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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Plume
작가 : 별하랑
작품등록일 : 2019.9.10

(오후 11시~00시)"신이 되어야만 해." "싫습니다." 단호히 거절한 소녀를 보며 높은 신은 비웃는다. 어차피 소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네가 나고. 내가 너야.]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살려주세요." 울부짖는 아이.

"너에게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매혹적인 신은 소녀에게 속닥거렸다.

"자, 어때? 결정은......

네 몫이야."

 
1부- 3회
작성일 : 19-09-20 23:51     조회 : 243     추천 : 0     분량 : 7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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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신계 정중앙.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성 안에서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다양한 조각들과 화분들이 이곳저곳을 화려하게 꾸몄고, 전세계를 다 돌아가며 모은 듯한 기념품들이 장식된 곳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 여기가 아니네."

 

  이... 이......

 

  이 썩을 신아!

 

  이쯤되면 고의라고 생각한다. 한 번은 실수라고 쳐도 또 길을 해매는 르레이스비가 정말 한심할 정도였다. 여기서 몇 십억 년 머무신 분 맞으신지.

 

  녹색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타오른다. 저것은 다리도 안 아픈가, 생각하면서도 걱정해 줄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르레이스비나 키미안이나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자신만 이리 지쳤는가.

 

  "분명 여기쯤이었는데......"

 

  제 턱을 어루만지며 눈동자만 하염없이 데굴데굴 굴린 르레이스비가 한숨을 푹 내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쯤이었는데 보이지 않는 방의 소식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안 보일까?"

 

  왜 그걸 나한테 물으세요.

 

  휙 뒤를 돌아 따라걷는 둘에게 질문을 던진 르레이스비가 멈춰섰다. 오늘 처음 신계에 온 둘에게 묻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던 터라, 녹색 눈동자가 살벌한 눈빛을 품었다.

 

  "그렇겠지. 너희는 모르겠지. 에휴... 애들이라도 데리고 와야되나."

 

  구태여 고민하던 르레이스비가 손가락에 마찰을 일으켰고,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 빠르게 달려온 자가 르레이스비에게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응. 일레스, 건물 구축하는 방이 어디있는지 아니?"

  "예. 앞장 서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 활짝 웃으며 대답한 르레이스비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떻게 되어먹은 게 신보다 신하가 더 길을 잘 아냐.

 

  속으로 끌끌 혀를 차며 한숨을 푹 내쉰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왠지 사회가 거지같이 굴러간다 했다. 이런 신이 다스려서 그런 거였구만.

 

  "일은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어?"

  "절반 정도 진행 됐습니다."

 

  일레스라 불리는 자가 정중히 고개 숙이며 답한다. 르레이스비와 같은 찬란한 금발에 물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의 표정이 밝아보인다 하면 거짓이었다.

 

  저 익숙한 표정하며 억양은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제 나라에서 자주 본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축축 처진 목소리와 눈 밑으로 짙게 묻어난 다크서클이 그의 고된 노동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는다.

 

  눈에 그렁그렁 맺힌 것만 같은 녹색 눈동자를 보고 당황한 키미안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이미 진희의 정신 세계는 일레스의 노동에게 가 있었다.

 

  많이 힘들겠네요... 하필 만난 상사가 거지 같아서.

 

  "절반? 야,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지금. 내가 분명 오늘 저녁 먹기 전까지 다 끝내 놓으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너 같은 게 천관이니 신계가 이 따위로 돌아가지."

 

  와... 와......!

 

  진짜 진심으로 때리고 싶다.

 

  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뉘앙스에 주먹을 쥔 진희가 답답한 가슴을 쳤다. 네가 해보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속으로 꾹꾹 눌러 삼켰더니 고구마 몇 십 개를 물 없이 씹어 먹은 느낌이 들었다.

 

  "...... 죄송합니다."

 

  거기 오빠, 뭐가 죄송하다고 그래요. 그냥 한 대 쳐요.

 

  아침 드라마 볼 때보다 더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식혀보던 진희가 결국 눈을 사뿐히 감았다. 보다보면 수명이 팍팍 주는 것만 같은 느낌에 시야를 가리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오히려 말소리가 더 집중되어 결국 빛을 눈동자에 품었다.

 

  "에휴. 너희는 나 없으면 안 돼? 나 없이 일 한 게 지금 몇 십억 년 째인데 아직도 어리바리야."

  "죄송합니다."

  "야, 됐고. 도착하자마자 하멜 끌고 다시 와. 걔 아마 리니아랑 차 마시고 있을 거야."

  "네."

 

  저... 저...!

 

  저 죽여도 모자랄!

