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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더럽(The Love)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9.9.3


"나, 다른 사람 같이 좋아해도 돼?"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관계와 사랑
그것의 시작,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하여.

#대학생 #캠퍼스물 #악의꽃 #섹슈얼리티 #조별과제 #폴리아모리

 
3. 시간을 돌리는 마법의 주문, 워프(4)
작성일 : 19-09-17 01:34     조회 : 249     추천 : 0     분량 : 7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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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해가 내게 윗도리(직접 빨아다 말린)를 가져다 준 이후부터 줄곧, 해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옷을 가져다주던 날 밤, 해는 잠깐 시골에 내려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곧 개강인데?”

 

  “잠시만 있다가 올라 올 거야.”

 

  “너 토익학원은?”

 

  “2주 끝났거든 바보야.”

 

  해가 새침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흘겼다.

 

  “……토익시험은 언젠데?”

 

  “개강하고 일주일 뒤.”

 

  “바로 시험 치는 거 아니면 그래도 조금씩은 계속 공부하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책 들고 내려가게.”

 

  “퍽이나 하겠다. 근데 왜 내려가는 거야?”

 

  내 질문에 해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강아지 보러 갈 거야.”

 

  “뭐? 강아지?” “응. ‘압둘’이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키웠던 앤데 나 대학 들어오면서 할아버지 댁에다 맡겼거든. 이젠 다 늙어서 시간 날 때마다 보러 가지 않으면 안 돼. 혹시나 나 없을 때 잘못되진 않을까 자꾸만 겁도 나고…….”

 

  “아아. 그런데 ‘압둘’이라니? 네가 지은 이름이야?”

 

  “그럼, 내가 지은 거지.”

 

  해가 으스대며 말했다.

 

  “굉장히…… 특이한데? 무슨 뜻이야?”

 

  나는 이름을 듣자마자 생각났던 ‘괴상’이란 단어를 잠깐 고민하다 ‘특이’로 순화시켜 물었다.

 

  “그냥 발음이 귀여워서 지은 건데? 나 어렸을 때 아빠가 무슨 농구채널 같은 걸 보고 있었거든? 근데 갑자기 어떤 흑인을 가리키면서 ‘자바다! 카림 압둘 자바!’ 하고 소리치는 거야. 왕년의 스타였다나 뭐라나. 뭐야…… 하고 텔레비전을 보니까 웬 양복 입은 흑인 아저씨가 선수들에게 막 화를 내며 손짓을 하고 있더라고. 엄청 크고 무섭게 생겼는데 정작 이름이 너무 귀여운 거야. ‘압둘’이라니. 왠지 숫자를 갓 배운 아기들이 하나 둘 발음할 때 그럴 것 같지 않아? 압둘, 압둘 하고.”

 

  “음…… 아니, 전혀.”

 

  그러자 해가 “흥, 하여튼 난 그랬어”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한동안 입버릇처럼 ‘압둘’, ‘압둘’ 하고 다녔는데, 그맘때쯤 아빠가 어디선가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 온 거야. 엄청 귀엽게 생겼더라고. 마침 내가 어마어마하게 귀여운 이름을 하나 알고 있지 않겠어? 그래서 냉큼 이름을 붙여주었지. 압둘아 안녕? 오늘부터 넌 압둘이야.”

 

  나는 그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래서 압둘이야? 압둘…… 암만 그래도 ‘압둘’이라니…… 그냥 완전 중동 중동한데? 할아버지도 그렇게 부르셔?”

 

  “그럼, 그게 이름인데 당연하지. 마음에 든다고도 하셨어. 아들이랑 어감이 비슷해서 더 좋다고.”

 

  “아…….”

 

  그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찌르르 하고 울렸다. 묘하게 얻어걸린 느낌이긴 하지만 나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압둘이는 이제 잘 걷지도 못해. 계속 누워만 있고…… 두 달 전에 갔을 땐 간신히 날 알아보는 것 같더라고. 그런데도 뛰어오질 못했어. 터벅터벅 걸어와서는 내 무릎께에 자기 얼굴을 비비는 거야. 너무 슬퍼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어.”

 

  “……너 지금도 울겠다.”

 

  해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만 같아 나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그래서 사진도 많이 찍고 추억도 많이 만들고 오려고. 올라올 때 연락할게.”

