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가 끝난 과목들 덕에 한결 가벼워진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한파 관련 얘기를 어렴풋이 들었던 게 생각나는 날씨였다. 적당히 때가 되면 바뀌는 것일 뿐이던 계절, 그리고 날씨. 언제부턴가 제연은 날씨를 살피고, 온몸으로 느끼고, 그에 따른 감정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다. 아직까지 계절 냄새는 좀 미지수다. 그것도 언젠가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아직 종강하지 않은 과목들은 전부 프로젝트 결과물을 제출해야하는 것들이었는데, 성격상 일치감치 제출까지 끝내놔서 기말 발표가 딱 하나 남아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기말 발표를 하는 날이다. 대망의 ‘번역의 이론과 실제’ 최종 발표 날.
이번 학기가 절반쯤 지났을 때 있었던 첫 번째 발표.
“제연군 과제 제출한 거 보고 지난 학기 번역 입문 들은 그 학생이 맞나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발표로 얼굴 보니까 맞네요.”
제연은 전공 교수님들 중 가장 격렬하게 피하고 싶은 교수님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이 교수님은 단순한 번역 작업을 싫어하셨다. 본인은 말 그대로 언어만 바꿔서 옮겨 적는 과정은 번역 취급하지 않는다며 오티 때부터 못 박아두셨다. 단순 번역을 잘하는 학생들은 성적을 아무리 잘 받아봐야 비마였다. 즉, 제연의 지난 학기 번역 입문 성적은 비마였다. 재수강도 안 되는 거지같은 학점 비 마이너스.
“방학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잘 못 지냈다고 해도 잘 지냈다 생각할 수밖에 없겠네요. 번역할 때 주로 사용하는 필체가 이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는 없으니까. 은유적인 표현도 잘 썼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려서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기도 했고. 너무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입이 벌어져 뚫어져라 제연을 쳐다보는 동기들만 봐도 그랬다. 모두가 제연이 이 교수님께 번역다운 번역을 했다고 칭찬받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생길 수 없다 호언장담했다.
“좋은 일 있었나 봐요?”
“네?”
“일이 아니라, 인연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은가? 아무튼 발표 잘 들었어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번역문을 만나니까 저까지 기분이 좋네요.”
제연도 참 얼떨떨했다. 더더욱 여름이 보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UGLY LOVE’
큼직하게 하늘색으로 쓰여 있는 책 제목. 심해를 연상 시키는 그라데이션 배경색과 타이틀 주변의 기포 방울들.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랑에 침식되어 가는 주인공.
제목 주변을 검지로 살살 쓸어봤다. 그리고 여름을 한번 떠올렸다. 두께가 꽤 돼 부피감을 자랑하는 책등도 손으로 훑어봤다. 다시 한 번 여름을 그려봤다. 잔잔히 피어오르는 미소에 제연은 조금 더 밝아진 기분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본래대로면 영미 고전 소설들을 택해 번역했을 거다. 평소 읽지도 않는 일반 문학 장르, 그 중에서도 소설을 고른 건, 제목을 보는 순간 꼭 저 단어가 제가 지닌 사랑을 말하는 거 같아서였다. 울퉁불퉁 모나고 다듬어지지 못한 사랑, 하지만 그렇기에 온전히 너만을 바라보는 날것의 사랑.
“안녕하세요. 소설 UGLY LOVE로 번역의 이론과 실제 기말 발표를 진행할 영어영문학과 16학번 이제연입니다.”
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나의 번역, 나의 사랑.
종강은 그저 방학의 시작이고, 꽉꽉 채운 방학 일정들을 점검하는 날이었는데, 교수님께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서는 기분이 시원섭섭해 이상했다. 인문관 건물을 나설 때는 문을 열자마자 휙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슬슬 어둑어둑 해지려는 하늘을 보니 새삼 해가 짧아지긴 했나보다, 뭐 이런 생각도 잠깐 했던 거 같다.
“저기, 이거 어떤 분이 전달해달라는데요.”
오래가지 못한 독백 끝에 품에 안긴 건, 꽃다발이었다.
“누가요?”