 

  입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씹어먹었지만 아직도 앙 다문 입술이 열리려 했다. 내가 쌍욕을 퍼붓지 않으면 화병으로 돌아가시겠다, 라는 생각이 콕 박혀 있었기에 부릅 뜬 눈도 감겨지지 않았다.

 

  진희와는 다르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던 키미안이 허리를 꾸벅 숙인다. 누구와는 다르게 빠른 길 안내로 방에 도착한 것이었다.

 

  르레이스비와 진희를 번갈아 보던 물빛 눈동자가 사뿐히 감기고 꼿꼿했던 허리가 숙여졌다.

 

  "제 1대 신 르레이스비 님과 제 4대 신 연진희 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미리 자리를 떠나보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래. 내 말이나 잘 듣고."

  "예? 무례라뇨."

 

  그게 무슨 무례야, 무례는.

 

  더는 참을 수 없다. 일레스라는 자는 제 소속이 아니지만 보다보니 불쌍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자신도 신이겠다, 권력을 이용해 일레스를 자유의 세상으로 꺼내주려 했지만.

 

  "무례지. 어디서 신이 여기 있는데 하인이 떠나려 하니? 내가 시켰으니까 이번만 용서되는 거야."

  "......"

 

  어머나, 미친.

 

  이 신은 상식이란 게 안 통하는 놈이란 걸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행운을 빌게요. 안녕.

 

  떠나가는 일레스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진희가 없는 눈물을 훔친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신계에서 태어나 살아가게 되었고, 하필이면 르레이스비가 상사라니.

 

  녹색 눈동자를 눈덩이에 살며시 가린 진희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뭐 해? 안 들어오고."

 

  벌컥 연 문 앞에 기댄 채 손가락만 까딱까딱 거리던 르레이스비의 눈에 열심히 다짐 중인 소녀가 밟혔다. 아까의 짜증을 이기지 못해 붉게 물들어 있는 눈동자는 모두의 입을 자동적으로 닫았다.

 

  아, 예. 들어가야죠.

 

  투덜투덜거리는 것도 꾹 참은 진희가 키미안의 옷자락을 살며시 쥐고 방으로 한 걸음씩 내딛었다. 혹시 여기에서 저를 죽이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키미안의 옷자락을 점점 세게 쥐었지만 자각하지 못 했다.

 

  둘 다 르레이스비의 기분으로 인해 자연스레 긴장한 상태였다. 손가락을 튕겨 달달한 마카롱을 입 안에 넣은 채로 이미 화가 풀린 르레이스비를 알 방도가 없었다. 너무 앞질러 나간 르레이스비의 표정을 알 수 있을 리가.

 

  신발 소리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키미안은 제 상사가 옷자락을 꼭 쥐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뻣뻣하게 굳었다. 얼떨결에 장기자랑 하러 나가는 사람처럼 삐걱거리는 발걸음은 안쓰러워 보이는 걸 넘어서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끔 만들었다.

 

  왜 이렇게 느리게 따라오나, 의문을 품은 채 뒤를 돌아본 르래이스비의 입매가 우스꽝스럽게 꿈틀거렸다.

 

  "너희... 큽... 왜 그렇게 굳어 있어."

  "예, 예?"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어찌 못 하고 애써 입을 가린 르레이스비가 어깨를 떨었다. 입을 가려서 반달처럼 접힌 눈가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침착한 척을 해봤지만 다 부질 없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옷자락을 꼭 쥐고 있던 진희의 표정이 사늘하게 식어간다. 건들면 죽일 것처럼 살기를 팍팍 써놓고는 언제 화가 풀렸는지 부들부들 웃는 르레이스비에게 평생 적응 못 할 것이라고 믿으며 수긍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건 답이 없다. 노답이야.

 

  "아이구. 이 귀여운 것들!"

  "아, 미친!"

 

  순간적으로 툭 튀어나온 욕설에 당황한 진희의 초점이 흔들렸다. 갑작스레 방긋방긋 웃으며 둘에게 달려든 르레이스비가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껴안은 것이다.

 

  긴장한 진희와는 다르게, 아랑곳하지 않고 둘을 더 세게 끌어안은 르레이스비가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내가 이러니까 너희들한테 잘 해주는 거야."

 

  네? 방금 제가 좀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팍 찌푸려진 미가를 열심히 피던 진희의 눈에 생기가 사라진다. 뜬금없이 진희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빈 르레이스비가 기괴한 소리를 흘려보냈다.

 

  죽여버릴까.

 

  "이 이쁜이들을 어떻게 할까... 맛있는 거라도 먹을래?"

