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Plume
작가 : 별하랑
작품등록일 : 2019.9.10

(오후 11시~00시)"신이 되어야만 해." "싫습니다." 단호히 거절한 소녀를 보며 높은 신은 비웃는다. 어차피 소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네가 나고. 내가 너야.]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살려주세요." 울부짖는 아이.

"너에게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매혹적인 신은 소녀에게 속닥거렸다.

"자, 어때? 결정은......

네 몫이야."

 
[서장] 2회
작성일 : 19-09-12 00:35     조회 : 268     추천 : 0     분량 : 9178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눈 부시게 화창한 광망의 조각들이 창문 틈으로 낑낑 들어와 연두빛 머리카락 위에 풀썩 앉았다. 사라락 부드럽게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눈에 들어간 모양인지 연두빛 눈썹이 날개짓하는 나비 마냥 파르르 떨렸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며 살포시 감겨 있는 눈두덩이에 똑똑 노크를 한 광망의 조각이, 편안한듯 소녀의 얼굴 위에 풀썩 누웠다.

 

  "으음......"

 

  짧은 비음을 내뱉으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다 빵빵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밤새 잠을 설친 것을 증명하듯 생기 없는 녹빛 눈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담았다.

 

  어슴푸레한 빛을 띠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벌컥 열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새벽에 가랑비라도 온 건 지, 나뭇잎에 힘겹게 매달린 물방울이 보였다. 뿌연 하늘 대신 맑게 게인 하늘이 복잡한 머리속을 쓸고 지나갔다. 능력자 세계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울려대는 경적 소리에 좋던 기분이 날아가려 했다.

 

  일반인인 어머니와 능력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진희는 재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지금은 어머니를 따라 일반계에서 살고 있었다. 공기는 좋지 않지만 집에서 나오면 재수없이 선생들을 마주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으, 에...... 엣취!"

 

  순간 훅 들어온 서릿바람에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괜히 투덜대며 학교를 갈 준비를 하려 했지만, 녹빛 눈동자에 담긴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누우라며 유혹했다. 저 유혹은 이기기 힘들 것이다. 때마침 감기려 하는 눈이 흐릿한 침대만을 응시한다.

 

  없애버려야겠다.

  하늘처럼 맑은 푸른빛의 마나를 손바닥에 살포시 담고 침대로 거침없이 던졌다. 구름같이 푸근해 보였던 침대는 어느새 딱딱하고 차가운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잠을 이긴 것에 스스로 대견하다 여기며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에 묻은 졸음을 씻어내고, 검은 빗으로 연두빛 머리를 쓸어내렸다. 희고 불투명한 블라우스를 입고 짙은 남색빛에 금색으로 꾸민 넥타이를 멨다. 여기에서 더 입어야 되는 조끼와 마이, 치마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별 수 있겠는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는 녹빛 눈동자가 불안함에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아......"

 

  짙은 한숨만이 제 어깨를 다독인다. 걱정에서 파생된 감정은 자꾸만 고운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오늘 하루만 무단결석 해 볼까, 진지하게 고민해도 결과는 늘 같았지만 사소한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 예를 들면 학교를 태워버린다던지, 무너뜨려 버린다던지.

 

  힘겹게 아이보리색 조끼를 입으니 잘 빗어놓은 머리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여기저기 정신사납게 튀어나온 연두빛 머리카락을 보며 성질이 난 나머지 빗을 냅다 집어던져 버리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허리를 잔뜩 굽힌 채 탄식을 내뱉었다.

 

  "아, 진짜 가기 싫다."

 

  애꿎은 빗만 내던져진 와중에 결국 짙은 네이비 색의 마이를 궁시렁거리며 입었다. 어떻게든 꾸미겠다는 의지가 보이도록 곳곳에 집어 넣은 금빛 줄이 햇빛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번쩍거리기보단 얼룩덜룩해 진 것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불안함에 잠을 설쳤더니 이 마저도 깨끗해 보이는 녹빛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떠졌다. 랭킹전 당일이라 그런지 더욱 짙어진 한숨만이 소녀를 반겼다. 학교에서도 누군가의 기억에 이처럼 오점을 남길까봐 전전긍긍. 집에 와서도 나 때문에 누군가 악몽을 꿀까봐 전전긍긍.

