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복수를 위하여 (4)
딱 한 군데.
건너편의 기둥 뒤만이 햇살이 내리쬐는 것처럼 밝았다.
쿵쿵!
드레스 안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마른 입술 사이로 증오와 서글픔이 뒤섞인 이름이 튀어나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사야….”
그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혼자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의 머리는 단정하게 올렸지만, 왼쪽 눈을 가릴 수 있게 반은 내렸으며, 왜소한 어깨는 구부정했다.
그 어떤 누구도 말을 걸지 않고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지만 마치 야수에게 쫓기듯 금안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저 볼품없는 모습을 사랑했었다.
이 넓은 왕궁 안에서 숨 쉴 구멍 하나 없는 그를 알기도 전부터 첫눈에 반하여 사랑에 빠졌었다.
지난 기억이 머릿속과 가슴을 회오리치며 벨리타를 괴롭혔다.
잔뜩 찌푸린 미간을 겨우 펴 낸 벨리타는 숨을 크게 쉬고서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왕세자 저하.”
“누, 누구세요?”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온 사방에 고요하던 이사야에겐 몹시도 큰 인사였다.
화들짝 놀란 이사야가 몸을 튕기며 벨리타에게 물었다.
경계와 두려움이 반쯤 적절하게 섞인 질문이 익숙하였다.
그때도 이러지 않았던가.
아밀리아의 소개에 온몸이 나무 조각처럼 뻣뻣해져선 저 큰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었다.
자꾸만 겹쳐지는 기억을 어둠으로 가리며 벨리타는 텅 빈 미소로 답했다.
“벨리타라고 해요.”
“벨리타…?”
낯선 이름에 이사야의 고운 이마가 구겨졌다.
제아무리 따돌림을 당하는 왕세자라지만 프렌시아에 있는 귀족들의 이름쯤이야 웬만하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척 보아도 벨리타라 소개하는 눈앞의 여자는 자신과 얼추 나이가 같아 보였다.
왕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사야는 동기 중 벨리타란 이름을 가진 여자를 떠올리려 애를 썼다.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긴 이사야의 앞으로 희고 기다란 손이 다가왔다.
“우리 같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매혹적이지만 상스럽지 않게.
당당하지만 과하지 않게.
언젠가 이사야에게 왜 나를 보고 사랑에 빠졌느냐 물었던 때가 있었다.
그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저 운명이라 말했었다.
물론 그 말을 믿은 건 그가 벨리타를 배신하기 전이었지만.
그것이 이사야의 말처럼 운명이든, 아니면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해서 원하는 걸 얻기 위함이든 벨리타는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이사야의 시야에 드는 것과 그가 다시 자신에게 거짓으로든 진심으로든 사랑을 느끼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어때요?”
“아… 그게….”
단정한 머리 때문에 드러난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밖으로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금안이 요리조리 움직이며 곤란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 누구보다 이사야의 행동 하나하나의 뜻을 알고 있는 벨리타가 비웃음을 삼켰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깊은 관계를 만드는 건 오늘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부터였지만,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사야를 보자 조금 더 욕심이 생겼다.
“셔츠가… 우욱!”
“괜찮아요?”
한쪽만 올라간 셔츠 깃을 내려 주려던 벨리타는 메슥거리는 속에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숙였다.
깜짝 놀란 이사야가 서둘러 그녀의 얼굴을 보려 함께 등을 굽혔지만 벨리타는 그를 밀어내고서 등을 돌렸다.
시뻘겋게 변해 버린 볼을 다급히 손등으로 가렸다.
분노와 배신감은 구역질도 참게 해 줄 줄 알았건만,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사야의 몸이, 아니 그의 옷깃이 손에 닿으려 한 것만으로도 이토록 속이 뒤틀리고 토악질이 나올 줄이야.
성급했던 자신을 나무라며 벨리타는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죄송해요. 방금 마신 샴페인이 좀 독했던 모양이에요.”
“이런! 저, 많이 괴로우시면 테라스에 가시는 게…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걱정이… 걱정이 되어서요.”
허둥지둥하며 왕실 전용 테라스가 있는 곳을 가리켰던 이사야가 손을 마구 휘저었다.
보통 살롱이나 무도회장에서 남녀가 테라스로 함께 간다는 건, 은밀함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혹 자신에게 오해를 살까 봐 눈물까지 고인 이사야를, 벨리타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쳐다보았다.
“친절한 분이시군요.”
“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다음에 만나면 그때 나눠요.”
더 이상 이사야와 함께,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저 순진한 얼굴에 속았다.
백옥같이 흰 마음에 진심을 다 주었다.
그리고 끝내 돌아온 것은 거짓과 배신, 죽음이었다.
당장에라도 가늘고 흰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음에 벨리타는 등을 돌리기로 했다.
“저! 어느 가문인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안녕을 고하는 그녀를 붙잡지 못한 채 묻는 말은 소극적이었지만 이사야로서는 온갖 노력을 다함이었다.
겁을 먹은 아기 사슴과 같은 이사야를 힐끗 뒤돌아본 벨리타가 그의 금안을 뚫어지라 보았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 안에 담긴 금안이 두 번 깜빡이고 말라붙은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또 만날 거예요. 우리는. 반드시.”
그래. 또 만날 것이다.
그 끝은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할 거고, 고통에 찬 울음이 가득하겠지.
목 위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 벨리타는 최대한 이사야에게서 멀어져 눈에 보이는 발코니 중 하나에 들어갔다.
쾅!
좁은 문을 아무렇게나 던져 닫아 버린 벨리타는 서둘러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 몸을 틀었다.
“어? 이런! 괜찮아요? 레이디?”
두 사람이 들어가면 가득 차는 공간인 발코니엔 벨리타 혼자가 아니었다.