  "네!"

 

  죽여버린다는 거 취소.

 

  맛있는 거. 그 말 하나에 녹색 눈동자에 형형색색 빛나는 생기가 돌아왔다. 신계에서 맛있는 거라면 뭔가 특별하겠지. 기대로 부푼 진희가 르레이스비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더 안아도 돼요, 언니.

 

  바로 달라진 눈빛에 르레이스비가 실소를 터트렸다. 고작 먹을 거 하나에 바뀐 게 참 귀여워 보인 듯, 연두색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가자."

 

  드디어 우리 르레이스비가 달라졌어요.

 

  부드럽게 휘어져 올라간 입꼬리에서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은 진희가 감격의 눈빛을 올려보냈다.

 

  그래, 너도 네 잘못을 아는 구나.

 

  언뜻 보면 정말 꽃이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은 둘만의 세계에 짙은 녹색 눈동자가 조용히 꿈뻑였다.

 

  진희의 소유이기에 감정쯤이야 대충은 읽을 수 있어서 그동안 르레이스비를 아주 싫어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즐거운 마음이 공간을 가득히 채웠다.

 

  하인들은 제 주인인 신의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슬픔, 기쁨, 행복함, 즐거움, 분노, 모든 것을 공감하고 같이 공유하기에 가득 의문을 품은 키미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 진희, 마카롱 좋아해?"

  "네! 네!"

  "그럼 인간계에서 많이 먹었을 테니까... 신계에서 나는 열매로 만든 거 줄게."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던 진희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벌써부터 먹을 상상에 흠뻑 취해있는 녹색 눈동자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출발할 준비를 하기 위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진희를 보던 불투명한 눈동자가 반달처럼 곱게 접혔다.

 

  "마카롱은 이따가. 일단 네 건물 먼저 만들고."

  "건물...... 이요?"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꿈뻑였다. 웬 건물.

 

  아까 분명 건물 만드는 방이라고 했지만 기억해내지 못 했다. 그때 당시엔 살기로만 가득 찼기에, 르레이스비의 말에 집중할 틈 따윈 없었다.

 

  "네 건물 만들거야. 너도 신이니까 네 거처가 필요해."

  "오호."

 

  아주 반가운 희소식에 표정이 활짝 펴졌다. 자신만의 건물이라, 어떻게 지을 지 머릿속으로 구상 중이던 진희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그래, 어디보자... 전체적으로 흰 색에... 연두색 포인트가 좀 있었으면 좋겠고... 정원도 좀 만들까? 아니야, 됐어. 식물 키울 수 있는 인내심이 아니야. 귀찮아서 금방 때려칠 게 뻔한데.

 

  머릿속에선 이미 뚝딱뚝딱 집을 만들고 있었다. 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구상하는 게 토끼 같아 르레이스비가 옅은 미소를 품었다.

 

  "만들고 싶으면 저기로 가."

 

  희고 가는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다름아닌 텅 빈 공간이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걸까, 라는 표정이 그대로 묻어난 터라 불투명한 눈동자가 보란듯이 웃는다.

 

  "가보면 알 거야."

 

  살며시 상체를 숙여 진희의 머리를 쓰다듬은 르레이스비가 싱긋 웃어보였다. 평소보다 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녹색 눈동자에 불만이 서렸다.

 

  아오, 그냥 알려주면 안 되나.

 

  불만를 곱씹어 삼키고 투덜거리며 르레이스비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엥......?"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작스레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없던 사물들과 배경들이 빼곡히 채워져 그저 당황스럽기만 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방 안이었던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저는 지금 마음이 뻥 뚫릴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 왔는지.

 

  "여기서 만들면 돼."

  "아니... 그니까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이 양반아, 좀 알려줘라. 맨날 안 알려줘.

 

  모든 얼굴근육을 사용해 어이없음을 표현한 진희의 시야가 불투명한 눈동자로 향했다. 무엇일까, 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눈빛은.

 

  "그 정도는 다 알지 않아?"

  "네. 아니에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라고 마음속에서 외치는 진희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올라갔다. 좀 빨리 알려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일까, 답답하기만 한 감정이 표정에서 짙게 묻어났다.

 

  "바보네."

  "예?"

 

  한 쪽 입꼬리를 들어 피식 비웃은 르레이스비가 들판에서 유독 푸른 빛이 도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선선한 바람이 분명 불어오고 있지만 단 한 점의 흔들림 없이 굳어 있는 잔디에 자연스레 시선이 향했다.