 

  "에휴."

 

  쓸데없는 트집 잡힐 일 없이 단정한 자태를 갖추고 머리를 대충 손으로 쓸어내며 가방을 느슨하게 멨다. 방을 빠져나오며 아직 꿈 속에 있는 제 어머니를 위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다양한 음식이 차려진 긴 테이블을 거실에 놔두고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푸른빛 마나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제 주인이 자신을 버리나 싶어 찬란한 빛을 내며 식탁을 한 바퀴 빙 둘러 음식을 상하지 않게 만들고는 재빨리 진희의 손으로 돌아갔다.

 

  ***

 

  짙은 녹음으로 우거진 깊은 산 속 중앙. 목을 조여오는 갑갑한 매연 속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유독 각양각색의 꽃들이 삼삼오오 모인 그곳엔 능력자들만이 볼 수 있는 통로가 존재했다.

 

  허나 통로라기엔 애매한 것이, 포털로 들어가기 전 입구로 만든 문이 길거리에 있는 하수구 뚜껑이라는 것이다.

 

  "좀 바꾸라고 항의를 하던가 해야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쪼그리고 앉아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엥."

 

  뭐야, 이거 왜 안 열려.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당겨도 열리지 않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건 무조건 뭔가가 있다. 혹시 몰라 주변을 구석구석 뒤져보니,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진 종이가 잡초 속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출입시 지불하는 마나의 양을 더 늘리게 되었으니 평소 양의 2배를 불어넣어주십시오.>

 

  "......."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준다, 줘.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종이를 냅다 던져버렸다. 필르야티엘에선 마나가 돈이나 마찬가지다. 능력자의 정체를 아는 세계 정부는 우리에게 마나를 요구했다. 마나를 주면 그것을 큰 돈으로 바꿔주는 식으로 몇 십년 동안 그런 거래를 해 왔다. 우리에게서 받아간 마나는 아마도 군사용으로 쓰이는 듯 했지만, 일단 내 알바는 아니었다.

 

  저번에 교사들끼리 해외투어하더니 예산이 바닥난 모양이다. 짜증나지만 뭘 어쩌겠는가. 불만이면 저가 교사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심장부근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오는 작은 마나를 손바닥에 모았다. 은은한 푸른빛을 띠며 소녀의 손바닥에서 춤추던 마나들이 문으로 집어넣어졌고, 이내 보이지 않던 불투명한 크리스탈빛 자물쇠가 제 존재를 뽐냈다. 자물쇠는 점점 푸른빛으로 물들어갔고, 소녀의 발치에 쪽빛 열쇠가 떨어졌다.

 

  "...... 가지가지 한다."

 

  지금 누군가가 이 상황을 본다면 참 웃길 것이 분명했다. 어떤 학생이 하수구 뚜껑에 열쇠를 가져가서 막 비비고 있는 걸로 보일테니.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자물쇠가 점점 투명해자면서 양옆으로 천천히 흩어졌고, 문을 열기 위해 손을 가까이 가져가려던 찰나.

 

  "으악!"

 

  갑자기 하수구 뚜껑이 제멋대로 열렸다.

 

  "이야, 이젠 자동식이야?"

 

  교장이 드디어 세대를 따라가는 구만. 그렇게 뒷말을 붙이고는, 개기름 같아 보이지만 무지개빛이 불규칙하게 얽혀서 어지럽게 회전하는 곳에 제 몸을 던졌다.

 

  ***

 

  "왜 지금 왔어?"

  "아니, 마나 더 내라고 그러는 걸 어떡해."

