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으로 접어든 어느 날 가현과 은실을 태우고 학교로 가는 중에 종구의 전화벨이 울린다.
"잠깐 전화 좀 받것심더."
"내다."
"에나가? 헐값에 판 건 아이고?"
"인자 이사할 일만 남았네. 운전중이니까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집이 팔린 거예요?"
"그렇다네 예."
"이사오면 통근할 거죠?"
"......"
"왜 대답을 안 해요?"
"안 하는 기이 아이라 몬 하는 깁니더. 사장님이 우짜라 쿨지 몰라서 예."
"아빠도 통근하라고 할 거예요. 못 할 이유가 없잖아요?"
"통화 중에 에나란 말을 쓰던데 무슨 뜻입니꺼?"
"서부경남 사투린데 진짜와 같다는 뜻입니더."
"재밌는 말이네 예."
"재밌기는 ...메주 냄새가 풀풀 나는 말인데. 그 쪽은 그 지방 사투리 좀 덜 쓰면 안 돼요? 너무 투박하고 촌스럽든데."
"야 보레! 말씨 갖고 그러는 거 실례야. 니처럼 얼라 때부터 서울 출신 가정교사 들여 표준말 배우는 사람이 흔한 줄 아나?"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끼어들지 마. 가만 보면 저 쪽 역성을 자주 들어."
"옴마야 생사람 잡네. 그 건 역성이 아이라 충고라고."
"역성이든 충고든 끼어들지 마. 기분 나쁘니까."
"내가 느그 차 타고 다니는 기이 잘못이지. 내일부터 이 차 안 타."
토라진 채 침묵하던 가현과 은실이 차를 돌려 보내고 나란히 캠퍼스로 들어간다.
"내가 말이 좀 심했어. 그만 기분 풀어."
"느그 차 안 탄다는 건 꼭 마음 상해서 그런 건 아니야. 허 기사를 구박하는 니를 보고 있으면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어 불편해."
"말도 안 돼. 너는 내 단짝 친구고, 그 인간은 고용인에 불과해."
"이참에 물어보자. 허 기사를 와 그리 미워하는 기고?"
"말했잖아. 무식한 데다 양아치 같아서 싫다고."
"그건 미운털 박혀서 하는 소리고 진짜 이유가 뭐냐고?"
"몰라, 몰라. 싫은 건 싫은 거지, 뭘 시시 콜콜 따져 묻니? 어쩜 전생에 원수였을지도 모르지."
***
회사로 돌아가는 차속에서 종구가 재만에게 전화 건다.
"내다. 좀 전에 민숙이한테 전화 왔는데 집과 논을 뭉텅거려 팔았다네."
"잘 됐네. 너로서는 앓던 이 빠진 것 만큼이나 시원하것다."
"이사문제때메 그라는데 좀 만나자."
"야이 새갸! 시험 앞둔 날 그런 일에 부려 묵어야 되것나?'
"니 말고 도와 줄 사람이 오딨노 엠마! 공부, 하루 이틀 안 한다고 시험에 붙을 놈이 떨어질 기가?"
"알았다 새갸."
종구와 재만이 버스를 내려 감회어린 눈길로 장터를 바라본다.
"오늘로 이 장터를 영영 떠나게 됐는데 기분이 어떻노?"
"시원섭섭하지 뭐. 열 살에 와서 스물일곱이 되었으면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근데 널 만난 것 말고는 추억다운 추억이 없어."
"세월이 한 참 지나야 추억이 생기지. 고딩 시절만 해도 니는 우리 고장의 자랑이었어. 외지에서 깡패들이 와서 거들먹거리다가 널 만나면 꼬리 말고 달아나곤 했은깨."
"야! 힘 자랑 하는 놈치고 잘 풀리는 놈은 드물어. 나만해도 살인전과자에 패가 망신한 놈이 되고 말았은깨."
"이야기가 와 그리 빠지노? 민숙이가 기다리것다. 빨리 가자."
***
집에 이르자 대문 앞에 나서 기다리던 민숙이 반색하고 맞는다.
"재만이 오빠도 왔네 예?"
"느그 오빠 등살에 안 오고 배기나."
"학교 댕기는 사람을 뭐하로 데리고 왔노? 짐은 거의 다 버리고 갈 긴데."
"이사할 때는 부짓갱이도 도움이 되는 기다."
