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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Plume
작가 : 별하랑
작품등록일 : 2019.9.10

(오후 11시~00시)"신이 되어야만 해." "싫습니다." 단호히 거절한 소녀를 보며 높은 신은 비웃는다. 어차피 소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네가 나고. 내가 너야.]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살려주세요." 울부짖는 아이.

"너에게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매혹적인 신은 소녀에게 속닥거렸다.

"자, 어때? 결정은......

네 몫이야."

 
[서장] 3회
작성일 : 19-09-13 01:33     조회 : 235     추천 : 0     분량 : 10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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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다 수고 많았어."

 

  악몽 같았던 랭킹전이 쉼표를 찍었다. 몸도 마음도 잔뜩 지쳐 있는 상태에서 절망에 빠져 덜덜 떠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니 더욱 고통스러워 애꿎은 연두빛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순위는 알아서들 확인하고, 내일 보자."

 

  푸근하게 미소 지은 초로의 또다른 피엘르 담당 교사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유유히 자리를 떴다. 이제야 끝이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다난한 일이 많았던 하루라서 그런지 모든 게 정선없이 슉슉 지나간 느낌이었다. 기이한 목소리도, 오늘따라 유독 가차 없었던 진화의 심사도.

 

  마나를 십 분의 일도 쓰지 않았지만 어째 다 쓴 것처럼 기진맥진했다. 이제 걸을 힘도 없다. 마나로 회복하려해도 심적으로 지친 정신은 치료되지 않았다.

 

  '진짜 오늘은 누구라도 건들면 가만 안 둘 것 같......'

 

  "꺄아아악!"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뒤를 돌아봤다. 바퀴벌레라도 봤나. 비명이 난 곳으로 시선이 돌아갔을 때, 녹빛 눈동자엔 자욱한 연기만 보였다. 심사는 이미 끝났는데 웬 연기가 있는 지. 눈을 찌푸려 그곳을 자세히 보니 많은 학생들이 그곳에서 서둘러 도망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이라도 난 걸까, 싶었지만 그건 말이 안 됐다. 불 끄는 것쯤이야 숨쉬는 것처럼 쉬우니까. 도망치는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진희의 눈이 흔들렸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꼭 겁에 질려 도망가는 생쥐처럼.

 

  "......?"

 

  이게 무슨 일인지.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덜컥 겁이 나 그곳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모레를 밟을 때마다 나는 먼지가 연두빛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어......! 연진희 언니인가...?"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많은 피의 양과 달리 적은 학생의 수를 보자마자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일을 누가 벌인 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일어나지 못 한 모양인지 어떻게든 기어와 진희의 발목을 끌어 안았다. 녹빛 눈동자에는 부서진 건물과, 제게 살려달라 비는 아이들의 모습만이 담겼다. 역한 피비릿내에 윽, 하는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와주세요...... 제발."

  "혹시 미즈르 왔었나요?"

 

  무릎을 꿇은 학생들이 다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달라며 읊조리는 아이들은 구세주라도 나타난 듯이 진희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몇몇은 진희의 발목과 손을 붙잡으며 제발 도와달라 빌었다.

 

  "알겠으니까 이거 놓고 말해요."

 

  도와주려 해도 못 움직이게 붙잡는 아이들을 쳐내고 나서야 심적인 안정이 찾아왔다. 허나 이 아이들을 두고 혼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즈르는 한 번 찾아오면 연결 포털을 막아버리기에 이 아이들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언제 또 미즈르가 와서 학생들을 데려가 실험에 쓸 지는 누구도 모르기에 저절로 짙은 탄식이 내뱉어졌다.

 

  "미즈르 어디있어요?"

  "저, 그......."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단호한 말투에 14살도 채 안 된 아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1층 후관에 있을 거예요, 아마...... 다른 선배들이 붙잡고 있을 테니까."

  "누구누구 갔어요."

  "사라 선배님이랑 민화 선배님, 그리고 뒷처리는 문희 선배님이 해주고 계세요."

 

  익숙한 이름들이 호명되자 마음이 놓였다. 민화는 랭킹 3위, 사라는 랭킹 42위, 문희는 랭킹 71위. 모두 믿고 맡길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안심으로 한결 진정된 눈동자가 멈추었다.

