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보치나 백작과 강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너도밤 공작이 나서서 귀족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너도밤 공작의 한마디는 너무나 위력이 세서 팽팽하던 찬성과 반대파의 긴장감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곧장 황제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우리 대 쉐이른 국은 동방과의 교역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우리 쉐이른과 동방의 번영을 가져다줄 첫 시작일 것이며 앞으로 서로 가까이하여 더욱 발전하기 위함이다.
짐은 10년 만에 다시 문을 연 동방에게 감사와 친교의 뜻으로 트라에 잠자고 있던 동방의 유물 전부를 고국에 돌려주고자 한다.
또한, 동방과 우호의 뜻을 맺었으니 더는 동방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하노라.”
동방인 노예를 금하라는 단어에서 부유한 사람들의 불만이 쇄도했다.
그나마 궁정 담당관에게 동방인 노예의 수와 사들인 금액을 제시하면 배상해주겠다고 해, 조금은 잠잠해졌다.
사람들은 그 많은 노예를 배상할 돈이 황실에 남아있는지 의문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건 노예로 살던 이들의 행보였다.
하루아침에 자유민이 된 동방인 노예들은 얼떨떨해하면서 동시에 사회로 내던져지는 걸 두려워했다.
반응은 세대에 따라 갈렸다.
동방의 기억이 있는 자들은 돌아갈 수 있다며 좋아했다.
반면, 태어날 때부터 서방에서 자란 이들은 당장 먹고살 방도가 없어 주인이 나가라 할까 전전긍긍했다.
그중엔 지금의 삶이 좋으니 내치지 말아 달라고 주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날, 그라그포드의 총장 로드만 토둑이 급히 황제를 알현하길 청했다.
황제의 앞에 납작 엎드린 총장은 부들부들 떨며 황제에게 고했다.
“안 됩니다! 절대 돌려주어선 안 됩니다! 저들이 무얼 알고 유물들을 다루겠습니까!
그들은 대 쉐이른의 사람보다 미개해 돌려준들 가치조차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관리도 못할 게 분명합니다!
폐하! 이것은 미래 폐하께서 점령할 땅의 역사를 미리 보전하고자 함이니, 부디 저 야만적인 동방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총장이 침을 튀겨가며 간절하게 읍소했지만, 황제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오히려 황제는 총장에게 밖에 있을 동방인 사절단에게 들린다며 그를 나무랐다.
“토둑 자작. 이미 짐의 칙령이 내려졌소.
말을 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짐이 한 말을 철회하라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
그리고 저들도 충분히 그 가치를 알고 있으니 가져가서 구워 먹든 삶아 먹든 그건 자기들 일이 아니겠는가.
그간 관리를 한다 수고한 점은 인정해서 보상해 줄 테니 더는 깊이 생각 말고 돌아가 학생들의 학업을 돌보는 데 애써주시오.”
황제가 짐짓 묵직한 어투로 총장에게 말했다.
황제의 거절에 총장이 재빨리 변론을 내보이려 했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황제는 손을 들어 총장의 말을 막았다.
그럼에도 총장은 하려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폐하! 그곳엔 제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어째서 이방인들의 말은 잘 들어주시면서 폐하의 사람이 하는 말은 이리 무시한단 말씀입니까!”
참았던 감정이 함께 튀어 나와버렸다.
매정하다 원망스럽다는 감정이 총장의 늙은 입술을 뛰어넘어 황제의 귀퉁이를 때렸다.
금박 장식된 안대가 황제의 얼굴 근육을 따라 꿈틀거렸다.
“그래서 보상을 해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네의 인생도 중하지만 앞으로 제국민의 인생도 중하다!
자작의 어떻게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제국 전체를 희생하게 하는가!”
황제가 소리쳤다.
총장이 원망스럽게 황제를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논리는 좋았으나 그 소가 자신이라는 것이 너무나 끔찍했다.
총장이 이를 갈았다. 갈만한 이도 별로 없었으나 갈았다.
뿌득뿌득 갈았다.
그리고 그 갈림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총장의 눈을 번뜩이게 만들었다.
“폐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황제에게 힘없이 절하고 집무실을 나온 로드만 토둑 총장의 눈이 매서웠다.
집무실을 나온 총장의 걸음이 빨라졌다.
빠른 속도 때문에 과거에 다친 무릎이 쑤셨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인생을 뺏겼는데 몸뚱이가 무슨 상관이랴.
총장은 타고 온 마차를 서둘러 트라로 돌렸다.
누구는 앗아가도 좋다고 생각한 것들일지라도 순순히 내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
“떨려?”
해가 질 무렵 박물관 문을 잠그며 세이지가 물었다.
로사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내일 첫 수업이 츠티지 선생님 수업이라 덜 한 것 같아요. 다른 수업이었으면 좀 더 불편했을 수도 있는데.”
“아, 하긴 그 선생님 수업 때마다 로사 데려오라고 난리였단 소문 들었어.”
세이지가 웃으며 말하자 로사도 덩달아 웃었다.
“근데 왜 갑자기 수업에 참관할 수 있게 된 건지 알아요?”
