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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Plume
작가 : 별하랑
작품등록일 : 2019.9.10

(오후 11시~00시)"신이 되어야만 해." "싫습니다." 단호히 거절한 소녀를 보며 높은 신은 비웃는다. 어차피 소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네가 나고. 내가 너야.]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살려주세요." 울부짖는 아이.

"너에게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매혹적인 신은 소녀에게 속닥거렸다.

"자, 어때? 결정은......

네 몫이야."

 
[서장] 1회
작성일 : 19-09-11 00:30     조회 : 250     추천 : 0     분량 : 9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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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약 천 년 전. 몸에 신비한 빛을 품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모두 기이한 힘을 발휘하며 일반인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날고 긴다고 하는 학자들이 계속 연구해도 그 유래는 알 수 없었다. 당시 나라엔 신이 개입했다는 소문만이 퍼져나갔다.

 

  제국력 187년. 이들은 가진 능력을 권력 삼아 이리저리 휘두르고 다녔다. 모든 제국의 왕과 고위 권력자들은 모두 능력자들이었으며, 비능력자들은 아무리 핏줄이 위대해도 높아봤자 평민이었다. 능력자들끼린 언어가 달라도 소통할 수 있었기에 나라 간의 경제적 교류에도 이바지했다.

  이처럼 언어적, 신체적 능력과 특이한 능력들의 근원이 되는 이 빛을 '마나' 라 불렀다. 이 마나를 준 것은 '렌나'라는 신이라고 떠받들어야 한다며 가장 거대한 제국의 황제의 공문이 내려오기도 하였다.

 

  249년. 주변을 정찰하던 능력자 무리가 한 숲속에서 친근한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능력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가 타 능력자의 마나까지 끌어모아 그곳을 뚫어 포털을 만들었고, 실제로 어딘가와 연결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전달한다. 그 능력자의 말은 들어맞았다. 다른 세계와의 연결에 성공하며, 그 소식을 황제에게 전한 고위 능력자들은 명을 받고 능력자 회의를 소집한다. 4개월의 긴 투쟁 끝에 능력자들은 모두 그곳으로 이동하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곳은 거대한 마을 하나가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능력자들은 이곳을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다, 마침 계속해서 태어나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이들을 가르칠 학교를 세우기로 하는데, 그 이름을 필르야티엘이라 짓고 그 근처에 능력자들이 살 거주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250년. 성공적으로 지어진 학교는 제법 순조롭게 돌아갔다. 수업료로 매년 마나의 일부를 걷었고, 강한 능력자를 구별해내기 위해 랭킹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중에서 강한 아이들에겐 다양한 혜택을 주며, 언젠가 또 찾을 수도 있는 새로운 세계를 본인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쪽으로 유인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서로 불투명한 잔을 부딪칠 때 그들은 몰랐다.

 

  이 세계가 괴패될 것이라는 걸.

 

  ***

 

  "경례."

 

  구태여 하는 인사는 정말 따분했다. 그냥 수업만 하면 될 것이지, 뭐하러 인사를 매번 할까. 그것도 그럴 가치가 없는 인간들에게. 홀로 고개를 숙이지 않은 소녀가 자신의 연둣빛 머리를 만지작 거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연진희!"

 

  한 이름이 외쳐지고, 이내 모든 시선이 연둣빛 소녀에게 쏠린다. 이름뿐인 교사는 진희에게 삿대질하며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만 인사 다시 해."

 

  아, 귀찮게.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은 주변 공기를 가라앉히는 데 꽤 효과적이었다. 대충 고개만 까딱하며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넸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흰 가루가 풀풀 날리는 칠판 지우개가 진희의 책상 위로 날아왔다.

 

  "다시 해. 똑바로."

  "안녕하세요."

 

  여기서 안 하고 버티면 분명 인사만 몇십분 시킬 것이 분명했다. 진희가 한발 물러서고 나서야 그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좋댄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리에 풀썩 앉은 진희가 돌아선 선생의 뒷모습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자신을 귀찮게 한 교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슨 철판으로 자신에게 이러는지도,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 왜 저러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수업 시작할 거니까 조는 애들 있으면 짝이 알아서 깨우고. 너무 졸려서 미치겠다, 하면 뒤로 나가서 서 있어. 우리 저번 시간에 진도 어디까지 나갔니?"

