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 돌아오는 대로 사장실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5층으로 간 종구, 창배를 보고 몹시 반가워 한다.
"부장님이 와 계셨네 예?"
"여어! 내자리 뺏아 앉더니 신수가 훤해졌구먼."
"무슨 말이 그래? 후배한테 자리 물려 주었으면 그만이지 심통을 왜 부려?"
"백수 노릇하고 있은깨 느는 기이 술하고 심술입니다요."
"오늘 여기 오라고 한 건 자네 자리 때문이야. 박 전무와 합의한 게 있으니 박 전무 오면 들어 봐."
창배가 앉았던 자세를 후다닥 고쳐 앉으며 큰소리로.
"그거 참말인교?"
"최종적인 결정은 박 전무에 달렸으니까 기다려 봐."
"에이! 최종 결정자가 박 전무라니 말도 안 됩니다."
"내 입장 잘 알면서 왜 그래? 자네도 적중에 들어온 포로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르니까 좋아할 일만은 아니야."
"저는 일자리 있고, 꼬박꼬박 월급타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백수 된깨 처자식이 모두 적이 되삐던데 아무렴 그보다 못 할까요?"
"이 사람은 집에서 쉰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말끝마다 백수 백수하네. 자네는 엄연한 주주라고."
"그거야 말로 이름뿐인 주주 아잉교?"
"머잖아 자네는 실속있는 주주가 될 거야."
"그건 무슨 뜻인교?"
"그런 게 있어. 자네가 하도 징징거려 대는 바람에 힌트만 준 거야."
한참이 지나 주차장으로 내려온 영추와 창배가 함께 뒷좌석에 탄다.
"어디로 모실까 예?"
"문현동이 어딘지 알아?"
"광안리 가는 도중에 있는 문현삼거리는 압니더."
"일단 문현삼거리로 가. 거기서부터는 내가 길 안내 할 긴깨."
차를 출발시킨 두 어른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종구는 귀 동냥을 보내고 운전에 열중한다.
"저와 견원지간이었던 박 전문데 오늘은 우얀 일로 곰살맞게 대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뜻으로 받아 들여. 게다가 정식으로 이사가 됐으니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게지."
"하긴 이사라는 직함을 받은 깨네 어깨가 묵직해 지그만요."
"그 자리 만드느라 박 전무와 꽤 오래 실랑이를 했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알지?"
품행도 자리에 걸 맞게 해야 하지만 맡은 일에 전문가가 돼야만 하는 거야."
"알겠습니다요. 훈계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하모 약발이 안 듣습니다."
"내 말을 잔소리로 들으니까 그렇지.
허 군. 지금 우리가 문현동에 왜 가는지 아나?"
"모르는데 예?"
"네 가족이 살 집을 보러 가는 길이야."
"예?"
집을 둘러보고 회사로 돌아온 종구가 흥분을 감추지 못 하고 재만을 불러낸다. 같은 건물 2층의 커피숍에서 기다리던 종구가 재만이 나타나자 손을 흔들다.
"무슨 일이고?"
"그럴 일이 있어."
"또 뭔데?"
"커피 마실래?"
종구가 커피를 가져 와 앉아서 운을 뗀다.
"니 말이다. 지하방에서 자취하는 거, 엉글찡 안 나나?"
"내 형편에 그것도 감지덕진데 무슨 소리야?"
"야 당장 방을 빼라."
"말을 할 기모 알아듣게 해라. 엠마."
"우리가 살 집이 생겼다 아이가. 오전에 보고 왔는데 집따까리는 볼품 없어도 방이 세 개에 일자형의 마루가 있고, 마당이 넓어서 남새밭을 일궈도 되것더라."
"복권 당첨된 건 아일기고, 느그 사장님이 마련해준 집이가?"
"그래. 가족이 가까이 있어야 마음이 안정된다면서 나도 모르게 최근에 매입 했더라고."
"복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거 봉깨 니는 조상 3대가 적선한 복을 한꺼번에 받는 갑다."
"일단은 복이라 여겨야제."
"그런데 그 집하고 내가 무슨 상관이고? 나더러 그 집에서 같이 살자고?"
"와 아이라. 니 좋고 나 좋은 일인데."
"니가 마음 써 주는 건 고맙다만 그건 생각해 볼 문제야."
"생각할 기 뭐시고?" 니는 우리한테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시험 합격할 때까지 삼시세끼 밥 해묵는 시간을 공부하는데 쓰라, 이말이다."