“아까 저기 서계셨던 분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손가락이 향한 곳엔 아무도 없었다. 곧 제 할 일을 다 한 사람도 사라졌다. 제연은 가만히 꽃다발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 위에 얹어져있던 봉투를 열어 엽서 한 장을 꺼냈다.
‘영화 입장권’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글씨.
‘2020-12-24(목) 1회 17:15~17:30
경영관 651호 (성인 1)’
그 밑에 적혀있는 세부 정보들.
제연은 곧바로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오후 5시 10분. 경영관까지 서둘러서 가면 빠듯하게 맞출 수 있는 시간이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제목조차 없는, 러닝 타임도 일반 영화보다 훨씬 짧은, 진짜 영화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영화지만 제연은 확신했다. 잘 기다리고 있으라던 약속을 지키러 왔구나.
“잠시만요!”
경영관까지 언덕길을 뛰어 올라가고,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있는 힘, 없는 힘 다해 뛰어서 겨우 올라탔다. 6층에 내림과 동시에 손목에 찬 시계가 5시 15분을 가리켰다. 그래서 또다시 뛰어 복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강의실로 향했다. 651호. 눈으로 읽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불이 다 꺼져있는 강의실에 제연은 숨을 고르며 찬찬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 대형 화면과 가까운 곳에 앉았다. 핸드폰으로 불빛이라도 비춰볼까 싶어 화면을 켠 순간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전공은 왜 물어봤나 했는데. 처음 만났을 때 대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형식적인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어둠 속에서 영상이 재생되고 조곤조곤 이어지는 나레이션은, 영어였다.
“Someone will reprimand me for having a young heart, and someone will say as if teaching me that I haven't grown up enough to know what the world is like. But I would like to answer that this childishness mind is definitely the most beautiful feeling in the world after all, which called love. The magic of becoming one. Tonight, I sincerely welcome you invited in my world of love.”
그리고 뒤이어 막이 오른 영화의 제목도, 영어였다.
‘CHILDISHNESS OF MIDSUMMER’
제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잠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진정한 번역을 알려준 사람이 번역되지 않은 날것의 영어를 빈틈없이 전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는 참 여름다웠다. 그래서 더 눈을 떼지 못하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 영화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눈에 누구 영화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여름의 취향, 성격, 분위기, 그 모든 걸 쏙 빼다 박은 작품이다. 그러니 잘 아는 사람인 제연은 영화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여름의 향기와 소리를 차고 넘치게 눈에, 마음에 담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5분. 단편 영화 중에도 가장 짧은 시간의 영화. 그 시간이 저와 여름의 모든 걸 담은 엉겁결의 실타래가 무수히 이어지는 시간인 거 같았다. 결국 제연은 여름의 이름이 한가득 적혀있는 엔딩 크레딧이 끝나갈 때까지 옴싹달싹 못하고 굳어있었다.
그러다 결국엔,
‘DIRECTOR MIDSUMMER’
맨 마지막에 나온 감독 란에 적힌 영어 단어에 울컥 울음이 터졌다.
영화는 여름이라는 계절이 사랑하기에 충분히 청량해서 비조차 사랑을 잔뜩 머금고 쏟아지는 것처럼 표현했다. 하지만 그건 여름이라서가 아니다. 이제는 안다. 제가 사랑에 빠진 건 매년 삼 개월 남짓 찾아왔다 떠나는 계절 여름이 아니다. 제가 만난 사랑은 전부 한여름이라서 가능했다. 사시사철 변화하는 계절과 무관하게 여름이 지닌 모든 것을 생생하게 전해줄 한여름을 제가 사랑해서.
《Believing that I lacked the ability to love someone in this capacity again was the only fear I had left to conquer.》
“제연아.”
생생한 목소리가 강의실 뒤편에서 들려온다.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본 제연은 울고 있었다. 또르르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맺힌 눈물 덕에 더 청초해진 눈망울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My face is covered in tears. …. I'm crying tears of joy.》
“내가 가진 감정은 이래. 이건 내가 너한테 전할 수 있는 전부를 담은 고백이고.”