 

  억울함을 잔뜩 표출하는 진희를 보며 온통 붉은 소녀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어보였다.

 

  "아, 근데 그거."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파스텔 빛의 하늘색 눈을 꿈뻑이던 사라가 한 마디 거들었다.

 

  "랭커들만 더 내는 거라던데. 상위권일 수록 더 많이 낸다더라."

 

  말이 끝나기 무섭에 짙은 정적이 흘렀다. 왠지 하위권 애들이 불만 하나 안 보이고 가만히 있더라. 소량은 개뿔, 2배 내라던 게 그거였구만. 계속에서 나지막이 궁시렁거리던 진희가 애꿎은 흙을 발로 툭툭 찼다. 어차피 마나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성되지만, 그 시간이 50시간 이라는 게 오점이었다.

 

  "그럼 뭐 어떡해. 맨날 순위 똑같다고 선생님들이 지겨워하던데. 순위 좀 바뀌라고 교장이 새로 바꾼 정책이야. 내라면 내야지, 뭐."

 

  사라의 말에 문희가 어딘가를 보더니 짙은 한숨을 흘렸다. 문희의 시선을 따라가 학생들이 모인 운동자를 바라보던 녹빛 눈동자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교감 선생님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응시했다.

 

  "야, 야. 교감이 본다."

 

  민화가 팔꿈치로 진희를 툭툭 치며 귀에 속삭였다. 네 명의 아이들 눈에 담긴 아주 어린 아이의 외형을 띠고 있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신이 자기 입으로 한 바로는 600년 전, 필르야티엘의 반대 세력인 미즈르와의 전쟁 때문에 성장판을 다쳐서 저렇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능력자의 평균 수명은 300세이기에 그 두 배를 살았다는 점에서 믿음이라는 게 사라졌다.

 

  붉은 눈동자와 녹빛 눈동자가 보란듯이 생기를 싹 없앤 눈으로 응시하자, 그는 오히려 입꼬리를 휘어올리며 인자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음으로 답했다.

 

  "나만 기분 더러운 거 아니지."

 

  사라가 인상을 팍 쓰며 한 말에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자신도 그렇다는 표시를 슬며시 했다. 특히 민화가 격하게 공감하며 사라와 뒷담을 시작했고, 뒷담이 불편한 진희와 문희는 잠깐 빠져서 말없이 운동장을 걷고 있을 즈음 역사 담당 교사가 나와 허공에 운동장 반 사이즈만 한 스크린을 띄웠다.

 

  "주목. 라운드 시간표 확인하고 알아서들 준비해라. 랭커들, 2라운드부터 시작이라고 작년처럼 교실로 쌩 들어가거나 이탈하는 놈들은 벌점 줄 거니까 알아서들 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희에게로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특히 연진희 조심해라."

  "왜, 왜 다들 나한테만 그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 뜨고 교사를 응시했지만, 그는 한 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피식 비웃었다.

 

  "저...... 저 못되어 먹은 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고 나머지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이미 다 아는 내용, 구태여 설명하는 교사에게 말없이 박수를 보냈다. 저 같았으면 전날에 설명서 배부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문희에게 속닥거렸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선생의 설명이 끝났다.

 

  "그럼 1라운드 시작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개 불에 콩 구워먹듯 운동장이 거대한 스타디움으로 변했다. 천장이 뻥 뚫려있고 전체적으로 푸른 빛을 띠는 스타디움엔 랭커석만이 은하수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개미처럼 우글거리던 학생들은 자동적으로 자리에 착석되었고, 랭커들도 순위대로 배치된 후에야 심사를 시작하려는 교사가 자신의 손 위로 무언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교사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다름 아닌 수백 개의 종이가 들은 박스였다. 경품 뽑기하는 마냥 뽑는 순서는 몇 년을 봐도 어이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진희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종이를 뽑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에밀리 대...... 연진화...?"

  "예?"

