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동의 장기호 변호사 사무실로 영추와 종구가 들어서자 변호사를 대동한 심민보와 천상조가 먼저 와 기다리다가 정중히 인사를 해 온다.
"먼저 가해자 측을 대표해서 심민보 씨가 사과를 드리겠답니다."
"소생이 어떤 놈의 꼬임에 넘어가 부끄러운 짓을 한 것부터 사과드립니다. 땅에 떨어져버린 명예를 회복해 볼라고 무리를 끌고 간 것 또한 수치스러운 짓이었습니다. 염치없지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사과 받아 드리지요. 도를 넘었지만 형씨들한테 큰 유감은 없습니다."
종구가 내미는 손을 잡으며 민보가 활짝 웃는다.
"고맙소. 허형은 실력도 대단하지만 도량도 크요."
말없이 눈만 굴리고 있던 상조가 벌떡 일어나 종구의 손을 잡는다.
"이 천상조, 오늘 이후 허 형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보다 손 위인 것 같은데요."
"아무렴 어떤교? 접 때 내가 한 약속 기억하고 있능교?"
"아~그거요? 기억하지만 설마하고 해버린 약속으로 압니다."
"그 무슨 말씀인교. 일구이언은 이부지자라 캤오."
"살다 보면 어려운 일도 생기는 법인데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시오. 이 심민보도 우군이 되어 드리겠오."
싱글벙글 하고 있던 영추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속에서 입은 뗀다.
"박 전무 부자가 관여한 증거는 없지만 우리한테는 두 가지 소득이 있었어. 그 하나는 네가 주먹계의 강자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네 손에 지렛대가 쥐어졌다는 거야. 앞 길에 놓인 큰 바위를 치워버릴 지렛대지. 그것으로 힘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말이고, 박 전무는 그 걸 견디지 못해 스스로 악수를 연발하게 되겠지."
"그 악수라는 기이 절 제거하려는 수순으로 시작되지 않을까 예?"
"잘 아는군. 박 전무에겐 넌 이미 표적이야."
"좀 전에 심민보가 한 가지 충고를 했심더. 박기태 부자를 조심하라고 예. 그 충고가 사장님 말씀과 일치해서 새삼 경각심이 듭니더."
"두렵나?"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예."
"그러니까 너도 독불장군으로 있지 말고 세력을 만들어 봐."
한참을 생각하고 있던 종구가,
"심민보와 천상조를 우군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더."
"그게 될까?"
"보답할 기회를 달라고 했으니 잘 하모 가능할 것도 같습니더."
"그래. 다가 올 큰 파도를 대비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만만의 준비를 하자고. 오늘 밤에 한 잔 해야지?"
어둑한 밤, 영추가 종구의 방문을 가만히 노크한다. 전등을 끄고 속옷 차림으로 TV 를 보고 있던 종구가 후다닥 일어나 방문을 연다.
"식탁으로 가자고. 아줌마한테 부탁해서 안주를 만들어 놨어. 가현이 방에 불도 꺼졌고."
"저는 아직 회복중인데 예."
"박기태와의 악연을 회고하는데 술이 빠질 수는 없지. 입가심 정도로만 마시자고."
와인 한 잔씩을 따라 놓고 영추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18년전 어느 겨울에 그가 손목시계, 라디오, 카메라 등 중고품 너댓 점을 가지고 내 전당포로 돈 빌리러 왔더군. 큰 키에 버버리 코트를 입었는데 첫인상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지금도 눈에 선해. 처갓집에 맡겨놓은 처자식을 데려오기 위해 방을 얻어야 되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전무님한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뜻밖입니더."
"마침 점심때라서 그를 끌고 내 단골 식당으로 갔지. 그는 거리낌 없이 이제 막 교도소를 나왔노라 털어놓더만. 처가에서는 사위대접은 커녕 사람대접도 못 받는 처지라 단 하루도 처가살이는 할 수 없다고 말이야."
"처가가 부산이었나 보네 예?"