"얌마. 여자만 사는 집에 들어간다는 기이 마음편한 것인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 니는 보나마나 밤 늦게 귀가할 긴데."
"네 입장 고려하지 않고 내 쪼대로 말한 것은 잘못이다만 내 부탁으로 생각해 주모 안 되것나? 도시생활 경험도 없는 민숙이가 성찮은 어머이 모시고 그런 집에 산다는 기이 영 안심이 안 되서 말이야. 그라고 내가 그 집에서 자는 날은 드물 기다."
"그 일은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자. 민숙이한테는 알렸나?"
"당근이지. 집도 그랬지만 다믄 얼마라도 니한테 은혜를 갚게 되었다 캄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이사는 언제 할 기고?"
"그 문제도 니하고 상의할 필요가 있어. 우리집 재산이라 캐봤자 집 한 채에 논 서너 마지기 뿐이지만 민숙이가 뭘 알고 제대로 처분하것노. 그래서 느그 어른한테 부탁 좀 드렸으면 해서."
"아부지한테 전화로 말씀드려 볼께."
"이사 날짜 잡는 것도 집이 팔린 뒤에나 가능해. 논은 나중에 팔아도 되지만 집은 사람이 살믄서 팔아야 제 값을 받을 수 있거든."
"소전머리에 있는 집이라 임자가 금방 나올 기다. 느그 어머이가 국밥집 할 때가 호시절이었는데..."
"부산에서 살 집이 생긴 것은 좋은데 한편으로는 자꾸만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도 든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니 말이야."
"보디가드란 직종이 위험에 노출되는 긴데 와 불안이 없것노. 하지만 눈 앞의 행운은 놓칠 수 없는 것 아이가?"
"그야 두 말 하모 숨가쁘제. 내 때메 손해 본 시간 아나고회로 때우자."
"아나고회 조오치! 쇠주도 오랜만에 한 잔 걸치고."
가현이 사고를 친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아침나절 종구가 남포동의 올림픽 클럽으로 들린다. 출입구에서 종구가 안을 기웃거리자 청소 중인 아즘마가 소리친다.
"영업시간 될라 카모 한참 멀었는데 무슨 일로 오셨능교?"
"지배인님 뵈러 왔는데 예. 안에 계십니꺼?"
"지금 자고 있을 낀데 와 예?"
"언제든지 들리라 캐서 예. 허종구란 사람이 찾아 왔다고 전해 주시모 안 될까 예?"
"선잠 깨웠다가는 혼달림 당할 낀데..."
"안 깨우고 그냥 보냈다고 야단칠지도 모른다 아이가?"
"부탁드립니더."
잠옷 입은 김희상이 눈두덩을 부비며 홀로 나온다.
"누군가 했더니 허 형이었구만."
"단잠을 깨워서 미안심더."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잠이 대수겠오?"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것심더. 진작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더."
"세수 좀 하고 나올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오."
산뜻한 초여름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희상이,
"갑시다. 나랑 같이 가서 만나 볼 사람이 있는데 괜찮지요?"
하고 종구의 눈치를 살핀다.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만나 뵙지 예."
희상이 걸으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는,
"마침 카페에 나와 계신다느만. 내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오."
"아 - 예."
"전번의 그 일을 얘기해 드렸더니 허 형한테 큰 관심을 보였오. 아무튼 만나 보시오. 참고 삼아 알아 둘 것은 그 분은 현재 이 일대의 유흥업소 연합회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오."
"듣고 난깨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더. 저 같은 별볼일 없는 사람한테는 하늘 같은 분이라서..."
"겸손이 몸에 배였는데 그럴수록 난 허 형에 대해 의문이 많아집니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산 거요?"
"절 너무 과대평가 하시니 난처해집니더. 그냥 자가용 기사로 여겨 주이소."
"그냥 기사가 아니라 보디가드란 건 눈치채고 있오. 그것도 철저하게 실력을 감추는... 얘기하다 보니 벌써 다 왔네."
저광도의 전등불이 커져있는 안구석 자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인이 혼자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을 보고 몸을 일으킨다. 다부져 보이는 상체를 헐렁한 옷 속에 감추고 있는 데다 인상마저 온화하여 평범한 동네아저씨 모습이다. 종구를 훓듯이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서 오시오. 반갑소."
"첨 뵙습니더. 따라는 왔습니더만 제가 낄 자린지는 모르것습니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오.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손을 내민다.