 

  순식간에 학생들 전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들 당황한 채로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민화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친. 지금 1라운드잖아. 뭐야, 랭커 2라운드 부턴데."

 

  모두가 술렁거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도 그럴만한 게, 연진화는 필르야티엘 랭킹 1위. 2위인 진희와의 마나 차이가 30위에서 50위 랭커들의 마나를 양일 정도로 명실상부한 1위다. 거기에다 가끔가다 벅찬 전쟁을 할 때 에메랄드빛 결정들을 뿜어내는 기이한 능력을 쓰기도 했다. 마나를 이용한 마법은 아니었고, 오직 연진화만이 쓸 수 있는 능력이었다.

 

  머리카락부터 눈동자까지 에메랄드빛으로 뒤덮인 연진화였지만 마나 색이 독보적인 금색인 것도 위엄을 돋보이게 했다. 보통 능력자가 일정 마나양을 넘으면 본래 지닌 색에서 변질이 되어 다른 색으로 변하는데, 그 케이스는 현재 진화와 진희뿐이다.

 

  진희는 그나마 녹빛과 가까운 푸른빛이라지만, 위압감을 풍기는 금빛으로 수좌에 오른 진화는 그 누구도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심사의 공정을 위해 모든 랭커들은 2라운드부터 진출인데 갑자기 이런 괴물이 떡하니 나왔으니 당황스러운 건 당연했다. 그 종이를 뽑은 선생마저 당황해서 그 종이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는 버벅거리며 입을 열었다.

 

  "...... 잠깐 오차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뽑을 거니까 그 입들 좀 다물어라, 제발. 시끄러워 죽겠네."

 

  미간을 팍 구긴 채로 종이 박스 안에 팔을 집어넣고 제대로 된 종이를 빼서 심사를 진행했다.

 

  그럼 그렇지. 모두가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특히 상대방으로 지목된 에밀리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 마음 백 번 이해한다는 듯이 다 산 어르신처럼 허허 웃는 진희를 빤히 쳐다보던 문희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왜, 왜."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괜히 말을 덧붙여 중얼거려봤지만 문희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

 

  "정확히 10분 뒤에 2라운드 시작한다."

  "끄으으응......"

 

  1라운드 경기를 애써 보지 않으려고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로 고개를 푹 떨구고 있으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쑤셔오는 근육들에 인상을 찡그린 진희가 코를 두 손가락으로 잡아 입으로만 숨을 미약하게 쉬었다. 진동하는 피비릿내가 비위를 건들다 못해 뒤집어 버린 것이 마음에 퍽 들지가 않았다.

 

  1라운드에선 서로 지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간 큰 놈 아니면 웬만해선 다들 안 보려고 한다. 저번 달에 학교에서 보여준 잔인한 영화는 아동 영화 수준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진희와 사라는 잔인한 것에 아주 약했고, 문희는 덤덤했다. 허나 문제는......

 

  녹빛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가며 팝콘을 아그작아그작 씹고 있는 아이를 응시했다.

 

  "아우, 재밌네. 좀만 더 싸우지. 팝콘도 더 사왔구만."

 

  장민화다.

 

  언제 팝콘을 챙겨왔는 지는 모르겠고, 민화는 잔인한 걸 매우 좋아하는 아이였다. 길거리에서 싸움이 나면 몰래 숨어서 관람할 스타일. 실제로도 심할 정도의 싸움이 났었는데 말리긴 커녕 구경하다가 문희에게 된통 혼난 적이 있었다.

 

  "뭘 싸워, 싸우긴."

  "우리 진희는 간이 작아도 너무 작아서 문제야. 재밌잖아."

  "그래, 그래. 재밌는 거 너나 즐기세요."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는 민화를 뒤로 하고 박스에 손을 넣은 채 휘적이는 선생님에게 시선을 뒀다.

 

  "헐."

