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평생 그렇게 살아. 네가 얼마나 상처였는지, 너랑 함께하는 게 얼마나 상대방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지 넌 죽어도 모를 테니까 너도 진짜 사랑이 어떤 건지,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서 너한테 주어진 시간들 전부 되도 않는 네 자존심 채우는 데나 쓰면서 그렇게 살기를 빌게. 그러니까 지금이랑 아무것도 달라지지 말고, 달라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고 딱 지금 그 상태에 머물러서 평생 그렇게 살아줘. 우연히 스쳐서라도 마주치지 말자 우리.”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남은 미련조차 없다는 듯 있는 힘껏 던진 후드 티가 제연의 몸을 때렸다. 바닥에 툭 떨어진 후드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좋은 기억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냉기가 흐를 듯한 차가운 멘트를 끝으로 동갑내기와의 1년 반 연애의 종지부를 찍었다.
어떻게 만나게 됐더라.
제연은 지원과 과팅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다. 만났다가 아니고 마주쳤다인 이유는 정말 마주침에서 끝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팅으로 끝나는 자리들을 세상에서 제일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라 생각하던 제연이 나간 처음이자 마지막 과팅이었다. 승원과 함께 나가기로 했던 동기가 당일 펑크 낸 자리를 메꾸기 위해 사정사정한 결과였다. 2차로 넘어가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제연은 슬그머니 자신은 생각 없다며 빠질 준비를 했다. 자리만 채우려 나온 거였으니 1차가 끝날 때까지 남아있던 것도 기적 같은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제연과 함께 2차로 넘어가지 않고 빠졌던 또 다른 사람이 지원이다. 물론 지원은 자기 의사로 빠진 게 아니었다. 너무 만취해서 2차로 넘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이거 챙겨.”
휘청거리며 걸어가던 지원이 손에 쥐고 있던 카드지갑을 떨어뜨리고 갔다. 뒤따라 나가던 제연은 지갑을 주워들고 걸어가 지원의 손에 지갑을 쥐어줬다. 그리고 훗날 지원은 이때 제연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지원은 과팅의 주선자였던 승원에게 연락했다.
‘저기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 지난주에 과팅 나갔던 배지원인데.’
‘혹시 그때 너랑 같이 나왔던 과 친구 번호 알려줄 수 있어?’
‘그 친구가 번호 남한테 주는 거 싫어하면 내 번호 남겨줄게!’
그렇게 제연과 지원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연애를 시작했다. 제연이 연인으로 나쁜 사람이었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지원이 제연을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 좋게 봤던 걸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도 제연은 지원에게 잘해줬다. 가끔, 아주 가끔 제가 학업이나 학교생활에 밀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해 못해주고 싶지 않았다. 주어진 일에 소홀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조차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무난하게 별 문제 없이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둘이 자주 다투기 시작한 건 사귄지 반년쯤 됐을 때였다.
“제연아 어디야?”
“미안한데 오늘 못 만날 거 같아.”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저번에 말했던 전공 팀플. 최종점검 하려고 모였는데 갑자기 문제가 좀 생겨서. 미안 다음에 보자.”
“우리 오늘 거의 3주 만에 만나는 거잖아….”
“곧 시험기간 끝나니까 그때 만나.”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전에도 두어번 정도 이랬다. 본인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급하게 약속을 취소한 적이 있어서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싶겠지. 별 건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네 말투가 정말 지쳐있어서 그게 좀 걸렸다. 나도 시험기간인데. 나도 과제 있고, 나도 팀플 있는데. 그래도 난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싶어서 이렇게 동동 거리는데. 넌 왜 챙겨야 할 일이 하나 더 는 것 같은 말투일까. 우리 분명, 서로 좋아해서 사귀고 있는 건데.
제연을 만난다고 들떠있던 제 모습이 멍청해보여서 속상했다. 그래도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연은 한결같지 않은가. 그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다. 그날 저녁 일은 잘 해결 됐는지 물어볼 겸, 목소리라도 더 들을 겸 전화를 했다.
“다음에는 조금만 더 일찍 말해주라. 나 오늘 조금 속상했어.”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생각나자마자 바로 연락한 거였어.”
“그냥…, 난 되게 설레면서 기다렸던 날이었거든. 넌 안 그래?”
“그래.”
근데 어떻게 내가 연락할 때까지 먼저 연락할 생각도 안 했어? 카톡 하나라도 남겨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이런 말을 내뱉는 순간 너무 애처럼 군다고 보일까봐 걱정됐다.
“시험기간이라 바쁜 건 아는데, 틈틈이 연락해줘.”
“시간 날 때마다 할게.”
“…만나는 건 진짜 어려워?”
“시험기간에는 시험에만 집중하는 게 좋잖아. 둘 다 잘 마치고 보자.”
완벽하고 대단한 모습이 참 좋았는데. 그런 모습이 짜증났다. 성적이, 시험이 더 중요한 우선순위에 있는 네가 시간이 지난다고 나를 먼저 봐줄까? 먼저 나를 떠올리고, 다른 것들보다 우선으로 삼아주긴 할까? 이렇게 지나다보면 그 다음에는 취직이, 회사가, 일이 보란 듯이 네 우선순위를 차지하겠지.
“진짜 내가 보고 싶긴 해? 난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해? 네가 완벽해지는 순간까지?”
그렇게 다퉜다. 모르는 척 전부 가리고 있었던 것일 뿐 지원은 전부 알고 있었다. 은연중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잘해주는 것 같지만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 챙겨주는 것 같지만 맡은 일에 열심을 다하느라 그렇다. 위해주는 것 같지만 제 삶이 유일한 목적인 사람이다. 제연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 처음 사귀게 된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한결같이.