  "여섯 번째 줄이요."

 

  진도는 개뿔.

  진희의 손바닥 안에서 힘없이 구겨진 빛바랜 종이 한 장이 신경을 쿡쿡 찔렀다. 달랑 한 장밖에 없는 이건 유일한 교과서였다. 필엘르라 칭하는 기초과목인데 이 한 장으로 십여 년을 반복하며 수업을 진행해 왔다. 똑같은 내용을 톱니바퀴처럼 되풀이 해왔고, 그것이 질릴 대로 질린 학생들은 이 시간만 되면 자거나 딴짓을 하며 야속한 시간만을 허비했다.

 

  그래서인지 여기 있는 선생을 제외한 나머지 필엘르 담당 선생님들은 다섯 번 정도 되풀이한 반에 아예 들어가지 않거나, 영화를 틀어주고 나가거나 자습이라는 두 단어만 칠판에 남기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 수업을 진행 중인 윤진아는 보다시피 아주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이 학교에서 일하게 된 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어 하나 변함없이 가르쳐왔다.

 

  여기까진 모두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일이 전까진 진희 역시 긍정적인 시선으로 봐 왔었다.

 

  "늘 말했듯이 마나를 다룰 줄 모르면 가진 의미가 없어."

 

  앵두 같은 입술이 쩍 벌어지며 하품이 흘러나왔다. 이 수업을 왜 들으라는 건지. 투덜거리다가도 늘 그랬듯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탁 트인 하늘이 진희의 공허한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고, 이렇게 지루할 때면 볕이 잘 드는 창가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쪽빛 풍경 사이로 저도 끼워달라며 두둥실 떠오른 몽실몽실한 구름도, 바람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도 격양된 감정을 잠잠하게 가라앉혔다. 학교 운동장 구석진 곳, 녹음이 피어난 곳에서 단단한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는 부서지는 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 보였는데, 정말 힘들 때마다 꼭 쳐다보는 것 중 하나였다.

 

  이곳은 사계절이 존재하지 않아 늘 초여름 날씨를 유지해왔다.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선선한 바람이 불고 오목조목 작은 새싹들이 고개를 빼꼼 내미는 계절이 진희가 학교에 다니는 하나의 계기로 사로잡혔다. 방학이 일 년에 딱 한 번, 그것도 이 주밖에 없는 것에 큰 불만을 느꼈지만 나름 만족하며 지내왔다.

 

  솨아아......

  때마침 불어온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마냥 눈썹이 무거웠다. 간만에 기분 좀 좋게 자나, 싶었지만 하필 시야에 빛을 받아 더 도드라져 보이는 구겨진 종이가 다시 한번 흙탕물을 뿌린다. 가볍게 혀를 내두르며 푹 엎드리려는데 흐릿하게 가려진 시야로 익숙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연진희 뒤로 나가."

  "예."

 

  터덜터덜 일어나서 뒤로 나가려던 찰나, 윤진아 선생이 진희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항의하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거야. 네가 아직도 어린애인 것 같아? 아직도 네 친구 죽은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귀에 그대로 박힌 말에 무덤덤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신을 누가 가위로 툭 자른듯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며 선생을 응시했고, 분노로 뒤덮여 버린 감정에 푸른 마나가 온몸에서 물결치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짙푸른 침묵에 모두가 흡- 하며 숨을 죽였고, 녹빛 눈동자에 담긴 선생님 역시 겁에 질려 갈색 머리만을 정신없이 만지작거렸다.

 

  정신이 복잡한 파도에 파문일듯 흐트러진다. 도대체 왜 저 인간은 뻔한 결말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심기를 건들까.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결국 늘 끝에 남는 건 속상함의 한 방울이었다.