"맞아. 그는 서울 태생으로 부산으로 와 소년시절을 보내고 처를 만났는데 처가쪽에서 결혼을 완강히 반대하자 둘이 서울로 도망쳐 동거생활을 했다더라고. 그 밖에도 살아 온 이야기를 대충 들었는데 감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더군. 그래서 그와 헤여질 때 지갑속의 돈을 몽땅 털어 그에게 주고 형편되면 갚으라고 했지. 그와 나의 악연은 그렇게 시작 되었네."
"전무님의 전과도 폭력쪽이것지 예?"
"폭행, 협박, 갈취 등이었지, 아무튼 그는 내 부족한 점을 보안해 줄 안성맞춤의 조력자였어. 전당포에 딸린 내 사무실에 자리를 하나 내주고 돈놀이 하다가 떼인 돈을 회수하는 일을 맡겼는데 놀랍게도 얼마 못 가 대부분을 이자까지 얹어 받아내더라고. 그 때부터 그의 조력으로 내 사채업은 구멍가게에서 슈퍼마켓급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의형제도 맺게 되었지"
"후회하게 된 것은 언제부텁니꺼?"
"회사를 만들고부터였어. 직원이라고 뽑은 애들이 죄다 그의 수족이거나 똘만이들이었으니까. 박기태가 얼마나 치밀한 인간인가를 깨달은 것도 그 때부터였는데 회사는 독단하면서도 언행은 철두철미 날 떠 받들고, 그의 가족까지 동원해 내 환심을 샀어. 지금은 그에 대한 두려움이 이미 골수에까지 미쳐 스트레스로 자리 잡은지 오래 됐어. 이제부터는 혁명과도 같은 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 싶을때 나한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바로 너야."
부상에서 회복 된 어느 날 오후, 카페 '희'에서 기다리고 있던 창수와 희상이 종구의 출현에 박수를 친다.
"형님들 와 이러십니꺼?"
"영웅 출에 박수가 없어서야 되겠어?"
"많이 다쳤다는 소문이던데 멀쩡하군."
"골로 갈 뻔했는데 무슨 말씀입니꺼."
"걔들 자수했다지?"
"어제 합의도 봤심더."
"돈 좀 받아 냈어?"
"누구 사주 받고 한 짓이 아니라서 조건 없이 합의해 줬습니더. 다친 것도 그 쪽이 더 심했고 예."
"무슨 소리야? 돈이라도 후려내서 혼줄을 내야지."
"진짜 심각한 일은 박동우가 저질은 일로 사장님과 전무님 사이가 봉합이 불가능해졌다는 점 입니더."
"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기겠군."
"제가 소용돌이 중심에 설 수도 있습니더."
"그러면 아우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농후해. 희상이 너는 박기태의 동태에 신경 좀 써야 되겠어."
"허 아우 보호 차원에서라도 박기태한테 끄나풀을 달아야 되겠는데요."
가현과 은실을 등교시키고 회사로 돌아 온 종구가 곧장 사장실로 간다. 커피타임을 갖고 있던 기태가 삐딱한 눈길로 종구를 째려본다.
"돌아오는 대로 보고하라고 했어. 길에서 또 그런 일을 당할 지 몰라서 말이야."
그 말에 기태가 벌레 씹은 얼굴이 된다.
"그만 가봐. 중요한 얘기를 하던 중이니까."
종구가 가버리자,
"하던 얘기 마저 하자고. 회사 사직하고 건강 돌보면서 여생 보내겠다는 내 말을 먼 동네 개 짓는 소리로 듣나본데 그러면 안 되지."
"말이 되는 얘기라야 듣지요. 갑자기 늙었다, 병들었다, 정리할 때다 하시니 저에 대한 역정으로 밖에 안 들립니다."
"사람들이 날 허수아비 사장이라 한다더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얼마나 형님을 받들어 왔는데 허수아비가 뭡니까? 전에 없이 날선 말씀을 남발하시니 제가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요."
"자네도 나도 가면을 벗을 때가 되지 않았나? 난 이만 가 볼테니까 오늘 내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현명한 결단을 내려주게나."
***
채소가 풍성하게 가꾸어진 남세밭에 몸베차림의 민숙이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호미로 흙을 쪼고 있다. 빠끔이 열려 있는 대문을 기척 없이 통과한 종구, 남새밭 머리에 서서 민숙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이윽고 큼큼 헛기침 소리를 낸다.