 

  처음부터 하위권 대 랭커의 대결인 듯했다. 저 선생님이 씨익 웃을 때면 늘 그랬다. 긴장한듯 침을 꿀꺽 삼키는 진희를 바라보는 심해같이 짙은 네이비색 눈동자엔 걱정이 가득 실려있었다. 진희는 그걸 몰랐지만 계속해서 응시하던 문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연정. 연진화."

  "미친."

 

  '뭔 처음부터 진화 선배야. 아까부터 왜 저래.'

 

  빠르게 자리에 착석한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 격하게 환호하는 민화의 소리는 한 귀로 흘려듣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대결이 빨리 끝나는 건 뻔했지만, 그 뒷정리가 오래 걸리는 게 진화 선배의 시간이었다.

 

  "준비......."

  "저, 선생님, 저 기권......!"

  "시작!"

 

  콰앙!

  시작하자마자 울리는 굉음에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기권하겠다는 학생의 외침은 무시당한 듯 싶었다.

 

  격양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레 눈을 떠서 주변을 흘겨 봤을 때는 이미 몽글몽글한 안개에 이곳이 뒤덮인 후였다.

 

  광망도 못 들어오게 막은 안개가 눈 감을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불어오는 바람에 빠르게 걷혔다. 녹빛 눈동자에 담긴 건 사방에 튄 핏자국과 시체가 모두 짖이겨진 채로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욱......!"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래서 최대한 빨리 빠지려 한 건데. 눈동자가 한없이 흔들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허리를 숙이고 최대한 빨리 나가려 했건만.

 

  "아, 재미없어. 무슨 눈 깜짝하면 끝나냐."

  "연진화하고 했나? 가차없네."

  "피부 뜯어보면 고철 덩어리 있는 거 아니냐? 여기서 13년 있으면서 쟤 표정 변화를 본 적이 없음."

  "알고 보니 미즈르고."

  "그럼 꿀잼인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구역질을 더 돋구었다. 서둘러 나가는 틈에도 귀로 들어오는 화살같은 말들은 추가 되어 내 발목에 주렁주렁 달렸다. 이젠 듣기 싫어. 그리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그냥 징계 받을 생각으로 텔레포트하려던 찰나.

 

  [왜? 쟤네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죽여줄까?]

 

  뭐야.

  자신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분명이 제 목소리였다.

  무언가에 세게 맞은 듯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조곤조곤 속삭이는 듯한 억양으로 머리를 뒤죽박죽 어지럽히는 존재에 그저 의문만을 품은 진희가 앵두같은 입술을 벌렸다.

 

  "누구...... 야...... ."

 

  [나? 나는 너지.]

 

  그게 무슨. 다리에 힘이 풀린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한 손으로 겨우 지탱한 채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릿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어슴푸레한 빛을 띠는 태양조차 저에게 빛을 줄 마음이 없는 듯 구름 사이로 쏙 숨어버린다.

 

  이대로면 정말 정신을 잃을 지도 모른다. 살면서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내장을 헤집어 놓고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연진희, 일어나."

 

  흑발에 밑부분은 네이비색으로 물든 민화가 제 목에 진희의 팔을 둘렀다. 순간적으로 아, 살았다, 하는 느낌에 뒤죽박죽 꼬인 머릿속이 풀려가는 것만 같았다.

 

  "문...... 희야."

  "조금만 더 버텨봐."

 

  문희의 한 마디에 다리에만 힘을 모아 걸었다. 이제 그 이상한 목소리도 제 머릿속을 헤집지 않았다. 단말마의 고통도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헉...... 헉...... ."

 

  숨이 가빠지면 가빠질 수록 문희가 저를 부축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는 게 느껴졌다. 마나로 편하게 갈 수 있긴 하나, 마나를 쓰면 교사들에게 적발되어 징계를 받기에 쉴 기회조차 사라지게 된다. 스타디움 안에서 경기하는 자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아무리 소란스럽고 분주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눈에 뛸 텐데 한 걸음에 도와주러 온 것에 고마움을 느껴 최대한 힘을 끌어올리려 어떻게든 정신줄을 잡고 있었다.