 

  "말 가려서 하세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잘난 목에 흉터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진희가 감정을 다스렸다. 그런 생각은 위험하다며 저를 다독였고 다시는 그 말을 잘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도록 딱딱한 어조로 경고했으나, 윤진아에겐 먹히지 않았다.

 

  "뭐......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협박 섞인 부탁을 남겼으니 저 입이 닫힐 줄 알았건만. 닫히긴 커녕 말을 더듬으며 격양된 어조로 반박하려 했다. 흔들리는 동공만 봐도 확실하게 반박할 거리가 없나 본데, 앵두같은 입술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게다가 애초에 수, 수업을 안 들은 건 너야. 랭킹 2위라고 지금 막 나가는 것 같은데, 거만하게 살다가 델 거야. 기초가 탄탄한게 얼마나 중요한 지나 알고 있-"

  "여섯 살에 숙지했습니다."

 

  잠깐의 정적과 함께 반에 옹기종기 모여서 보던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예전에 진도 다 뺐는데 뭘 계속 기초, 기초, 기초......

  이정도면 상대해 줄 만큼 해 줬다, 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자마자 대놓고 들으라는 듯한 욕설이 귀에 내려앉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신경써 줄 가치가 없었다.

 

  "후......"

 

  절로 한탄이 나온다. 잘 잊고 있었던 장면들이 다시 머리속에서 재생 됐다. 돌아가지 못 하게 고정시킨 테이프가 계속해서 감긴다. 정신을 스치는 아릿한 고통해 잠시 윽,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차라리 몸이 아픈 거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견고한 사슬이 온몸을 묶어 수렁에 집어 넣은 느낌은 언제나 저를 절벽으로 몰아세웠다.

 

  잊자. 잊어야 돼. 자신을 계속 세뇌시켜왔다. 이겨낼 자신 따윈 없었다. 그저 도망치기만 할 뿐, 그 아이를 대신해 복수하겠다는 신념 뿐이었다.

 

  한 번의 용서와 고백.

 

  "하하......."

 

  마른 웃음만 새어나왔다. 시들어버린 그 아이의 영혼에 집착하는 자신의 한심함보단 선생들을 향한 분노가 더 커져만 갔다. 밝고 명랑했던 그의 삶에 오점을 남겼고, 그만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을 죽였다. 소녀는 그들에 대한 원망을 참을 수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녹빛 눈동자에 분노가 고였다. 그때 내가 좀 더 빨리 갔었더라면. 그래, 이것은 내 잘못인가. 녹빛 눈동자에서 끝없는 진심이 비쳤다. 고인 분노가 붉어진 뺨을 타고 고요히 흘러내려가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매로 대충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 그만 생각하자, 하고 볕이 잘 드는 푸근한 창가를 바라보아도 후회와 원망은 계속해서 가냘픈 발목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 더 빨리 살렸더라면.

 

  지금쯤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겠지.

 

  "......."

 

  그만하자. 그만 생각하자.

  생각할 수록 더욱 참기 힘들어지는 눈물에 고개를 푹 떨궜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행복한 상상.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시스템도, 지긋지긋한 전쟁이 반복되지도 않는, 너무나도 평화로운 곳.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새들이 아름답게 지저귀는 곳. 서로 대련하는 선에서만 끝내고 제자와 선생이 친한 곳. 그런 곳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민가고 싶었다. 과연 그런 세상이 있을까.

 

  "거기 나가서도 딴짓이야?"

 

  씁쓸한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들자 울그락불그락 구겨진 얼굴이 멀리서 보였다. 그래, 다른 짓한 잘못은 인정한다. 허나.

 

  녹빛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교실 안에 있는 아이들 중 세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자거나 낙서를 하거나, 제 친구들과 속닥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 시작하기 전부터 자던 애들도 허다했다. 자신에게만 노골적인 적의를 들어내는 이유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계속된 적의는 참고 넘어가기 힘들었다.

