두 명의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응?’

 

  왠지 낯이 익다 싶더라니, 다름 아닌 설이누나와 올백교수였다.

 

  “어!?”

 

  나는 순간 내 눈이 잘못되었나 싶었다. 갑작스레 올백이 설이누나의 어깨위로 팔을 두른 것이었다. 그러곤 능글맞은 표정으로 연신 누나를 만지작거리는데, 내 속이 다 니글거릴 정도였다.

 

  “내가 그래서 그것들한테 한마디 했잖아. 내가 그렇게나 우스워 보여? 이 개새끼들아?”

 

  “욕까지 하신 거면 조금 문제되는 거 아니세요?”

 

  설이누나가 태연자약하게 어깨로 올라온 그 두꺼운 팔을 옆으로 내리며 말했다. 이미 여러 차례 있었던 일인 듯 익숙해 보였다.

 

  나는 그들이 다가오자 재빨리 옆의 건물로 들어가 숨었다. 나도 나지만 그런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인다는 것이, 설이누나의 입장에서 그리 달갑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지나쳐가는 둘의 모습 역시 앞서 정휘와 소개팅녀의 그것처럼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물론 정확히 같은 느낌이라 할 순 없겠지만.

 

  그들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나는 건물바깥으로 나왔다. 맑은 하늘과 맑은 공기가 퀴퀴하게 가라앉은 내 기분과 대비되게 느껴졌다. 건물 틈으로 불어온 바람이 잠시나마 불쾌함을 씻어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가슴 한 편에 스며든 뭔지 모를 찝찝함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강의실에 도착한 건 수업시작까지 대략 20분가량이 남았을 즈음이었다.

 

  해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나 싶어 ‘언제쯤 와?’ 하고 톡을 보낸 다음, 강의실 밖 복도로 나갔다.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어 바람이라도 잠깐 쐴까 해서였다.

 

  창가에 기대 밖을 내다보던 중, 한 여성이 내가 있던 교양학관 건물 쪽으로 걸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멀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해와 실루엣이 굉장히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옆엔 처음 보는 남자가 하나 붙어 있었는데, 서로 마주보며 웃고 하는 게 굉장히 친밀해 보였다.

 

  잠시 뒤, 두 사람이 건물 앞에 도착했다. 남자는 여자의 가방을 슬쩍 어루만지며 여자에게 뭐라 속닥거리곤 곧이어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여자는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뭐해?”

 

  뒤쪽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해였다. 해는 방금 전 남자의 손길이 닿았던 가방과 똑같은 걸 메고 있었다.

 

  “어…… 그냥. 바람 좀 쐬려고.”

 

  “자리는?”

 

  “강의실 중간에 보면 내 가방 있을 거야. 파란색.”

 

  “응, 알았어.”

 

  강의실 안으로 훌쩍 들어가는 해를 보며, 나는 전에 해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도 남자인 친구는 거의 없어. 여중, 여고 나온 데다 대학에서도 웬일인지 잘 안 생기더라. 이렇게 금방, 또 쉽게 친해진 건 네가 처음이야.’

 

 

  남자의 정체는 쉽게 짐작이 갔다. 아마도 해를 찾아왔다던 그 소개팅 남이리라. 금방, 또 쉽게 친해진 남자가 한 명 더 생긴 게 그렇게나 기뻤는지 해는 앉은 자리에서도 줄곧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보낸 톡을 확인한 듯, 자리에 앉은 채로 핸드폰을 양옆으로 흔들며 손으로 X표시를 해 보였다. 못 봤다는 뜻인 것 같았다.

 

  ‘급한 약속이라…….’

 

  문득 해가 들어가 있는 강의실 안쪽과 내가 서 있는 강의실 바깥이 완전히 단절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굉장히 먼, 마치 영영 가까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리감에 나는 감히 문을 넘어가지 못했다.

 

  가슴은 더욱 답답해져만 갔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강의실 문이며, 복도 바닥이며, 창문틀이며, 계단이며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다 눈에 거슬렸다. 마치 윗니와 아랫니 사이사이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물질이 끼어 입 안이 온통 찝찝한 느낌이었다. 씹어 삼키거나 뱉어버리고 싶어도 어떻게 된 게 착 달라붙어선 떨어질 생각을 않는 것이다. 도리어 이들끼리 부닥쳐 뿌드득 하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휴우.”

 

  홀로 봄맞이 중인 정휘에, 설이누나 어깨위로 올라온 올백의 손에, 그리고 저토록 밝게 웃는 해까지…… 온통 짜증나게 하는 것들뿐이라 어디에도 마땅히 눈을 둘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저 맑디맑은 가을 하늘을. 어떠한 지독한 불쾌함도 감히 발붙이지 못할 저 광활한 푸름을 나는 힘겹게, 힘겹게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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