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경비원으로 일한 지 일 년이 지난 어느날 언제나와 다름없이 경비실부터 들린다.
"오늘은 운동 줄이고 3시까지는 돌아 와."
"와 예?"
"좀 전에 사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널 저녁식사에 초대했어. 강 부장이 데리러 올 거야. 왜 벌레씹은 얼굴을 해? 누군 초대받지 못해 심통 나는데."
"제가 가장 가기 싫은 데가 사장님댁입니더."
"작년에 가현이한테 된통 당한 것이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군. 젊은 남녀간에는 엄동설한에도 꽃이 핀다는데 잘 지내봐."
'드디어 보디가드가 되는 모양인데 그 기이 정말 나한테 좋은 일일까?'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야 기다리던 차가 와 크락숀을 울린다. 차에 오른 종구 볼멘 소리로 묻는다.
"오늘이 그날 입니꺼?
"맞아. 네가 목 빠지게 기다리던 날. 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얼굴이야?"
"여러가지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 예."
"마음 불편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니가 뭐가 불편하다는 거야? 오라! 가현이가 무서운 기네."
"그밖에도 이유는 많습니더. 저같은 촌놈이 살기에 집이 너무 으리으리한 것도, 보디가드란 역할도 그렇심더."
"흥! 복에 겨운 소릴하고 자빠졌어. 그자리가 어떤 자린지 제대로 알기나 해?
내가 이십일 년을 지켜온 자리야.
월급이 뻥튀기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도 확 달라져."
"저한테 과분해서 해 본 소립니더."
"알면 됐어. 내가 보기에 니는 특급 보디가드가 될 자질을 갖추었어. 사장님 기대에 부응키만 하면 금방석에 앉는 거야."
러시아워에 길이 밀리지만 종구와 창배는 각기 생각에 잠긴다. 어둠이 깔려서야 사장댁에 도착한 두 사람이 차고에서 정원으로 오르자 개들이 짖어댄다.
"너한테는 저놈들하고 친해지는 기이 급선무야."
"개 이름이 뭡니꺼?"
"이 쪽은 진숙이, 저 쪽은 진돌이야. 네 살배기 한 쌍으로 훈련소를 거친 방범견들이지."
'잘 됐네. 수련상대 하기에 딱이야.'
두 사람이 거실로 들어가자 TV를 보고 있던 영추가 몸을 일으킨다.
"올 사람 다 왔으니 주방으로 가자고."
"가현이는 아직 안 왔습니까?
"제 방에 있어. 족제비도 얼굴이 있지. 작년에 허 군한테 갑질해 놓고 어떻게 얼굴 내 밀겠어?"
그때 막 계단 끝에 내려 선 가현이가,
"내가 족제비면 아빠는 뭐야?"
"너 언제 내려 왔니?"
"딸내미 뒷담화나 하고. 저녁 같이 할까 했더니 쪽 팔려서 못하겠어. 증말."
"미안, 미안. 안 듣는 데선 나랏님 욕도 한다는데 몰래 내려와 엿들은 네가 잘못이지."
세 사람이 식탁으로 가 앉자 가현이 주방에서 음식을 날라 식탁에 올린다.
"한 잔씩 들자고."
영추가 따라주는 와인을 단숨에 마셔버린 창배,
"쫒겨가는 며느리같은 심정이지만 든든한 후배를 앉히고 떠나게 돼 홀가분 합니다."
"쫒겨가는 며느리라니, 늙으막에 고생하는 게 안 쓰러워 해방시켜 주는데 별 소리를 다 하는군."
"용도폐기나 다름 없는데 제 입에서 무슨 좋은 말이 나오능교? 가현아. 니는 나한테 할 말 없나?"
"다른 건 몰라도 기사교체는 한참 늦었어요. 콩나물 시루같은 전철타고 동래까지 등교하기가 죽을 지경이었는데 노인네 보고 데려다 달랠 수가 있어야죠."
"뭐시라! 백세시대에 60대 초인 나더러 노인네라고? 사람 뒤통수를 쳐도 그리 치는 거 아이데이."
"할 말 없냐고 물어 놓고 왜 그래요?"
"너라면 좋은 말 해줄 거 같아서 그랬다, 와. 어릴적부터 널 유치원, 학원, 태권도장 등 데리고 다녔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통학시킨 난데. 섭섭하데이."
"아저씨. 그런 걸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듣고 싶으세요?"
"내가 실없는 놈이제. 떠날 때는 곱시리 떠나야 하는데."
"이래저래 그동안 고생 많았어. 가현이가 말은 저리 해도 애비가 못 해준 걸 자네가 대신 해줬다는 거 알아."
"아저씨가 어디 멀리 떠날 사람이예요? 자리만 바꿀 뿐인데."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 - 깜빡 잊은 게 있네. 이 집이 도둑 강도들의 표적이라고 말해 좃던가?"
"그 말씀 금시초문이지만. 이젠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더."
"아빠. 그럼 나 이제부터 아빠 차로 등교해도 되지?"
"허 군 운전이 아직은 미숙해서."
"운전 미숙은 핑계라는 거 알아. 평소 아빠 출근 시간 30분 앞당겨 출발하면 되니까."
"이봐요? 나 등교 시켜 줄 거죠?"
종구는 대답없이 수저질만 한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씹어버리게."
"그런 기이 아니고, 사장님의 지시가 없어서 예. 알았심더."