 

  "연진희. 그거 무시해."

  "어......?"

  "그건 너고. 너가 아니니까. 걔의 목소리가 들리면 지금처럼 몸이 망가질 거야."

  "그게 무슨......"

 

  분명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울리던 목소리였다.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걸 힐끔 쳐다보던 사라도 목소리를 못 들은 눈치였고, 제 머릿속에선 엄청 크게 울리던 소린데 그 누구도 듣지 못 했다는 건 분명 저에게만 들렸다는 거였다.

 

  "알려고 하진 마."

 

  네 생각쯤은 훤히 보인다는 듯 문희가 무심한 대답을 툭 내뱉고는 나무 그늘 아래까지 데려갔다.

 

  "저 선생들 능력으로 여기까지 마나 탐지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얼른 치료해."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회복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에 아예 힘이 들어가지도 않아서 마나를 끌어올리지도 못 했다.

 

  "...... 힘 빼. 내가 할게."

 

  네이비빛 마나가 어느틈에 흘러나온 건지, 이미 진희의 몸을 빙빙 감고 있었다. 흐릿해진 시야가 점점 돌아오자 형형한 빛을 띠는 문희의 심해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 고마워."

  "빨리 일어나기나 해. 임시방편만 해놨으니까 나머진 너가 알아서 하고."

  "응, 응."

  "아, 그리고."

 

  문희가 뒤를 돌다말고 멈춰선다. 무슨 일일까. 한결 편해진 상태로 마나를 끌어올려 망가진 몸 속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문희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연두빛 머리를 바라보더니 마지못해 입을 뗐다.

 

  "또 목소리 들리면 말 해. 지금이야 진화 선배 순서여서 시간 벌었지만 나중엔 너가 말 안 하면 몰라서 빨리 못 도와주니까."

  "어......? 알았어."

 

  뭘까. 문희는 가끔가다 꼭 이렇게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흘렸다.

 

  그늘 속에서도 진희를 바라보는 형형한 빛을 뿜어낸 눈동자에서 기묘한 감정이 흐르는 듯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공지 임시적 요일 변경 2019 / 10 / 4 391 0 -
24 2부- 2회 2019 / 10 / 21 265 0 4886   
23 2부- 1회 2019 / 10 / 18 242 0 4385   
22 1부- 14회 2019 / 10 / 16 229 0 5397   
21 1부- 13회 2019 / 10 / 14 231 0 5658   
20 1부- 12회 2019 / 10 / 5 208 0 4990   
19 1부- 11회 2019 / 10 / 2 224 0 7241   
18 1부- 10회 2019 / 10 / 1 221 0 7569   
17 1부-9회 2019 / 9 / 30 227 0 6857   
16 1부- 8회 2019 / 9 / 28 214 0 6773   
15 1부- 7회 2019 / 9 / 27 225 0 7439   
14 1부- 6회 2019 / 9 / 24 235 0 7383   
13 1부- 5회 2019 / 9 / 23 244 0 7521   
12 1부- 4회 2019 / 9 / 21 232 0 7314   
11 1부- 3회 2019 / 9 / 20 243 0 7837   
10 1부- 2회 2019 / 9 / 18 231 0 9713   
9 1부- 1회 2019 / 9 / 17 244 0 9012   
8 [서장] 7회 2019 / 9 / 17 218 0 9529   
7 [서장] 6회 2019 / 9 / 16 225 0 7482   
6 [서장] 5회 2019 / 9 / 15 238 0 8138   
5 [서장] 4회 2019 / 9 / 14 230 0 6505   
4 [서장] 3회 2019 / 9 / 13 235 0 10377   
3 [서장] 2회 2019 / 9 / 12 269 0 9178   
2 [서장] 1회 2019 / 9 / 11 250 0 9868   
1 prologue 2019 / 9 / 10 379 0 360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