 

  "일단은."

 

  진희의 손에 얇은 손목이 잡혔다. 어깨와 다리에 심한 상처로 푸른빛을 띠는 마나가 휘감으며 바람에 맞춰 춤 춘다. 신비로운 빛의 결합에 사슴 같은 눈망울이 꿈뻑거렸다. 분명 피가 철철 흘렀던 부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매끈해지자 아이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기다려요. 사라 데려올테니까."

 

  아이의 둥근 머리에 흰 손이 닿았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도 안심하며 떠나는 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금간 천장에 데롱데롱 달린 전등이 마지막 희망이라도 잡으려는 것인지 깜빡깜빡 거리는 빛을 구태여 토해낸다. 처참히 부서진 벽으로 보이는 밖을 살짝 훑기만 해도 몇 십만의 미즈르가 보였다. 정말 작정하고 온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들의 손엔 학생 여럿이 붙잡혀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계속해서 흔들리고 바뀌었다. 자욱한 모레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파편들이 곳곳에 튀며 도망치던 아이들의 발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쾅! 콰앙!

 

  언뜻 보면 사람 같아 보이는 고철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학생들을 수레에 담고 있었다. 대충 120대 정도의 숫자가 벽을 부수고 사물을 들며 숨어있던 아이들까지 모두 담아냈다.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수레 주변을 휘휘 감고 있는 미즈르들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멀리에서부터 보이는 연두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기기에 탑제된 기능으로 얼핏 살펴봐도 넘치는 마나의 양에 위험을 감지한 미즈르들이 수레를 제 뒤로 뺐다.

 

  "야, 연진희! 빨리 튀어와!"

  "알겠으니까 사라 좀 보내봐."

 

  뛰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수레 속에 담겨 공포에 떠는 아이들이 안심한듯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파르르 떨리던 어깨가 잠잠해지고 힘이 잔뜩 들어간 손에 힘이 풀렸다.

 

  투명한 물빛 머리카락이 진희 옆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왜 보내라는 지 알기에 사라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의 옆으로 달려나갔다.

 

  어느새 미즈르에게 한 걸음 다가온 진희의 오른손엔 돌고래처럼 춤추는 마나들이 둥글게 뭉쳐 있었다. 반대 쪽 손으론 푸른빛의 사슬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오, 징글징글해."

 

  마나로 이루어진 사슬이 수레를 감싸고 끌어당기려하자 어떻게든 끊어보려 아둥바둥 발길질 하는 것이 참 우스꽝스럽다. 마나는 마나로 끊어야하고 힘으론 죽어도 못 끊어낸다. 상황 파악이 된 미즈르들이 하나 둘 수레를 붙잡고 줄줄이 매달리자 쓸데없는 마나의 소모가 더 커지게 생겨먹었다. 쯧. 짧게 혀를 내두른 진희가 마나를 더 실어 수레를 잡아당겼다.

 

  땅에 발을 박아봐도 마나에게 끌려가는 미즈르들을 보며 민화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만 말고 저것들 좀 어떻게 해 봐."

  "푸학! 그래, 그래. 우리 진희가 하라는 데 또 고급 인력이 나서줘야지."

  "그냥 가라. 내가 생각을 잘못했네. 너부터 처리 했어야 됐는데."

 

  너무하네. 뒷말을 붙인 민화가 입을 삐죽 내밀며 언뜻보면 타오르는 불같은 마나를 가볍게 튕겨 고철 덩어리에게 쐈지만 이상하게 맞지 않았다. 평소라면 바보같이 그대로 맞았을 고철덩어리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마나를 피했다.

 

  "뭐야. 얘네 언제 지능이 생겼어."

  "...... 좀 제대로 봐라."

 

  진희의 한숨 섞인 말에 민화가 갈라진 틈을 찡그린 채로 바라봤다. 수레 너머로 보이는 유독 거대한 회색빛 사람 형태의 미즈르를 본 간단한 소감을 뱉었다.

 

  "개구려."

  "아, 그건 맞는데, 저거 머리통 쪽 봐봐."