 

  사실 윤진아는 선생님이 되기 전에 필르야티엘 학교 재학생이었기에 진희는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소량의 마나를 지닌 돌연변이. 그게 그녀의 별명이었다. 랭킹 시스템에선 늘 마지막이었고, 일반인들과 비슷한 체력과 근력에다 적은 마나조차 활용하는 법을 몰랐다. 때문에 툭하면 따돌림 받기 일수였다.

 

  마나가 적으니 공부라도 하려고 했었지만 성적이 오른 것이 티도 안 났다. 소수점 자리만 바뀌었기에 선생들도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 했다. 성적도, 랭킹도 밑바닥이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다들 인간계에서 그림쪽으로 일하겠지,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5년 전, 졸업하고 난 후 모두의 예상을 깨부쉈다. 갑자기 선생이란 명찰을 달고 온 것이다. 물론 그 명찰은 그저 껍데기였다.

 

  현재 25세이지만, 아직 윤진아의 시간은 15세에 머물러 있다. 아직까지도 선생들의 뒷담화가 어딜 가도 들려오니까. 15세부터 변하지 않은 태도에 모두가 손가락질 했다.

 

  '진아 선생님 말이에요...... 어제도 신고 들어왔더라고요.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자기한테 인사 안 했다고 새벽까지 그 학생 남겼다네요.'

  '하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아야죠. 그만 둔 교사가 한 둘이어야지. 그냥 빈 자리 채우는 주제에, 마나도 없으면 좀 쥐죽은 듯이 살던가.'

 

  윤진아의 유일한 실수는 딱 하나였다. 자신이 받은 설욕에 대한 분노를 애꿎은 학생들에게 표출한 것. 그 행동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더욱 망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어쨌든, 너 수업 끝나자마자 따라와."

 

  진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굳이 입으로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갈 일 없으니까.

 

  ***

 

  "야, 너 또 사고쳤다며."

  "사고는 무슨 사고야. 쓸데없는 얘기할 거면 가라, 장민화."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이야깃거리를 늘어놓으려하자 진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귀찮았다. 옆에서 종달새 마냥 쫑알쫑알 떠드는 것이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을 더 꼬았다. 비틀리려는 입매를 바로잡고 한숨을 푹 내쉴 때서야 온통 붉은 민화가 주머니에서 뭔갈 뒤적거렸다.

 

  "뭐, 그 인간 원래 그러니까. 아, 맞다. 게시판에 붙인 거 봤어?"

  "웬 게시판. 뭔데."

  "내가 너 그럴 줄 알고 복사해왔다. 가져가."

 

  새하얀 종이를 받아든 진희가 한숨을 거둬드렸다. 이럴 때 만큼은 학생회 친구를 둔 것이 참 편했다. 대수롭지 않게 종이를 읽어보려고 할 때, 민화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랭킹전 내일모레로 앞당겨졌어."

  "...... 뭐?"

 

  종이를 훑어보는 눈동자가 다급히 굴러갔다. 흰 종이 위에서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검은 글씨를 한 자, 한 자 곱씹어보는 순간 작은 손에 힘이 실렸다.

 

  "교무실 가자."

  "야, 야. 가서 무슨 꼴을 당하려고."

 

  민화가 손을 정신없이 내저었다. 그녀의 말대로 갔다가 욕만 먹고 돌아올 것이 뻔했지만, 가뜩이나 마음 준비가 필요한 날인데 갑자기 일정을 앞당긴 것에 불만이 많았다. 마침 아까도 기분 더럽혀졌겠다. 가서 진상짓이나 하고 올까. 진희의 입가에 살기가 담긴 미소가 퍼져나갔다.

 

  일 년에 한 번 여는 랭킹전. 이 날은 순위를 정하기 위해 서로 피 터지도록 싸워야만 하는 날이었다. 게다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설렁설렁하거나 기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총 7라운드로 나눠서 보는 심사 중 1라운드 탈락자는 20점의 벌점과 10일의 출석정지가 내려진다. 매 해마다 약 삼백 명의 학생들이 출석정지를 당하는 셈이다.