앞을 본 겨를이 없었던 터라 사람이 있는지 몰랐던 벨리타는 부딪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찌푸린 얼굴을 들었다.
까만 밤하늘과 같은 칠흑 같은 반곱슬은 이마를 반쯤 덮었고, 그 아래 기다란 속눈썹으로 가려진 흑안은 그가 가진 홑꺼풀과 잘 어울렸다.
“제가 잘 보았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자. 여기.”
“…아뇨. 제 실수인 걸요.”
떨어뜨린 손바닥만 한 클러치를 주워 준 남자에게 벨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숨이 턱 막힐 만큼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묘했다.
특히나 속이 비치지 않는 까만 눈동자가 그러했다.
이사야의 생각 때문에 폐허가 되어 버린 머리 안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오웬입니다. 레이디께선?”
오웬.
벨리타의 두 눈이 불꽃을 내며 튀었다.
‘오웬 네빌.’
언젠가 들었던 이름이 남자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 * *
오웬 네빌.
벨리타는 그의 이름을 들었던 날들을 기억했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이미 그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였었다.
혀가 잘리고 두 팔이 걸레짝이 되고 두 발목의 인대가 끊어져 살린다 해도 인간답게 살긴 글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오웬은 단두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뒤였다.
왕도 팔빈의 외각에 위치한 영지도 없는 아주 작은 남작가.
흔한 기사단조차 없어서 귀족이란 이름 외에는 없는 가문이 그의 배경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희망을 걸어 빚까지 낸 아비는 오웬을 유학길에 올렸었다.
결국 그 유학이 그의 눈을 다른 곳으로 트이게 하였지만.
“여기 있어도 돼요.”
싱긋 웃는 얼굴이 어둠에 가려 반쯤 보였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그의 검은 곱슬머리가 길게 찢어진 눈가를 가렸다 보이기를 반복했다.
의욕이 넘친 혁명군의 젊은 수장이었던 그는 경험 부족과 재정난이 겹치며 결국 혁명을 반란으로 종지부 찍어야만 했었다.
“다른 곳은 아마 이미 다들 차지했을 테니까요.”
자세히 살피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자리를 뜨려는 벨리타를, 오웬은 붙잡았다.
끈을 만들기 위해서 발악하는 자들을 피해 달아나듯 발코니를 찾은 그녀도 자신과 같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착각에 빠져 생각지 못한 배려를 받은 벨리타는 거절하지 않았다.
구석에 있던 작은 의자를 끌어다 중앙에 둔 오웬이 벨리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느 가문이세요?”
“그게… 잘 모르실 거예요. 워낙 작은 곳이라….”
대충 둘러댄 벨리타는 그제야 얼굴을 가리려 숙였다.
훗날 혁명군에게 접근해야 하는 그녀로서는 얼굴을 알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다.
다행히도 컴컴한 밤이 그녀의 얼굴의 반을 덮어 주고 있었다.
“뭐, 나도 그런걸요.”
씨익 웃는 입가가 호탕했다.
더는 물을 생각이 없는지 의자에 앉은 벨리타를 두고서 오웬이 발코니의 난간에 몸을 올렸다.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오웬을 벨리타는 연신 힐끗거렸다.
젊다고 들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젊은 그가 궁금했다.
유학을 떠난 북쪽에서 그는 과연 무엇을 보고 듣고 왔을까?
어떤 것이 그로 하여금 목숨까지 내놓게 한 것일까?
목적을 위해서라기보단 사람 대 사람으로서 드는 호기심이 녹색 눈동자에 어렸다.
“다들 즐거워 보이나요? 아니.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걸까요?”
“…….”
“난 여기가 답답하거든요. 저 밖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른 이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오웬이 가리킨 곳은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는 왕궁 밖이었다.
왕 데미안이 병마로 누운 지 십 년.
그 사이 프렌시아의 시민들은 나날이 죽어 가고 있었다.
날로 높아지는 세금과 말도 안 되는 법 테두리 안에서 호의호식을 하는 건 가진 자들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위에 군림하고 있는 건, 아밀리아 왕비였다.
“우리 프렌시아의 앞도 이 밤과 같네요.”
허탈함이 묻어나는 말끝에 벨리타의 동공이 커졌다.
‘이 자다!’
처음부터 오웬을 염두에 두고 모든 계획을 짰지만, 오늘에서야 벨리타는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오기도, 어린 생각 끝에 닿은 호승지심도 아닌 진심.
오웬이라면 자신이 주는 기회를 잘 이용하여 끝내 복수를 완성해 주리라.
타는 듯한 눈빛이 고개를 반쯤 돌린 얼굴을 쫓았다.
“아. 이런… 별 시답잖은 말을 했군요. 이건 잊어버려요.”
“…….”
“어쨌든 이 시대에 귀족으로 사는 건 큰 장점이니까.”
벨리타의 눈빛을 두려움으로 여긴 오웬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회장을 나왔다 한들, 어찌 보면 반역에 가까운 말에 수긍할 까닭은 전혀 없었다.
더 이상 왕궁 안에 남고 싶지 않아진 오웬은 미련을 두지 않고 난간 위로 번쩍 두 발을 올렸다.
“그만 들어가요. 아직 밤바람이 차네요.”
“…저기!”
훌쩍 발코니 아래로 뛰어내리는 오웬을 따라 벨리타는 몸을 일으켰다.
이곳이 몇 층이었지?
2층이긴 하지만 꽤 높이가 있는 왕궁의 구조를 떠올리자 벨리타의 얼굴엔 경악이 물들었다.
풀썩!
그녀의 걱정과 다르게 1층의 정원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오웬은 다급한 부름을 못 들은 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