"늦어도 8시에 출발해야 되요. 당장 내일부터요."
"내일은 곤란합니더. 저쪽 일을 매듭도 안 짓고 와서 예."
"그래. 모레부터 해."
"알았어요."
종구를 굴복시킨 가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주방을 나가버린다.
식사를 끝내자 강 부장이 종구를 이끌고 주방 반대편의 구석방으로 간다.
"이게 네 방인데 어때?"
"숙직실에 비하모 아방궁입니더."
"볕이 안 드는 기 흠이지만 아늑하고 조용해. 이 방에서 삐댄 세월이 길어서 그런지 떠날라 카이 서운해지는군."
"제가 부장님을 밀어내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더."
"나이들면 젊은이들한테 밀리는 기 순리제. 그런데 가현이가 좀 달라진 것 같재?"
"제가 보기엔 절 골탕 믹일 궁리만 한 것 같던데 예? 제가 양아치 같아서 한 식탁에서 밥도 안 묵것다 했는데 날마다 학교 태워다 달라는 기 말이 됩니꺼?"
"그래서 달라졌다는 거야. 어쨌든 둘이 매일 차 타고 다니면 친해지기 마련이야."
강 부장을 대문까지 바래다 주고 거실로 들어오자 영추가 식탁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우리끼리 한 잔 해야지?"
"술은 안 됩니더."
"가현이한테 또 당할 것 같아서 그래?"
"여기 와 살라쿠모 그럴 수밖에 없심더."
"억지로 권할 수는 없지. 그럼 나도 딱 한 잔만 하지. 너한테는 나보다 가현이가 상전이네. 충고하지만 그 애한테 처음부터 쥐어살면 뒤가 힘들어져."
"잘 알겠습니더.
"그동안 수련의 성과가 어느 정돈지, 자네의 무술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지에 있는지 알고 싶은데..."
"지난 일 년은 지금까지의 제 운동을 가다듬는 기간이었심더. 지난 날의 잡다한 운동들을 격투기 하나로 묶은 것이 가장 큰 성과였고, 교도소에서 익힌 단봉술을 검도와 결합시킨 것도 그에 못지 않은 수확이었심더.
제 수준을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뭣 하지만 아직까지는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심더."
"중부인력 민소장은 왕년에 부산에서는 알아주던 실력잔데 자네 실력에 대해 어떤 평을 내리던가?"
"깊이를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더. 그 분한테도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린 적이 없심더."
"그만하면 알만하군. 너는 천생무골이야. 복수심이 오늘의 너로 성장시킨 셈인데 복수를 그만 둔 지금도 운동 열정은 변함이 없으니."
"아버지 DNA를 물려 받아서 그런 거 같심더.
제 아버지도 젊은 날에는 서부경남에서 명성깨나 날리던 씨름꾼이었심더."
" 부전자잔이구먼. 오늘은 술기운 빌리지 않고 내 얘기를 조금 하지."
"말씀하시기 전에 제가 들어서 좋을 긴지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이소."
"왜 듣기 거북하나?"
"아 - 아입니더."
"그게 네 성품인 건 알겠는데 이제 내 발이 되고, 방패가 되는 너라 나에 대해 웬만큼은 알아야 할 거야."
"알것심더. 보디가드는 눈과 귀는 있어도 입이 없어야 하는 자리라고 강 부장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더."
영추가 따라 놓은 술을 홀짝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밀수로 한 밑천 잡은 얘기는 했고, 세 번째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시작한 것이 전당포였어. 지금 광복동에 있는 전당포가 바로 그것이야. 전당포를 하다 보니 절로 사채놀이를 하게 되더만. 광복동은 국제시장과 남포동을 끼고 있어 돈 빌리자는 장사꾼들이 줄을 섰지. 여기까지의 내 얘기에서 뭘 느꼈나?"
"좀 더 들어 보겠습니더."
"나는 스스로 악인이라 생각지는 않지만 사회에 좀벌레같은 존재라는 건 부인하진 않아. 허나 지금은 그 짓 하지 말자 해도 내 마음대로 손을 씻을 수가 없는 처지야. 왠지 알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더."
"널 믿고 혁명을 할 작정이라면 이해하겠어?"
" 예?"
이튿날 이른 아침,
정원의 공터로 나온 종구, 단봉술 수련을 하고 있는데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개들이 갑자기 현관으로 달려가 가현을 뒤에 달고 돌아온다.
"쇠막대 가지고 뭣 하는 거죠? 칼싸움 놀이하는 애들 같그만."
"쇠막대가 아이라 나무막댑니더."
"이리 줘 봐요."
막대를 받아 휘둘러 보고는 돌려준다.
"나무 치고는 묵직하네요. 아빠 말로는 고수라던데 이런 걸 무엇에 써요?"
"이거 제법 쓸모있는 무기거든 예. 가현 씨도 아침운동을 하십니꺼?"
"여기는 내 운동장손데 그쪽이 내 허락도 없이 차지하고 있어서 김 샜지 뭐예요."
"공지가 여기 뿐이라서..."
"그런데 애들한테 무슨 짓 한 거예요? 낯선 그쪽한테 꼬리를 치게요."
"어제 오후 내내 데리고 놀았습니더."
"내일 아침부터는 뒤란에서 운동해요. 조금 손보면 여기보다 좋을 거예요."
"그라지 예. 그럼 전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