 

  벌점 이 백점 도달 시 모든 마나 강탈과 함께 퇴학 조취가 내려지고, 이 세계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렇게되면 포털을 오고 갈 때마다 마나를 소량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지니 다신 못 오게 되는 것이다. 일반계 사람들은 특출난 재능이 있지 않는 한 공부로만 먹고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들었다. 피 눈물 흘려가며 노력해도 결국 재력이 높은 자가 가장 꼭대기 위에 있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퍼져있었다. 필르야티엘은 그 세계 사람들이 배우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배우는 데, 그곳에서 적응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능력자들의 존재를 그들은 알고 있다. 일반계 사람들 중에서 고위 권력자들은 다 알고 있는 일급비밀이었다. 매년 쫓겨난 학생들을 데려다 이상한 곳으로 데려간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쫓겨난 학생들의 생사여부는 모두 파악이 불가능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인 단말마의 고통을 받고 죽어서 다시 살아났는데 그 결과가 퇴학이라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또 누군가를 죽인 이들은 그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했다. 필르야티엘에는 마나를 소량 지불하면 능력자들만 살릴 수 있는 특이한 기계장치가 있었는데, 그걸로 죽은 아이들에게 또다른 고통을 선물해주고 있었다. 그 기계는 또 랭킹전에서 사용한 마나로 입은 상처만을 치유했기에, 그냥 죽은 아이들은 살리지 못 했다.

 

  때문에 매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을 견뎌와야만 했고, 잔혹한 시체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라운드 진행 중에는 상대방의 목숨을 뺏을 수 있어, 평소 원한이 있는 애들이 원하는 상대를 만나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잔인하게 물어뜯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칠 정도의 고통을 내뱉는 아이들은 보다보면 속이 뒤집어졌다. 진희가 그 고통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사람의 정신을 무너뜨릴 정도의 고통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랭킹 100위 안에 드는 학생들은 랭커, 라 칭하는데 랭커들은 결국 마지막 라운드까지 살아남고,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마나의 양만 측정해서 랭킹을 정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죽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허나 지금까지 진희가 죽인 학생의 수는 약 이백명. 매번 죄책감에 덮인 채로 그 고통을 혼자서 버텨왔다. 랭킹전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정신적인 관리를 해왔는데 갑자기 일정이 당겨졌으니 화날 수밖에.

 

  차라리 죽었으면. 나도 죽어서 그 고통을 알았으면 조금은 덜할까.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형형하게 빛났던 녹빛 눈동자가 거무죽죽하게 죽어갔다. 매일 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그동안 저가 죽인 망자들이 기어서 따라오면서 죽여버리겠다, 귓가에 속삭이는 꿈을 주기적으로 계속 꾸고 있던 터라 더욱 고통스러웠다.

 

  "연진희?"

  "아, 어? 왜?"

 

  민화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람 말 하는데 다른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아, 맞다. 다음 주에 신입생들 오잖아. 입학식하고 나서 일주일 있다가 수학여행도 간대."

  "미쳤네."

  "미쳤지."

 

  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네. 누구는 죽고 나서 2주 뒤일텐데 퍽이나 좋겠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는 자기를 죽인 자와 함께 밥을 먹고 같이 잘 수도 있고, 같이 게임을 해야 했다. 진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필르야티엘 교사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번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있기에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릴 때 정말 가까운 사이였던 사촌동생마저 세상을 떠났다. 온몸으로 사랑받음을 뿜어내며 밝게 웃던 그 아이는 랭킹전 트라우마로 제 몸을 옥상에서 던졌다. 아끼던 동생이 죽고 정말 가까웠던 친구가 죽었다. 그 이후로 그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으려 힘을 쓰던 진희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에 세 명의 친구들이 맴돌고 있었다.

 

  한 명은 민화, 한 명은 사라 하일, 한 명은 연문희. 정말 특이했다. 분명 저는 그들에게 단 한 번의 대화시도도 한 적이 없었다. 계속 주변에서 쫑알쫑알 떠들던 민화와 사라도, 말 없이 챙겨주던 문희도 곧 있으면 알아서 멀어지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까 사라랑 항의하러 교무실 갔었어."