 

  정말 쓰레기를 모아둔 것 같은 디자인에 혀를 찬 것도 잠시. 미즈르의 머리통엔 헬멧 대신 유리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눈에 힘을 잔뜩 준 채로 살펴보자마자 표정이 서서히 구겨졌다.

 

  "아, 눈 버렸어."

 

  그 조그만한 곳에서 와인잔 들고 온갖 멋이란 멋은 다 부리면서 입꼬리를 쭉 올리고 있는 20대 정도 외형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필르야티엘 입학하고 나서 지금이 여섯 번째인가. 너무 익숙한 얼굴에 반가움보단 짜증이 더 앞섰다.

 

  "야, 집이나 가라."

 

  수레를 끌어 제 옆으로 옮기고 두 손을 모아 크게 외친 말에 남자의 얼굴에 방긋거리는 미소가 그려졌다.

 

  "우리 진희 오랜만에 보는 건데 말이 너무 험하네."

 

  곱슬거리는 회색빛 머리를 쓸어넘긴 거구의 남자가 바보같이 싱글벙글 웃으며 핏빛 눈동자에 진희를 담아냈다.

 

  "오랜만은 개뿔. 그동안 온 거에 비하면 더럽게 일찍 왔구만. 야, 그나저나 머리 잘 썼다? 랭킹전에 오고. 진짜 쓰레기야, 카를 너는."

  "우연일 뿐이야, 우연.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아니."

 

  와인잔을 대충 뒤로 집어 던진 카를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철 덩어리에서 뛰어내렸다.

 

  "어째 진희는 볼 때마다 더 마나가 많아지는 것 같다?"

  "뭔 헛소리야."

  "그러니까 네 친구가 널 버리고 간 게 아닐까?"

  "뭔......"

 

  또 헛소리하나보다, 싶어 뒤를 바라보자마자 진희는 그 말을 수긍했다. 언제 갔는지 아까부터 있던 민화가 사라져 있었다.

 

  "봐. 사실이잖아."

  "사실이고 나발이고 집 가서 발 뻗고 잠이나 자."

 

  이게 어디서 수작질이야.

 

  딱 봐도 시간 끄려는 속셈에 넘어갈 리 없었다. 진희의 짜증 섞인 말에 카를이 어깨를 으쓱이며 콧바람을 불었다.

 

  "음음, 그건 안 되지. 실험체가 다 떨어져서 가지러 온 것뿐인데 물러나라니."

 

  생글생글 웃던 미소를 거둔 카를이 사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녹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필르야티엘 학생들을 제 실험체로 삼아 매번 교활하게 몇 명씩 꼭 챙겨가는 저 놈에겐 미운 정조차 들지 않았다. 실험체라는 단어에 진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럼 그냥......"

 

  손에 빠른 속도로 거대하게 뭉치고 있는 마나에 카를이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지만 다 무용지물이다.

 

  "여기서 죽던가."

 

  방금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맨날 생쥐처럼 어떻게든 도망가는 저 놈을 반드시 죽여야 분이 풀릴 듯 했다. 손바닥 위로 가득 품은 마나가 제 감정에 맞춰 타오르는 불처럼 일렁였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몇 년이 지나도 꺼려졌지만, 저건 생명체 취급 자체를 해 주면 안 되기에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번에도 도망갈라 가득 품은 마나의 일부를 떼어 사슬을 만들었다. 놈의 몸에 칭칭 감긴 사슬을 나만이 풀 수 있도록 마나의 서명이 담긴 자물쇠까지 걸어잠구었다. 서명이 담긴 자물쇠는 주인의 마나보다 더 많은 자만이 강제로 푸는 게 가능하니 저 놈이 풀 수 있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갑자기 저를 묶은 것에 당황한 카를이 몸에 균형을 잃고 우스꽝스럽게 넘어졌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살기를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애써 고개를 들어 진희를 올려다봤다.

 

  "이것 좀 풀고 얘기하지?"

  "또 쥐새끼 마냥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에 카를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저 미소다. 저 미소가 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받아들이기 묘한 미소. 어쩐 지 찜찜한 저 더러운 미소가 정말 더러웠었다.