"잡초도 없는데 호미질은 와 하노?"
"옴마야! 오빠 온 줄도 몰랐네. 흙속에 공기 넣어주는 기다. 땅도 숨을 쉬야 채소가 잘 자라거든."
"니가 농고 나온 나보다 낫다."
민숙이 남새밭에서 나오며 힐난하 듯이 묻는다.
"이 번에는 와 그리 오래 걸렸노? 얼마나 걱정헀다고."
"사장님댁에 일이 마이 생겨서 올 수가 없었어. 재만이가 안 보이네?"
"시험 끝났다고 외출했다 아이가."
"시험 잘 봤다 쿠더나?"
"표정 봐서는 잘 본 것 같았어."
마루 끝에 나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간 종구, 꾸벅 절을 한다.
"어머이. 저 왔심더."
둘연이 희죽희죽 웃다가,
"빵 조오!" 하고 손을 내민다.
빵 봉지를 어머니에게 건네고는 민숙에게로 가,
"사는 데 불편한 거 없더나?"
"그런 거 없다. 이 이상 더 뭘 바랄기고. 근데 오빠 얼굴에 멍자국이 보이네. 또 싸웠나?"
"별 거 아인깨 신경 쓰지마."
"그러느라고 집에 못 온 기네 뭐. 헤엄 잘 치는 사람은 물에 빠져 죽고, 낭구 잘 모르는 사람은 낭구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속담 알재?"
"걱정이야 되겠지만 보디가드란 직업이 그런 건데 예사롭게 넘겨야제. 민숙아. 니 말이다. 지금부터 공부 시작하는 거 어떻노?"
"또 그 소리가? 옴마가 저런데 그 소리가 나오는 기이 어이 없구만."
"니는 니 인생을 살아야 해. 남새밭 가꿀 시간에 공부를 해. 검정고시를 차례차례 통과하면 대학에 갈 수도 있단 말이다. 나 이래뵈도 너 하나 대학 보낼 능력은 있어."
"오빠 능력을 몰라서가 아니야. 내 나이가 스물이 넘었어."
"야! 팔십 노인도 수능시험 치는 시대야. 구십 노인이 컴퓨터 배우고. 나는 둔재였지만 니는 우등생이었잖아. 아무튼 공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
***
퇴근 후에 저녁식사를 하고 룸싸롱으로 간 유순태와 정연민이 여급을 가운데 앉히고 술을 마신다.
"사장님이 사임한다는 얘기가 돌던데 우에 된 일인교?"
"아직 소문일 뿐이야. 정 과장은 누군한테서 들었어?"
"직원들이지 누구겠능교. 김 양이 커피 가지고 갔다가 꼰대들 이야기를 엿들은 모양이라요."
"미스 리는 자리 좀 비켜 줄래?"
"이 분들이 걸핏하면 사람을 내쫒아. 나라 팔아먹을 음모라도 꾸미나?"
"기정사실은 아니지만 사장님이 폭탄을 떨어뜨린 건 팩트야."
"청천벽력이 따로 없군. 대표이사의 사임이라니."
"그냥 사임이면 귀 쫑긋 할 것도 없제. 사임이 몰고 올 풍파가 문제라고."
"설마 회사가 난파선이 되는 것 아이것지요?"
"전무님이 뭔가를 하시것제. 싸움이 될 수도 있는데 지금은 장담할 상황이 아니거든. 이 모두가 허종구 그 새끼 때문이야."
"우리가 나서서 그 새끼를 조져버리모 안 됩니까? 그 새끼는 제 아무리 센 놈이라도 독불장군 아인교?"
"우리 중에 허종구를 꺾을 사람이 있다고 봐? 너도 소문 들었것지만 그 놈은 이미 구름을 딛고 선 존재야."
"한물 간 권투선수를 눌렀다고 과대평가 하시나 본데 부장님도, 이 정연민도 만만치는 않다고요."
"발굽 갈라진 동물은 박치기를 해봐야 아래 위를 알지."
"부장님! 꼭 부하의 기를 그리 직이놔야 시원한교? 그 말 때문에라도 허종구하고 박치기 한 번 해봐야 되것습니다요."
"그러니까 맷돼지란 별명이 붙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