설령 네가 누굴 사랑하는지 몰라서, 단순히 여름이라 설렜나보다 생각해도 좋으니, 내가 인간 한여름이 아니라 단순히 계절로만 기억되어도 좋으니, 너만을 초대한 내 사랑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겨줄 수 없겠냐는 절절한 고백.
그대로 멈춰 하염없이 울고 있는 제연을 향해 여름이 먼저 다가갔다. 첫 만남에서 그랬듯, 함께 했던 하동 생활에서 그랬듯, 그건 사랑이라고 알려주는 순간에 그랬듯 어김없이.
“…더 알려줄게.”
하지만 이번엔 제연이었다. 여태까지 당연하다는 듯 이어진 둘 사이 관계에선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 또한 여름이어야 했다. 불변의 법칙이 깨졌다.
“사사건건 시시콜콜한 것들 전부 다 알려줄게. 나중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나에 대해 다 알게 돼도 살면서 새로 생길 모든 것도 빠짐없이 알려주겠다고 약속할게.”
“그래, 좋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건 모든 게 꿀이라며. 네가 내 모든 거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 때까지 나랑 같이 꿀 빨자.”
꿈인가. 꿈도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울 리가 없다. 행복해서, 행복에 취해서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웃으며 대답한 건데. 진심이 닿지 않았다 생각한 걸까. 제연이 눈물에 얼굴이 잔뜩 젖은 청순가련한 모습으로 계속 말을 덧붙인다. 이제연 사랑꾼 다 됐다.
“이거 고백이야?”
“사랑해.”
아 진짜 반칙. 이 정도면 드라마 남주도 과다설정으로 욕먹는다.
“사랑해.”
다시 이어지는 사랑의 언어.
“사랑해.”
각박하고 차갑기만 해 매정하게 나를 동떨어진 곳에 버리고 등 돌린 것만 같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침의 따스한 햇볕이 침대에 축 쳐져있는 내 손가에 인사하고, 고단했던 하루에 힘없이 집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을 잔잔히 부는 밤바람이 함께 내딛어주는 뜨뜻미지근한 세상.
정반대의 단어들은 전부 맞닿아 있다. 누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내가, 당신이, 또 우리와 같은 온기를 지닌 사람이 세상 어느 곳에선가 숨 쉬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살아가고 있기에, 숨결이 닿았기에 모든 건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삶이 살아가는 건지, 죽어가는 건지에 대한 정답은 없듯이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계속해서 나라는 이야기 속 새로운 목차가 적어 내려진다.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전부 달라서 더 오래도록 곁에 붙어있으면서 서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사랑해.
“여름아, 사랑해. 한여름 사랑해. 내가 너무 사랑해.”
제연의 입술이 서서히 여름에게 다가가 닿았다. 분에 겨울 정도로 벅찬 사랑을 주고받으며 오래도록 머금었다.
《I lean over and kiss Tate for giving me something this beautiful again.》
늦은 만큼 한 가득 고백이 쏟아지는 서울의 밤. 1년 중 하얗게 물든 세상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날. 사랑의 온기로 가득 찬 둘은 비로소 행복이 가득담긴 미소를 머금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 함께 꾸며갈 앞날을 상상하게 됐다.
‘어느 누가 이걸 단순히 한여름의 치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아마, 여기 적힌 활자를 눈으로 좇은 사람들은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거다. 이건 한여름에 찾아온 청연이었다. 결과는 한여름의 압승.’
피식 웃으며 타자를 열심히 두들기던 제연의 손이 멈칫했다. 의미 없는 걸 알지만 노트북 화면을 삐딱하게 노려봤다. 한여름의 압승은 좀 아니지 않나.
이내 귀엽다는 듯 웃음기를 머금은 제연이 그대로 번역해 단어를 옮겼다. 우리 여름이가 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따지고 보면 맞지 압승. 여전히 우린 날것 그대로 넘치도록 사랑하니까.
한여름의 여름날부터 크리스마스까지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께도 사랑을 전합니다.
아마 앞으로 모든 계절, 모든 날씨에 자연스럽게 한여름을 떠올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여름의 메리 크리스마스.
-옮긴이 이제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