 

  이를 뿌득 가는 진희를 보는 카를은 속을 알면서도 오히려 더 긁으려 들기만 했다.

 

  "도망가긴 뭘 도망가. 진짜 안 도망갈게."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 해. 지금껏 수 만 명도 넘게 죽인 놈이 무슨 낯짝으로 그러는 지 내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되네."

  "그건 내가 아니라 저기 있는 내 미즈르들이 죽였지."

  "그거나, 그거나. 네 실험체잖아."

 

  어떻게 하면 저렇게 뻔뻔해질 수 있을까. 뻔뻔함에 대한 상이 있으면 무조건 저 놈이 받을 것이다. 내가 장담한다.

 

  진희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와중에도 제 주인을 구하겠다고 뛰어오는 미즈르들이 사슬에서 뿜어져나오는 마나에 의해 쓰러져갔다. 뒤를 힐끔 본 카를의 눈동자에는 당황한 기력이 서려 있었다. 진심으로 감탄하며 사슬을 푸려는 것이 다 무용지물임을 다시 한 번 깨닫은 순간일 것이다.

 

  "이야, 진짜 내 애들 다 죽이네."

  "야, 말은 똑바로 해. 우리 학교 애들이지, 네 애들이야? 가져가서 제조하면 네 거다? 그럼 뭐 살 때 어디산이라고 왜 써. 그냥 자기가 만들었으니까 자기 거라고 쓰지."

  "그래, 그러니까 내 거지."

 

  뭔 논리람.

 

  이젠 정말 황당하기까지 해 말이 안 나온다.

 

  그래, 저 놈은 빠르고 깔끔하게 죽이는 게 답이겠다. 피라도 튀면 어떻게 해. 더럽게, 정말.

 

  "크으윽......"

 

  카를의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프겠지. 지금 마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가 온 몸을 다 헤집어 놓고 있을테니. 무덤덤한 표정으로 저를 상처 입히고 있는 진희를 힐끔 쳐다본 카를이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통을 속으로 썪혀냈다.

 

  "진짜...... 진희 많이 가차 없어졌... 네. 아가 때는 상처 하나 못 입히던 게......"

  "더럽게 시끄럽네, 진짜. 물 속에서 죽으면 주둥이만 둥둥 뜰 거야, 너는."

 

  카를이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마나를 더해가며 고통을 극대화 시켰다. 겉이 아니라 속에서 느껴지는 아픔으로 그동안 죽인 수만큼의 시간을 고통받게 할 셈이었다.

 

  "친구 앞에서 그런 말 써도 돼?"

  "무슨 친...... ."

 

  카를이 손가락을 까딱하자마자 한 미즈르가 날아와 카를 옆에 섰다. 아직 덜 자란 앳된 청소년의 모습을 띤 고철 덩어리의 얼굴 가죽은 3년 전, 진희의 곁을 떠난 아이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니, 똑같았다.

 

  계속 마나를 뿜어대던 손에 힘이 풀리면서, 카를을 속박하던 사슬과 자물쇠가 다시 마나로 변화하여 진희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옭아매던 것이 없어지자, 보란듯이 스트레칭을 하며 카를이 뻐근한 몸을 풀어나갔다.

 

  "뭘 놀라고 그래. 다 합의된 거잖아?"

  "합의? 무슨 합의. 오늘 죽여도 된다는 합의?"

  "여기쪽 선생님이 먼저 얠 나한테 넘겼다고. 난 정정당당한데."

  "... ... ."

 

  윤진아.

 

  사실 유무와는 상관 없이 빼도박도 못 하게 그 인간이다. 진희는 그렇게 굳혔다. 카를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으나, 그 당시 상황에서 카를과 윤진아가 대화를 나누는 걸 봤으니까. 그것도 너무 다정하게.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간 진희를 보며 카를은 얼른 달아나야 겠다는 생각만 했다. 어떤 후폭풍이 있을 지는 모르는 거니까. 너무 힘이 잔뜩 들어가 핏줄이 선 게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아무튼 난 간다? 진희 너도 데려가고 싶지만...... 내가 사서 죽을 필요는 없으니까. 나중에 또 보자."