 

  그러고 다음날 새벽 곧장 시골로 내려가서는, 개학을 하루 앞둔 오늘까지도 아무런 연락을 해오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카페 구석에 홀로 앉아 저물어가는 방학의 마지막 노을을 보며 생각했다.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

 

  잠을 늘어지게 자는 것도, 이렇게 한가로이 여유를 즐길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내 노트북 화면에 자리한 시간표는 가히 두려움이 일 정도였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은 금요일 단 하루에 불과했고, 그날 역시도 오후 늦게야 모든 수업이 끝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무료한 오늘까지의 나날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하아.”

 

  나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괜스레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갉아 먹힌 상태였고, 막연한 불안만이 내 어깨너머로 드리워지는 중이었다. 그래, 마치 저기 저 살그머니 다가온 보랏빛 하늘처럼.

 

  “와, 하늘 좀 봐!”

 

  옆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어느 남녀커플이었다. 그들은 보라색으로 물든 하늘을 보며 나직이 감탄사를 내뱉고는, 곧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들을 시작으로 주위의 모두가 하늘을 보며 저마다 짧게 탄성을 질렀다. 내게 불안처럼 다가온 그것은 누군가에겐 아름다움으로, 기쁨으로, 환희로 다가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은, 사실은 내게도 그것은 아름다운 하늘이었고, 아름다운 색이었다. 떠나는 자의 남겨진 미련 같은 저 보랏빛은 내게도 간직하고픈 순간이었다. 나는 다만 우울했고, 울적했으므로 핑계를 댄 것뿐이다. 저 지는 해가 아쉬운 게 아니었다. 주위를 아득하게 만드는 저 어둠이 싫은 게 아니었다. 나는 여태 연락한 번 없는 해 때문에 무기력했다. 더없이 허전한 기분에 마음이 착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다.

 

  카페에서 노랗게 뜬 달을 보고, 근처 식당에서 아무렇게나 배를 채운 다음, 편의점에 들러 맥주 두 캔과 안주 몇 가지를 사들고 집에 돌아오니 밤 열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 침대 위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본래도 술을 잘 즐기지 않을뿐더러 혼자서는 따로 먹어본 일조차 없었지만, 웬일인지 그러고 싶은 밤이었다. 거의 반 캔을 쉼 없이 넘기니 맥주의 탄산이 목구멍을 따끔히 쏘아댔다. 조금 더부룩하긴 해도 근래 맛보지 못한 청량감이었다. 그 시원하고도 짜릿함 덕에 축 처져있던 정신이 조금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중에 문득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해의 집에서 빌려온 「악의 꽃」이란 시집이었다.

 

  아주 더럽고 추악한 것들에 관한…… 그런데 그만큼 아름답기도 해

 

  부쩍 호기심이 일어 책을 집어 드니 표지의 소녀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음흉하고도 사악한 미소였다. 나는 한 손엔 맥주를, 한 손엔 시집을 들고서 침대 머리맡에 몸을 뉘었다. 그러곤 천천히 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31. 흡혈귀

 

  비수처럼

  가엾은 내 가슴에 파고든 너.

  악마 무리처럼 거칠고

  광기 어린 모습으로 차려입고 온 너는

 

  모욕당한 내 마음을

  자기 것으로, 자기 영토로 삼는다.

  -더러운 악녀야, 나는 네게 얽매였다.

  사슬에 매인 죄수처럼,

 

  노름판을 못 떠나는 노름꾼처럼,

  술병을 못 내려놓는 술꾼처럼,

  썩은 고기를 파먹는 구더기처럼,

  -너는 저주받고 저주받았도다!

 

  내 자유를 되찾아달라고

  날쌘 칼에 빌기도 하고,

  내 비겁함을 도와달라고

  더러운 독약에 하소연도 했다.

 

  그런데, 아! 독약과 칼이

  나를 깔보며 대답하기를

  “넌 저주받은 노예 처지에서

  구해줄 가치도 없다.

 

  어리석은 자여! 설령 우리가 노력해서

  그녀의 지배에서 너를 구해낸다 해도

  네 입맞춤이 되살리리라.

  자기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의 시체를!”

 

 

  휴대폰이 울린 것은 내가 막 잠들락 말락 할 즈음이었다.

 

  해는 울고 있었다. 어떠한 인사말도 생략한 채 그저 그렇게 흐느끼고만 있었다.