"민창수요."
"허종굽니더. 스물일곱 애숭인깨 두 분 다 말씀 놓이소."
손짓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종업원을 부른다.
"난 잠이 덜 깨서 카페인이 필요하고, 허 형은?"
"저도 커피가 좋습니더. 한참 손 아래인 저한테 형자를 붙이시는 거 듣기 거북합니더."
"하. 하. 하. 호칭부터 바로 잡자는 말씀인데 그럼 아우는 어떻소?"
"훨씬 듣기 좋습니더."
"형님도 저도 든든한 아우를 얻었으니 어디 가서 코 삐뚤어지게 한 잔 해야 되겠는데요."
"소뿔도 당김에 빼랬다고 오늘 점심에 할까?"
"죄송하지만 저는 안 됩니더. 운전을 해야 할 몸이라서 예."
"아 참! 기사란 말을 깜빡했네. 주연은 다음기회로 미루고, 전에 이 사람이 와서 심 봤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설마 했는데 허 아우는 내가 보기에도 심이야. 그것도 대물."
"택도 없는 말씀입니더. 심은 커녕 몇 년 묵은 더덕도 못 됩니더."
"허 아우. 우리 그만 담장 허물어버리고 허심탄회하게 지내는 게 어때? 우리가 아우라 불렀으면 아우도 우릴 큰형님, 작은형님으로 불러주면 좋겠는데."
종구가 벌떡 일어나 둘에게 90도 허리 꺽어 절을 한다.
"주제 넘지만 큰형님, 작은형님으로 모시겠습니더. 저는 형도, 아우도 없는 3대 독잔데 오늘 형이 두 분씩이나 생겨 기쁩니더."
"허 어! 이 자리가 바로 유비, 관우, 장비가 결의형제 맺은 도원 같그만.
우리 둘은 이 바닥에서 잔 뼈가 굵었고, 허 아우의 인생 스토리가 몹시 궁금해지는군."
"죄송합니더만 그 얘기는 천천히 해 드리것심더."
"한꺼번에 다 알려고 하면 무리겠지. 근데 모시는 분은 어떤 분이야?"
"그것도 나중에 말씀드리것심더. 아마 두 분 형님이 아시는 분일 깁니더."
"그렇다면 이 바닥 분이겠군. 그 아가씨 말인데 드세기도 하지만 제 멋대로던데."
"무남독녀로 자라서 좀 버릇이 없습니더."
"보수는 넉넉히 받나?"
"기대 이상으로 받고 있심더."
"허 아우의 기대치가 너무 낮은 건 아니고?"
"취직한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것심더."
"그날 허 아우를 보고 내가 생각해 둔 것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일자리를 옮길 생각은 없나?"
"말씀은 고맙지만 일자리 옮긴다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심더."
"희상이가 그런 말을 성급히 꺼낸 데는 이유가 있어. 내가 발견한 심을 남이 캐 가버릴까 안달하는 거야. 내 말 틀려?"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렇다면 심이 왜 절실한지를 알리고 간곡히 청하는 게 도리지. 내가 설명해?"
"형님이 하시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허 아우. 광복동, 남포동이 어떤 곳 인가를 알고 있겠지만 이런 곳에서 업소를 지켜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는 잘 모를 거야. 물론 모두가 힘을 모아 지키지만 강력한 리더가 없이는 불가능 해. 헌데 지금의 실태는 늙은 사자가 이끄는 사자가족이나 다름 없어. 머리가 세어버린 나는 물론이고 희상이도 한물간 나이지. 젊은 피로 물갈이를 해야만 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야. 그런 우리한테 아우가 하늘의 선물처럼, 아니 심이니 땅의 선물이지. 아무튼 허 아우는 우리 두 사람한테는 선물처럼 나타난 거야. 이만하면 이해가 되나?"
"큰형님 말씀은 충분히 알아 들었심더. 하지만 저한테는 형님들 호의를 받아 드릴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더. 제가 모시는 분은 주인이자 은인입니더."
"무슨 은혜를 입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이 자리에서 밝히기는 곤란합니더. 다만 그 분은 제가 지켜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노인이라는 것만 아시고 넘어가 주이소."
"이 걸 어쩌나? 좋다가 말았군."
"그렇다고 조금 전에 셋이서 맺은 결의가 깨집니까? 안 그래? 허 아우?"
"형님들이 곤경에 처하면 당연히 저도 달려와 한팔 거들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