그 뒤론 싸우는 일이 잦았다. 싸움의 레파토리도 비슷했다. 지원이 하는 말도 거의 똑같았다. 불쌍해서 져주는 거라 해도 좋으니까 눈 딱 감고 한 번만 맞춰주면 안 될까? 내가 언제 너한테 완벽해야 한다고 말 한 적 있어? 이럴 때마다 난 내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거 같은 기분이야. 넌 단 한 순간도 내 앞에서 무너진 적 없잖아. 우리 진짜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이인 건 맞니?
…넌 날 사랑하긴 해?
제연은 이 말들을 전부 흘려들었다. 제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었기 때문이다. 넘치도록 챙겨주고, 진심으로 위해주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더 잘 보이고 싶은 것이, 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그러니까, 제연은 사랑 없이 완벽한 연인이 되려고만 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제가 완벽히 해내지 못한 사랑 때문에 사랑에 빛나던 눈망울이 생기를 잃었다는 현실을, 외면했다.
“오늘 공강이지? 뭐하고 지낼 예정이야?”
요즘 들어 여름이 아침 일찍 전화하는 횟수가 늘었다. 웬일이지 싶었지만 규칙적으로 지내려나 보다 하고 말았다.
“아, 오늘 해야 할 게 있어서 학교 가.”
바로바로 대답하는 평상시를 생각하면 답변이 한 박자 늦었다. 여름 역시 제연이 뭘 하고 있었나보다 하고 말았다.
“그래? 과제 대강 다 끝내둔 거 아니었어?”
“하나 잊어버렸던 게 있더라고.”
“이제연이 과제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되게 특별한 날이네.”
놀리는 투로 맑게 웃는 여름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뜨끔 찔리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연은 오늘 학교에 가지 않는다.
“너는 오늘 뭐해?”
“자전거 타고 나갔다 올까 생각 중. 별다른 건 없어. 알잖아, 하동은 항상 잔잔해.”
매일 묻는 안부인사 같은 뭐하냐는 말에 여름 역시 움찔했다. 괜히 누가 지켜보고 있나 싶어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살폈다. 여름 역시 오늘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올 생각이 추호도 없다. 둘은, 서로가 상상도 못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하동 성인 한 명이요.”
제연 인생에 두 번째로 즉흥적인 순간이었다. 전날 밤 하동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서 여름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만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하동에서의 기억이 옅어지고 있어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싶어 향하는 길이었다. 새삼 특이한 점은, 손에 꼽히는 즉흥적인 순간마다 향하는 곳이 하동이라는 것.
“울 여름 잘 잤어?”
“응. 우리 오늘도 팟팅 하자아!”
귀엽게 양 팔을 만세 하듯 뻗은 여름이 외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름의 하루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요즘 여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는 중이다.
“이번에도 1테라 나오면 한여름 진짜 한 대 맞는다.”
“저기요. 어차피 그 1테라 전부 제가 보거든요?”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저희도 좀 봐주실래요?”
얄밉다는 듯 여름의 코끝을 살짝 쥐고 흔든 재야를 보며 채은 역시 옆에서 거들었다.
“언니, 살살해요 우리.”
“노력해볼게.”
여름은 채은에 약했다. 말로는 병아리 같이 오동통한 입술을 가진 사람이 너무 귀엽다고 하지만, 다들 그게 채은이라 그렇다는 걸 알았다.
“여름이 어련히 잘 하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둬.”
장비와 소품을 점검한다고 돌아다니던 의영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올 주의영 열정. 여름아 추가 근무 필요하면 의영이 각이다.”
“미쳤어?”
아름다운 하동의 풍경, 애정하는 사람들,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작업.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제연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노동에 현장 사람들이 잠깐 쉬어가자며 자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제연은 하동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몇 달이 지났어도 식은 죽 먹기였다. 머물던 곳에 찾아가는 길쯤은 금세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이곳에 다시 올까 말까 고민한 날들이 많았다. 그렇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풍경들이 눈에 담기고, 마법처럼 여름과 버스를 타고 다녔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채우면 어느덧 내려야할 곳이 다가왔다. 시간이 많기도 하고, 걷고 싶기도 해서 한 정류장 전에 하차 벨을 눌렀다. 사실 막상 여름을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겠어서 그랬다. 마주칠지 아닐지조차 모르지만, 만날 순간을 미루고 싶으면서도 얼른 만나고 싶어서. 소심하게 한 정류장 전에 내려 천천히 걸어가는 걸 택했다.
차근차근 걸어 매일 내리던 버스 정류장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자 하동을 떠나던 마지막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치 눈앞에서 그 장면이 실물로 펼쳐지고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과거로 넘어가 그때 그 순간을 현재의 내가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정하고 나니 보인다. 눈이 있다고 세상 모든 걸 전부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눈으로만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사랑이 그렇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북적이며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거 같아 가까이로 다가가다 말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촬영 하나? 잠시 서서 사람들의 대화소리에 집중하던 제연이 순식간에 발걸음을 돌려 내렸던 정류장으로 향했다. 도망쳤다. 더 있으면 안 돼.
“두려워? 사랑이?”
초조함에 손끝을 쥐어뜯었다.
제연은 그대로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이후 버스 터미널에 앉아 넋을 놓고 가만히 있다 서울행 버스표를 끊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내내 대화소리가 맴돌았다.
“두려워? 사랑이?”
“…”
“그럴 필요 없어.”
“…”
“내가 더 채울게. 네 사랑이 온전해질 때까지 내가 더 많이 채워줄게.”
촬영하는 것처럼 보였던 걸 생각해보면 대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착각일지 몰라도 그게 꼭 저에게 하는 말 같았다. 저만을 위해 준비된 말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