 

  나는 잠결이긴 했지만 해의 슬픔을 온전히 다 느낄 수 있었기에, 아무 말 없이 해의 울음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여…… 연락…… 흑…… 하려고…… 흑…… 했었는데…….”

 

  “……무슨 일 있는 거야?”

 

  “흑…… 죽었…… 흑…… 압둘이가…… 내가 내려갔는데 흑…… 갑자기 컹 짖고는 주저앉더니…… 흑흑…… 기운을 못 차려서…… 흑…… 내가 약을 먹였는데…….”

 

  수화기 너머로 흐느낌이 들려올 때부터 왠지 그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강아지가 죽은 것이었다. 해는 말을 하면 할수록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점차 단어를 말하는 시간보다 훌쩍거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너 올라온 거야? 서울?”

 

  “흑…… 흑…… 응…….”

 

  “집이야?”

 

  “흑…… 응…….”

 

  “잠깐 볼까 그럼?”

 

  “……응.”

 

  “조금 있다 나갈 테니까 시간 맞춰 집 앞으로 나와.”

 

  “응…….”

 

  해의 집 앞 골목어귀에 다다르자 누군가 계단 앞에 앉아 달빛을 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마치 내려오는 달빛을 잡아보려는 듯 손을 높이 뻗은 채로 연신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봤더니 역시나 해였다.

 

  “빨리 나와 있었네?”

 

  “응…….”

 

  해는 생각보다 침착해 보였다. 눈이 부어있긴 했으나 눈물이 고여 있진 않았다. 몸을 떨지도, 코를 훌쩍이지도 않았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침울한 기색이 눈과 입과 미간에 조금씩 서려 있었다.

 

  “뭐하는 중이었어?”

 

  “압둘이…… 쓰다듬어 주고 있었어.”

 

  “……압둘이?”

 

  “응. 압둘이 묻어주려고 산엘 올라갔는데 유독 한 곳으로만 달빛이 모여들고 있는 거야. 이리로 데려와……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어. 그래서 거기로 가서 서니까 정말로 압둘이 몸에 빛이 어리기 시작하는 거야, 마치 새 생명이 깃드는 것처럼. 그래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지. 조금 더 밝은 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그곳에 묻고 온 거야?”

 

  “응……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거든? 그런데 그때의 달이 너무나도 밝은 거야, 눈물이 다 날 정도로. 그렇게나 환한 얼굴로 압둘이는 자기가 데려간다고 내게 인사하는 것 같았어.”

 

  해는 달을 향해 있던 고개를 천천히 내 쪽으로 돌렸다.

 

  “지금이 그때와 꼭 같은 달이야. 그래서 천천히 쓰다듬어주고 있던 중이었어. 여기 위쪽은 압둘이 머리고 조금 아래는 배야. 그리고 여기는 꼬리. 압둘이는 배를 살금살금 간질여주는 걸 가장 좋아했어.”

 

  그러고 허공을 더듬거리고 있는 해를 보니 한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여기? 이쪽이야?”

 

  내가 허공을 향해 간질거리는 시늉을 하자 해가 웃으며 말렸다.

 

  “그렇게 세게 하면 어떡해! 부드럽게 다뤄줘야지, 나이도 많은데.”

 

  나는 그렇게라도 해가 웃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앞에 떠 있는 개를 상상하며 연신 손바닥으로 허공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해가 한 차례 킥킥거리더니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이제 괜찮아. 그리고 늦었는데 와 줘서 고마워.”

 

  “……뭘.”

 

  “나 아까도 엄청 울고, 계속 울고 그래서…… 오늘도 울다 잠들 줄 알았는데…… 너 와서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그럼 다행이고.”

 

  해는 내 손을 잡은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기다란 눈꼬리에 속상꺼풀이 져있는 눈이었다. 나는 그 깊은 시선에 조금 긴장이 되었으나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해의 눈이 참 맑고 예쁘게 빛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오랫동안 해의 눈과 마주하고 싶었다.

 

  얼마쯤 지나자 해는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뗐다.

 

  “우리 맥주라도 한 잔 할래?”

 

  “그럴까? 여기 근처에 편의점 있나?”

 

  “저기 있어. 내가 사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같이 가지 뭐.”

 

  “아니야. 여기 그냥 있어.”

 

  나는 해가 뛰어간 방향을 보며 작게 미소 짓다가도, 술이 들어가면 해가 또 우울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우리는 해의 집 앞 계단에 앉아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홀짝거렸다.