 

  왜 아깐 발견하지 못 했는 지 의문일 정도로 은은한 빛을 뿜어내던 잡초엔 작은 살얼음이 껴 있었다. 푸근한 날씨에 뜬금없는 살얼음은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저기에 가서 네 손을 얹어. 그리고 상상하는 거야, 네 거처를."

  "상상만 해서 되긴 해요?"

 

  약간의 의심을 품은 물음에 르레이스비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리가 없다는 의미였음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신뢰가 가지 않았다.

 

  혹시 신은 상상만 하면 모든 걸 다 이루는 걸까, 하는 기대감을 품어봤지만 역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저 곳에 가서 하라는 건 만들 수 있는 구역이 지정되어 있다는 뜻이니, 원한다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박사박.

 

  길고 긴 잔디를 밟아 살얼음이 낀 곳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아까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유독 넓은 푸른빛의 잔디에 잠시 입을 벌렸다.

 

  "우와......"

 

  광경은 멋있으나, 드라이아이스처럼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잔디를 밟고 서 있노라니 기분이 미묘해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분 나쁜 무언가가 제 몸을 조여오는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단 하나의 생각이 뒷걸음질을 멈췄다.

 

  마, 내가 바로 신이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온 몸을 휘어감는다. 세상이라도 지배한 듯한 여유 넘치는 모습에 지켜보던 불투명한 눈동자가 반달처럼 접혔다.

 

  "음......"

 

  기본적으로 흰 색 건물에... 어어... 그 뭐냐, 그래, 호텔 같이 세련된 디자인이 최고지.

 

  주체 못하고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나만의 거처라니, 얼마나 좋은가. 생각만 해도 행복한 상상에 헤벌쭉 벌어진 입이 진희의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니야, 대기업처럼 멋지게 하자. 쓰읍... 호텔 디자인이 예쁘긴 한데...

 

  행복해지는 것도 참 어려운 거구나. 이제와서 새삼스레 깨달은 진희가 고개를 푹 떨궜다. 둘 다 짓고 싶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지, 꼭 감은 눈을 뜨며 탁 트인 들판을 바라보자니, 이곳을 어서 제 건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공간이 제 것인지는 몰라도, 만약 이곳에 세워진다면 아주 근사할 것 같았다.

 

  "저... 혹시 두 개 지어도 될까요?"

  "응? 그건 상관없어. 네가 원하는대로 막 지으면 되는 거야."

  "아, 진짜요?"

 

  그런 것쯤은 다 알 줄 알았다는 듯 르레이스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려주지 않았으니 알 방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희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불투명한 눈동자만 꿈뻑였다.

 

  좀 미리 알려주지.

 

  괜히 궁시렁거린 진희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잔디에 손을 가져간 채로 눈을 사뿐히 감았다.

 

  제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면 망설일 것도 없다. 닥치는 대로 짓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낄 마음도 없었다.

 

  이제서야 이해되는 르레이스비의 방황이 마음에 와닿았지만, 그렇게 책임도 못 질 거면서 무작정 크게 짓고 싶진 않았다.

 

  "일단은......"

 

  두 개 먼저 짓지, 뭐.

 

  마음의 결정이 내려지기 무섭게 살얼음이 낀 잔디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며 용처럼 춤췄다. 이내 높게 솟은 빛들이 광망 아래에서 찬란히 부서진다. 모든 준비를 끝냈다는 듯 구태여 깜빡인 빛들이 허공으로 천천히 흩어지며 건물을 차례차례 만들어냈다.

 

  "와......"

 

  입을 떡 벌린 채로 다물지 못 하는 진희의 눈이 초롱초롱한 생기를 품었다.

 

  생각한 대로 정말... 정말......

 

  너무 근사했다.

 

  멀리서 봐도 알 것 같은 세련된 디자인의 두 건물이 녹색 눈동자를 빈틈없이 채워주었다. 하나는 푸른 유리로 둘러싸인 높은 건물. 하나는 흰 색 바탕에 금색과 녹색으로 포인트를 잡은 조금은 낮은 건물.

 

  두 건물 다 진희의 취향을 저격했지만 르레이스비는 통 이해할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왕궁처럼 거대하고 근사한 것을 좋아하는 르레이스비와는 정반대로, 진희는 세련되고 심플하면서도 높은 건물을 선호했다.

 

  "크으......"

 

  자본주의, 아니, 권력 최고.

 

  원래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권력이 최고였다. 어떤 금수저가 상상만 해서 바로 건물 하나 뚝딱 지을 수 있겠는가.

 

  한때 신이 되길 거부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환희에 젖은 진희가 고개를 높이 들어올렸다.

 

  안녕, 햇살아! 너는 이런 거 못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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