  "바로 쫓겨났고?"

  "응."

 

  민화가 해맑게 웃으며 진희의 어깨 부근에 제 팔을 둘렀다.

 

  "맨날 사고만 치는 우리 진희 보살펴야 되는데."

  "뭐래."

 

  귀찮아.

  팔을 떼어내며 밀어내려 하자, 민화가 음흉한 미소를 보이며 한 손으로 입을 살포시 가렸다.

 

  "우리 진희는 이번에도 2위인가?"

  "200위 해도 좋으니까 그냥 안 했으면 좋겠는데."

 

  건성으로 툭 던진 말에 민화가 다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발끈하면서 따지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허탈한 것 같은 대답을 들으니 모든 의욕이 빠져나가는 느낌인 것만 같았다.

 

  "에휴...... 됐다. 조금 이따가 애들 데리고 올게."

  "어엉."

 

  말 끝나기 무섭게 책상에 풀썩 엎드리고는 녹빛 눈동자를 가리며 대충 손을 휘저었다. 이제 좀 잘 수 있겠지. 때마침 점심 먹을 시간이라 낮잠 자고 일어나기 딱 좋았다. 다들 밥 먹으러 갔기에 제 멋대로 온도를 조절할 수도 있었고, 원하는 향기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꼬르륵 거리며 울리는 배를 무시하고 얼른 잘 생각에만 들떠 있었다.

 

  랭커들에게 주어지는 최고급 요리들도 마다했고, 진희는 계속해서 잠 자는 것을 선택해왔다. 순위 밖 아이들은 랭커들이 남긴 요리를 먹을 수 있었는데, 그 아이들에게 조금의 음식이라도 먹이기 위해 계속 굶어왔다. 다들 그녀의 의도는 모르고 있었지만,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고통에 사로잡힌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웃길 바라며 한 행동이기에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

 

  "내일모레면 피바람이 불겠구나."

 

  화려한 장신구들로 사치를 뽐내는 여인이 광망 아래에서 번쩍이는 금발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리니아, 얘가 마지막 후보야. 누구로 할래?"

  "......제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금발의 여인은 제 앞에 띄워진 녹빛 소녀를 보며 입꼬리를 매혹적으로 휘어올린다. 찰랑이는 와인잔을 집어든 채로 미지근한 미소를 지은 여인은 술에 취하기 전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그럼 저 아이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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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부- 2회 2019 / 10 / 21 267 0 4886   
23 2부- 1회 2019 / 10 / 18 243 0 4385   
22 1부- 14회 2019 / 10 / 16 230 0 5397   
21 1부- 13회 2019 / 10 / 14 233 0 5658   
20 1부- 12회 2019 / 10 / 5 211 0 4990   
19 1부- 11회 2019 / 10 / 2 224 0 7241   
18 1부- 10회 2019 / 10 / 1 222 0 7569   
17 1부-9회 2019 / 9 / 30 228 0 6857   
16 1부- 8회 2019 / 9 / 28 215 0 6773   
15 1부- 7회 2019 / 9 / 27 226 0 7439   
14 1부- 6회 2019 / 9 / 24 237 0 7383   
13 1부- 5회 2019 / 9 / 23 245 0 7521   
12 1부- 4회 2019 / 9 / 21 235 0 7314   
11 1부- 3회 2019 / 9 / 20 245 0 7837   
10 1부- 2회 2019 / 9 / 18 234 0 9713   
9 1부- 1회 2019 / 9 / 17 244 0 9012   
8 [서장] 7회 2019 / 9 / 17 218 0 9529   
7 [서장] 6회 2019 / 9 / 16 225 0 7482   
6 [서장] 5회 2019 / 9 / 15 239 0 8138   
5 [서장] 4회 2019 / 9 / 14 230 0 6505   
4 [서장] 3회 2019 / 9 / 13 237 0 10377   
3 [서장] 2회 2019 / 9 / 12 270 0 9178   
2 [서장] 1회 2019 / 9 / 11 251 0 9868   
1 prologue 2019 / 9 / 10 382 0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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