 

  그 거센 침묵의 시간동안 나는 하염없이 달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기보다는 상황에 맞는 마땅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로나 격려, 혹은 공감…… 그 어떤 것도 내겐 쉽지가 않았다. 해가 그렇게나 쉽고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주었던 것과는 달리, 그토록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저 허공을 쓰다듬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해의 슬픔에 깊이 있게 공감하지는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저 보편적인 안타까움과 얕디얕은 연민의 시선, 그것만이 내가 내비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밀려드는 서글픔을 안주삼아 반쯤 남은 맥주를 홀짝거렸다. 그렇게 침묵이 계속되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작스레 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두 눈이 촉촉하게 젖은 해가 가슴을 감싸 쥐고 있었다.

 

  “흑…… 안 돼…….”

 

  “……응?”

 

  “……안 된다고!”

 

  “뭐가? 너 괜찮은 거야?”

 

  웬일인지 해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역시나 술 때문인지, 해는 갑작스레 찾아든 슬픔에 쉬이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네가 가르쳐 준 거…… 워프…… 그게 안 돼. 안 지나가져…… 흑…… 더 이상 슬프지 않은 때로 빨리 넘어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계속 여기에 머물러있는 것만 같아…… 흑…… 나만 아프지 않으려고, 압둘이 생각 안 하려는 게 너무 미안해서…… 그래서 그냥 버텨보자고 마음먹었는데도…… 흑…… 그래도 너무 슬프니까…… 마음먹고 주문 외운 건데…… 왜 이렇게 안 돼는 거야 짜증나게! 이씨…… 흑…… 나 어떡해 이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똑 하고 떨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해가 “으앙” 하며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하염없이 주문을 되뇌고 있었을 해를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등이라도 토닥거려줄까 하다 그냥 관두기로 했다. 괜히 더 거추장스럽게 느낄 것 같아서.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 해의 볼을 타고 흐르던 슬픔을 지켜보았다. 어쨌거나 혼자 내버려두지 말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해는 오랜 시간을 서럽게, 아주 서럽게 울었다.

 

  *

 

  “이제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정말로.”

 

  두 눈이 벌겋게 물든 해가 나를 또렷이 쳐다보며 말했다.

 

  “더 울어도 돼. 시간 많아.”

 

  “……됐다니까. 그리고 나 원래 잘 안 울어.”

 

  “아…… 그래?”

 

  “뭐야, 그 반응?”

 

  어느새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해를 보니 나도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내일 개강인 건 알고 있지?”

 

  “내가 바본 줄 알아?”

 

  “몇 시 수업이야?”

 

  “1시. 나 이번 학기 오전 수업 하나도 없다?”

 

  “와…… 난 금요일 하루 빼고 다 있는데.”

 

  그러자 해가 픽 웃었다.

 

  “바보, 시간표를 왜 그렇게 짜. 잠깐만 내일 오전 수업이면…… 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너 빨리 가서 자야겠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얼른 가, 얼른.”

 

  마침 슬슬 발뒤꿈치가 당기고 뒷목이 뻐근한 게, 폭신한 이불이 생각나던 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도 나를 따라 일어났다.

 

  “그럼 슬슬 가볼게.”

 

  “잘 가. 오전 수업 빠지지 말고.”

 

  “넌 잘 자고. 울지는 말고.”

 

  “……응.”

 

  “갈게.”

 

  그러나 웬일인지 내가 등을 돌릴 때까지도 해는 무언가 못 다한 말이 있는 사람처럼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혹시 무슨 할 말이 남았나 싶어 잠시 선 채로 기다려도 봤지만 해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잠시 뒤, 멀어져가는 해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꺼내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누우니 벼락처럼 잠이 쏟아졌다.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질 것만 같았다.

 

  저물어 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해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렸다. 흔들리는 눈, 떨리는 눈썹, 열릴 듯 열리지 않는 입. 아니 어쩌면…… 그건 무언가를 말하지 못하고 삼킨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누군가의 열리지 않는 입을 기다리던 사람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때의 내 얼굴을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혹여나 나는 무언가를 말하지 못한 채 등을 돌렸던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주저하는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건, 그러니까 해가 아니라 오히려 내 쪽이 아니었을까.

 

  나는 어렴풋 떠오르던 그때의 내 표정을 뒤로한 채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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