 

  카를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진희는 오로지 눈 앞에 있는 소년에게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아이가 내 눈 앞에 있다. 옆에서 깐족거리면서 가끔 싸우기도 했던 밝고 명랑한 아이. 그랬던 아이가 지금은......

 

  차갑게 식은 고철 덩어리가 되어 자신의 눈 앞에 있다.

 

  "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심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진짜 쓰레기도 저런 쓰레기가 다 있구나.

 

  휫바람을 불며 놓친 수레를 끌고 제 앞에 있는 아이까지 데려가려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지만, 정지해버린 뇌가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까?]

 

  꺼져.

 

  [어머. 냉정해라.]

 

  무기력해졌다. 어차피 진화 선배도 있고, 99명의 랭커들이 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결이 될 것이라 믿었다.

 

  몰라. 그냥 냅둘래.

 

  "연진희!"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기 무섭게, 진희의 귓가에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빛 시야 오른쪽으로 보이는 흑발에 허탈한 웃음만을 흘렸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을 챙겨주러 오는 이는 분명이 있는데 왜 미련을 버리지 못 할까.

 

  "여기서 뭐 해. 상황이 어떤데......!"

 

  달아나려는 카를을 보며 혀를 찬 문희가 다시 한 번 카를을 속박했다. 오늘만 몇 번 넘어지는 지, 카를이 땅이 꺼져라 푹푹 한숨을 내쉬는 동안 자신이 할 일은 진희의 정신을 깨우는 것이었다.

 

  "...... 나 없어도 할 수 있잖아. 고작 저거 하나 처리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며 카를 쪽으로 눈을 흘겼다. 묘하게 기분이 상한 카를이 쌍욕을 퍼부어도 그저 개미가 옹알대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지금 진희의 상태가 꽤나 마음에 드는 카를과는 다르게 문희는 답답했다. 미간을 꿈틀거리던 문희가 나지막이 말을 남겼다.

 

  "너 백천우 때문에 그러는 거 알아, 그런데 적어도 상황 파악 정도는 해야 될 거 아냐. 뭐가 우선인 지 정도는 판가름할 수 있잖아."

 

  대답 대신 연두빛 정수리를 보인 진희가 아랫 입술을 꾹 깨물었다. 푹푹 내뱉어지는 한숨 소리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추가 된 느낌이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 뭐라 할 말도 없고, 저라도 저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었다. 오직 묵묵부답 만이 답인 것만 같았다.

 

  "이미 죽은 애야. 정신 차려."

 

  이미 죽은 애......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농락하듯 앞에 나타난 그는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녹빛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연진희. 네 감정이 중요해, 생명이 중요해."

  "...... 생명이지."

  "그럼 지금 잠깐만이라도 잊어줘. 저기 있는 건 그냥 고철 덩어리고 외형만 백천우인 걸로...... 뭐, 사실이지만."

 

  말은 쉽지.

 

  잊는다는 것은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잊었다고 생각을 하더라도 어느 순간 비슷한 상황과 잠시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더욱 선명한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을 테니. 가장 중요한 것은 막연하게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문희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굳이 잊으라는 표현을 썼다.

 

  생명이 우선이란 걸 알면서도 쉬이 발을 떼지 못 하는 진희도, 살짝 허술한 문희의 사슬에서 나가보려 노력하는 카를도 문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대로는 안 된다. 머리를 긁으며 어떻게든 진희를 설득시킬 거리를 찾다 옳거니, 하고 눈을 번뜩 떴다.

 

  "그리고 그, 뭐냐. 백천우 랭킹 3위였던 거 기억 안 나? 걔 죽고 나서 장민화가 3위 된 거잖아. 카를이 가져간 이상, 저 안에 백천우 마나는 그대로 있어. 아무리 진화 선배랑 다른 랭커들이 있다 해도 수만 대를 상대하긴 버거워. 통째로 여길 날려버릴 수는 있지만 그러면 애들까지 다 죽으니까."