로사가 물었다. 세이지가 잠시 생각하는 듯 입을 아래위로 움직이다 답했다.
“어제 아버지께 들었는데 동방과 교역을 하게 됐다고 하더라고.
근데 조건이 동방인을 노예로 쓰는 걸 금지하는 거랑 또 하나 있었는데……노예 금지라는 말에 네 생각이 나서 다른 말은 잘 안 들었어.”
세이지가 모자를 덮어 제 머리카락을 가리고 있는 로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학교에선 이미 알려졌다지만 길거리에서 그냥 다니기엔 아직 시선이 좋지 않았기에 로사는 후드로 머리를 덮어쓰고 있었다.
세이지의 말에 놀란 로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제 생각이요?”
“어? 어, 여기 있는 동방인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될 테니까 로사도 사람들 신경 덜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했어. 아니야?”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답을 하며 로사가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자신을 신경 써서 생각해 준 말이 기분이 좋으면서 부끄러웠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상당히 이상한 감정에 로사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세이지가 의아하게 돌아봤다.
“어디 아파?”
“아, 아뇨!”
세이지가 로사 가까이 얼굴을 가져오며 묻자 놀란 로사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로사가 물러간 거리를 쳐다보던 세이지가 가볍게 로사에게 다가갔다.
로사가 멀어진 만큼 가까이.
거리가 좁아지자 당황한 로사가 또 뒤로 물러나려 하자 세이지가 살짝 로사의 손가락을 잡았다.
아주 살짝.
가벼운 손길에 로사가 세이지를 올려다봤다.
동그란 얼굴이 마치 햄스터 같아 세이지가 웃음을 머금었다. 세이지는 로사의 손을 그러모아 꼭 잡았다.
“로사,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세이지가 과거 로사가 자신을 피하던 때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로사 역시 그때를 떠올리며 더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사뭇 가라앉은 분위기에 세이지가 볼을 긁적이며 개구지게 말했다.
“아무래도 로사가 나랑 같은 마음인가 보다.”
“네?”
로사가 황당하단 듯 세이지를 올려다봤다.
“그게 아니면 같은 극의 자석처럼 자꾸 거리를 두려고 할 리가 없어.”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환기하려 노력하는 세이지를 보며 로사가 피식 웃었다.
“재미없어요.”
로사의 핀잔에 세이지가 함께 웃었다.
오늘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고 말하려는 데, 로사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로사가 먼저 밥을 먹자고 한 건 처음이라 세이지의 입가가 격하게 씰룩였다.
게다가 하나 더. 세이지는 식당으로 가는 내내 로사가 마주 잡은 손을 빼지 않는 게 너무 좋았다.
아마 로사는 세이지가 속으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단 건 모르리라.
반면, 로사는 조금 전 세이지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로사가 나랑 같은 마음인가보다.”
세이지는 장난으로 한 말이겠지만, 로사는 은근 그 말이 신경 쓰였다.
같은 마음이라면 로사가 느끼는 이 이상한 감정을 세이지도 느끼는 건가?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이기에?
로사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잘 모르겠다 였다.
다만 깨달은 게 있다면 이 느낌이 좋았기에, 세이지 역시 로사 있을 때 기분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었으면 했다.
“어?”
알고 있는 좋은 가게가 있다며 세이지가 로사에게 메뉴 설명을 할 때였다.
가게를 가려면 광장을 지나야 했는데, 평소보다 사람이 배로 많았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지?”
세이지가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로사가 반사적으로 세이지의 말에 답하는 데 뒤에서 누가 외치는 고함이 들렸다.
“비키시오! 비켜!”
비키라는 소리와 동시에 수십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트라의 치안대장과 그가 이끄는 치안대가 무리를 지어 광장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길을 터주기 위해 사람들이 한 덩어리처럼 움직였다.
우르르 쏠리는 사람들의 흐름에 세이지는 옆에 있던 로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쓸려 가면 안 되잖아.”
세이지의 말에 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안대가 오지 않는 곳으로 가자고 세이지가 로사를 이끌었다.
사람으로 빽빽하게 찬 이 거리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우와!”
치안대가 광장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탄성이 들리면서 또 한 번 인파가 출렁였다.
“오늘 무슨 날이래?”
“퍼레이드라도 하는 거야?”
사람들은 자주 볼 수 없는 치안대 전체의 행렬에 신기한 듯 더 몰렸다.
세이지와 로사처럼 인파 속에서 빠져나가려는 사람과 구경하려고 막 몰려드는 사람들이 서로 엉켰다.
그리고 치안대장 가는 길을 확보하느라 밀려나는 사람들로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그것도 순식간에.
“아!”
아주 찰나였다.
로사는 꼭 잡고 있던 세이지의 손을 놓쳐버렸다.
인파를 헤치며 로사를 이끌던 세이지.
사람들 틈새로 겨우겨우 움직이던 로사.
그 사이에 대 여섯명의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자 마주 잡은 손이 속절없이 뚝 끊겨버렸다.
로사는 급하게 뒤집어쓰고 있던 모자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제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이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