"뭐시라? 나더러 부짓갱이라고? 민숙아 들었재? 느그 오빠가 이런 놈이다."
"점심은 우쨌습니꺼?"
"오다가 뭇다. 꾸물댈 시간 없은깨 이삿짐부터 꾸리자."
마루에 나 앉아 있던 둘연이 민숙과 함께 마당으로 들어서는 남자들을 보고 멀뚱거리기만 할 뿐 알아 보지는 못 한다.
종구가 어머니 옆에 걸터 앉아서,
"어머이. 저랑 부산으로 가입시더. 부산가서 큰 병원으로 모셔가 진찰받고, 의족도 달아드릴 깁니더."
"민숙아. 이 사람이 뭘 샀노?"
"우리를 부산으로 데려간다 안 쿠나."
"내는 안 간다."
"옴마는 여기가 좋은 모양이라. 사람소리, 가축 울음소리가 좋은지 장날만 되모 마루에 나앉아 꼼짝도 안 한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스무 살에 시집 와 이십 년 넘게 장터에서 국밥장사로 우리 둘을 키웠는데 와 집착이 없것노. 정신이 성치 않아도 가축전 분위기는 느끼시는 기라.
*****
식탁에 앉은 영추와 가현이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담소한다.
"허 군이 없으니 집이 썰렁하지?"
"썰렁하긴...간만에 아빠랑 둘이 식사하니까 기분 짱인데."
"넌 애가 왜 그 모양이니? 날마다 학교로 차태워 주면 고마워 할 줄도 알아야지, 앙숙같이 굴어서야 되겠어?"
"그러라고 월급 주는 거 아냐? 부산으로 이사오면 출퇴근 시킬 거지?"
"안 될 소리! 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도 모르니?"
"맹견이 두 마리나 있는데 도둑 들겠어?"
"말이 안 통하는군. 전문가들한테 개는 있으나 마나라는 걸 알아야지. 허 군은 우리를 지켜주는 성채같은 사람이니까 비위 긁는 언행은 삼가해."
"쳇! 아빠야 말로 눈이 삐었어. 내가 보기엔 헛고수던데."
*****
이사 끝내고 이튿날 아침에 사장댁으로 돌아 온 종구를 정원 파라솔 밑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던 가현이가 불러 앉힌다.
"이사 잘 했어요?"
"그럭저럭요."
"어쩌기로 했어요?"
"뭘 말입니까?"
"집에서 통근할 건지를 묻는 거예요?"
종구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묻는다.
"내가 왜 그리 싫습니까?"
"그 쪽이 싫기보다 젊은 사람과 한 집에 살기가 불편해서요."
"난 사장님한테 고용된 사람이고, 사장님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내가 싫더라도 서로 간에 예의는 지키고 삽시다. 이런 식으로 날 닥달하는 걸 사장님이 아시면 뭐라 하실지...."
"어머나! 지금 날 무시하는 거예요?"
종구가 일어서며,
"천만에요. 사람을 개무시하는 쪽은 가현씹니다."
"거기 서 봐요. 갑자기 말씨가 달라졌는데 어찌된 일이예요?"
"서울 말씨를 신경써서 하려고 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어머나! 표준말 잘 하면서 왜 여태 촌티나는 사투리를 썼어요?"
"말씨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 아닙니까? 촌놈다운 내 말씨를 그리 싫어하시니 가현 씨한테는 서울말씨 쓰도록 노력하지요."
"그러는 게 그 쪽한테도 좋아요. 수준 있어 보이잖아요."
집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앉아 TV 를 보던 영추가 손을 번쩍 들어보인다.
"가족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하든가?"
"좋아서 우짤 줄을 모릅니더."
"아빠. 나 저녁에 영주동 갈 거야."
"거길 꼭 가야겠니?"
"오늘이 숙부님 생신인 거 알잖아. 아빠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꼬박꼬박 잔치에 갔으면서."
"그 집엔 발 끊어. 애비 부탁이고 명령이야."
"요즘들어 아빠가 그 집 가족 대하는 게 눈에 띄게 냉냉해졌던데 이유가 뭐야? 숙부하고 싸웠어?"
"애비가 그 집과 거리를 두라고 하면 그럴만한 일이 있구나 하고 받아들여."
"뭔지 모르지만 간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내 입학식 때 온 가족이 왔던 거 잊었어?"
"내가 널 어찌 이겨. 그대신 이 번이 마지막이야. 명심해."