 

  한 자 틀린 것 없이 모두 맞았다. 매번 수 만, 수십 만의 미즈르를 끌고 와 이곳을 헤집어 놓기에 랭커들이 모두 나서야 했다. 반은 학생을 보호하고 반은 잡아서 가루조차 안 남도록 부시고.

 

  카를이 쓸데없이 머리는 잘 굴러가서 학생들이 드나드는 포털을 매번 조작하고 들어와 이곳에서 나갈 수 없도록 잠궈뒀다.

 

  "...... 몇 명 정도 있어? 애들."

  "대충 칠 천."

 

  칠천 명이란 숫자에 카를은 눈을 번뜩였고 진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칠 천 명을 지키며 미즈르까지 상대하라는 건 마나의 유무와는 상관 없이 매우 골치아프고 힘들었다. 힘보단 정신적으로 계속 시달려야 하는 상황이 올 것임이 뻔했기에 의욕이 더욱 더 사라지려 했지만, 진희가 이리 생각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문희가, 방음이 되는 벽을 쳐놓고 진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들어. 지금 너를 제외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넌 공격에 특화되어 있어서 방어에 약하다지만, 진화 선배는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는 건 알지? 너무 마나가 많아서 다들 못 느끼는 것 뿐이고. 너도 마찬가지로 방어도 가능하고."

 

  방음벽을 쳐놓은 걸 인지하지 못한 진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저기 우스꽝스럽게 기어다니는 놈이 들을까, 안절부절하면서 말이다.

 

  "진화 선배랑 얘기 했어. 다른 랭커들이 애들 다 찾아내서 한 곳으로 모이게 했고, 아마 지금쯤이면 선배가 방어벽 치고 있을 거야. 내가 가서 확인해보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너한테 알려줄게. 그때는......"

 

  말을 뜸들이다 잠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땅 전체를 날려줘."

 

  진희에게 있어 버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당황한 기력이 온몸에서 묻어났다. 지금 얘가 진심으로 얘기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진지해 보이는 표정에 빠른 수긍의 표시를 했다.

 

  "알았어."

 

  부탁할게. 뒷말을 붙인 문희가 연두빛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네이비빛 마나에 온몸이 휘감긴 채로 사라졌다. 물론 카를을 속박하던 사슬까지 모두 사라졌고 미즈르들을 묶어 뒀던 마나도 사라졌다.

 

  "하하......"

 

  저려오는 몸을 스트레칭이라도 해보며 푸는 카를이 헛웃음을 지었다. 문희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분명 풀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렇기에 굳이 백천우의 마나를 빌리지 않았다. 마나를 빌리는 즉시 진희에게 적발 되겠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핏빛 눈동자가 차가운 눈빛으로 진희를 응시했다. 이대로 떠날 수도 있지만 온몸에서 살기 섞인 마나를 뿜어대고 있는 저 괴물에게서 도망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이리저리 눈치를 봐가는 카를을 보던 진희의 오른쪽 시야에 네이비빛 마나의 결정이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카를."

 

  쿠구구......

  오늘 중에서 가장 크게 미소 짓는 순간일 것이다. 양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한곳에 집중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마나의 양에 폭풍이라도 불듯 계속해서 거센 바람이 주위로 뭉쳤다.

 

  점점 커져가자 카를의 몸이 붕 위로 떴고 화살 같은 바람을 이기지 못해 부서진 벽에 그대로 몸이 던져졌다.

 

  "컥......!"

 

  부딪힌 것도 부딪힌 거지만, 무엇보다도 땅에 닿지 않는 발이 계속해서 허우적거렸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꼴이 아닌가. 진희가 그 장면을 보며 깔깔 웃어보였다.

 

  쾅!

 

  벽과 나무가 땅에서 뽑히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모든 건물이 다 들리니 이제서야 흔들림 없는 에메랄드빛 방어벽이 보였다. 그것에 조금은 걱정했던 마음을 쓸어내리며 마나를 모으는 것에만 집중했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마나를 모아보는 것이.

 

  상위 랭커 10명을 합친 정도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거대한 구의 모양을 띤 마나를 지탱하며 더 힘을 쏟았기에 부들거리는 팔을 진정시키고 벽에 파묻힌 카를의 모습을 시야에 담았을 때.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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