"아니, 이유를 알기 전에는."
해질녁에 가현이 선물꾸러기 하나 들고 거실로 내려온다. 거실 소파에 앉았던 영추가 못 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나 지금 영주동 가는 거야."
"못 말릴 놈이군! 허 기사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놀다 올 거면 차를 집 근처에 대기 시켰다가 타고 오도록 하고. 하나뿐인 자식이 돼지 뒷발톱 같이 엇나가기만 하니 원..."
영추의 부름에 방에서 나오는 종구에게 가현이 묻는다.
"영주동이 어딘지 알아요?"
"큰 길은 압니다."
"일단 가요."
가현을 태우고 묵묵히 운전하던 종구가 침묵을 깬다.
"동우학생이 요즘은 대신동에 안 오던데 나 때문입니까?"
"말 시키지 말아요. 기분 더러우니까."
"가는 데가 동우학생 집이라서 물어 본 겁니다."
"말 시키지 말라고 했잖아요."
산허리의 박기태 집 앞에서 내린 가현이 쌀쌀한 목소리로 지시한다.
"이 근처에서 기다려요. 좀 오래 걸릴거니까 그리 알아요.
박기태 집에서 조금 내려 와 길가에 차 세운 종구, 의자를 눕히고 눈을 감는다. 설핏 잠이 들어 있을 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을 느끼고 번쩍 눈을 뜬다. 밖으로 나가 보니 차에 발길질하고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한다.
"남의 차를 왜 차는 거요?"
"빈 찬줄 알았더니 안에 사람이 있었네. 이봐. 여기가 주차장이야?"
"그런 소리 하는 형 씨들은 뭐요?"
"남의 집 앞에 차 대놓고 도로 큰소리 치네."
"여기가 당신 집 앞이라고? 그렇다 한들 말로 할 것이지 왜 차에 발길질을 하냐고?'
"차를 뺄 것이지 무슨 잔말이야. 우리랑 해보자는 거야?"
다른 일행이 발길질에 가담하자 종구가 청년들을 밀어버린다.
"어쭈구리! 우릴 밀쳤어."
"간띠가 부은 놈이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 동네 깡패들인가 본데 차에 흠집만 내 봐."
"이 새끼 봐라. 지금 으름장 놓는 거야?"
"그래 흠집냈다, 우짤래?"
종구가 한 청년을 몸통 밀기로 쓰러뜨리면서 격투가 시작된다. 순식간에 땅에 눕고 관절이 꺾여버린 세 사람이 종구의 실력을 알아보고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너희들의 목적이 뭔지를 처음부터 알아봤어. 사주한 놈한테 가서 전해. 정정당당히 내 앞에 나서라고."
깡패들이 사라지고 얼마 안 돼 가현과 동우가 집에서 나와 차를 보고 걸어 온다. 종구는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로 지켜만 본다.
"그만 돌아 가."
"와 줘서 고마워. 또 봐."
동우는 고개 갸우뚱거리다가 돌아가고, 가현은 차에 오른다.
"오래 기다려서 화 났어요?"
"그 때문에 화난 거 아닙니다."
"화는 났다는 말인데 왜요?"
종구가 차를 거칠게 출발시킨다.
"어떤 놈들이 차를 발로 차서 흠집을 냈습니다."
"누가요?"
"이 동네 깡패들이겠죠. 세 놈인데 딱 봐도 깡패였습니다."
"깡패들이라 한들 왜 남의 차를 차요?"
"누구 사주를 받았겠죠. 날 손봐주라는 사주말입니다."
"동우를 의심하는 거예요?"
"동우 아니고 누가 그러겠습니까?"
차고에 차를 넣고 현관으로 들어가자 영추가 거실 소파로 불러 앉힌다.
"가현이 볼따구가 부었던데 무슨 일 있었어?"
"그런 일이 좀 있었심더."
종구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차가 많이 상했나?"
"아입니더. 거의 표나지 않을 정돕니더.'
"걔들, 동우 똘만이 맞을 거야. 하는 짓이 꼭 그 애비에 그 자식이야."
"가현 씨한테 일부러 제 짐작을 밝혔심더. 동우를 의심한다고 뿔이 났고 예."
"가현이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뭘 의심하기에는 너무 순진한 데다 철도 없으니. 허어! 드디어 바람이 일기 시작했군. 동우녀석, 제 애비를 닮았다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