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자각하고 있지 못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본 여름의 삶은 참 독특했다. 그래서 여름과 지내본 사람들 사이에는 암암리에 공유되어 있고, 무조건적으로 공감할 내용들이 전해졌다. 이름 하여, 한여름 관찰 일지.
챕터 1, 여름은 해외에서 보낸 시간이 꽤 긴 편에 속했다. 남들처럼 유학을 간다거나,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 태어나 자란 경우는 아니었지만 자잘 자잘하게 해외에 나가있던 시간들이 있었고, 또 단기로 떠났던 인도네시아에서의 시간이 있었기에 한국에서만 자란 사람들과는 아주 조금 다른 점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어? 야 얘들아 신호 얼마 안 남았다 뛰자.”
“왜? 기다렸다가 다음 신호 건너자.”
이런 사소한 부분들. 여름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 바뀐 신호가 아니라면 설령 신호가 바뀐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횡단보도에 도착했더라도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린 아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중교통을 탈 때 좀 오래 걸리시면 절대 틈 사이로 먼저 지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뒤에 서있는 사람들이 재촉하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 먼저 지나가려는 걸 막는 것 마냥 가만히. 언젠가 매번 그렇게 살면 적게 걸릴 시간도 더 걸리겠다 싶었던 동기들이 물었을 때, 여름은 해맑게 대답했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조금 천천히 간다 해도 크게 손해 보는 거 없잖아.”
챕터 2, 흥미 있는 분야가 금방 생기고, 거기에 열심히 열정을 쏟아 붓고 나선 미련이 없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름은 넓고 얕게 할 줄 아는 게 많은 편이었다. 어릴 적엔 악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고, 크고 나선 그때그때 생기는 관심사에 따라 즉흥적으로 많은 걸 선택해서 배웠다. 유화도 그려봤고, 금속공예도 해봤고, 코딩도 돌려봤고, 언어에 꽂혔을 땐 일본어, 중국어부터 시작해서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까지 다양한 언어들을 공부했다. 매번 기초가 될 정도의 실력만 다진 상태로 다음 관심사에 맞는 새로운 취미를 찾아 떠났기 때문에 엄청난 수준급의 실력은 갖춘 게 없었다.
한동안은 스스로도 거기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 같더니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맑은 여름으로 돌아와 자신을 뭘 해도 얕은 토대가 있을 테니 편하지 않겠냐며 웃는 모습에 다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실 여름은 토대가 없어도 별다른 무리 없이 많은 걸 해낼 수 있는 아이다. 이건 여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동의할 팩트이다. 사랑스럽다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름과 지내면 모두가 계곡 가에 걸터앉아 계곡물에 물장구치는 것 마냥 그 사랑스러움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게 모두가 인정하는 여름의 장점이자 여름만이 지닌 고유의 특징이었다.
챕터 3, 거의 모든 경우에 그럴 수도 있다며 상황을 가볍게 웃어 넘겼다. 습관 아닌 습관이었다. 분명 화가 날만한 상황임에도, 자신이 난처해지는 억울한 상황임에도 항상 웃어 넘겼다. 여름과 일정 시간 이상을 보낸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여름이 취할 레파토리를 모두 꿰어 알고 있었다.
언젠가 전공 수업에서 타학과 복전생이 발표 하루 전 피피티 자료조차 넘기지 않고 잠수를 탔을 때였다. 다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분노에 치밀어 실시간으로 카톡을 주고받고 있는 상황에서 밥을 먹고 돌아오던 여름과 친구들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름의 팀원 한 명을 만났다. 그리고 팀원과 눈이 마주치자 여름이 했던 말은 이랬고,
“괜찮아. 내가 일단 방법을 찾아볼게.”
여름이 이 말을 내뱉는 동시에 여름의 곁에 서있던 친구들도 속으로 이 멘트를 내뱉었다. 와, 한여름 진짜 한결같다. 이런 생각도 동시에 떠올렸다. 여름의 입버릇은 정말 명확하게 정해져있는 편이다.
1. 괜찮아.
2. 그럴 수도 있지.
3. 내가 해볼게.
거의 헤어진 연인이 새벽에 연락하는 구질구질 멘트 탑3 수준으로 변함없이 여름이 전하는 말이었다. 미련한 건지, 멍청한 건지 한여름은 제가 나서서 고생을 사들이는 삶을 산다.
그리고 얼떨결에 여름의 친구들과의 자리에 함께하게 된 제연은 저도 모르는 사이 한여름 관찰 일지 챕터 3까지 통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 의문이 생기고, 도대체 자신의 사전에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특이하다 느꼈던 포인트들이 여름과 지내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내용들이라니. 내가 제대로 봤던 게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틀린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온 안심인지, 아니면 저도 남들과 다를 거 없이 여름을 있는 그대로 겪었다는 사실에서 온 안심인지,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안심을 한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랬다. 왜인지 모르게 안정감이 느껴졌다.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는 걸 제일 싫어하는 제연의 성격상 여기 나온 순간부터 조금씩 하고 있던 후회가 홀가분하게 사라지고, 아주 조금 흥미가 생겼다. 어쨌든 이 자리에 나와서 얻어가는 게 하나쯤은 있겠다는 확신에서 온 흥미였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저희 생맥 3잔 더 주시고요, 김치전 하나랑 참이슬 두 병 주세요.”
발랄하게 띵동- 하고 테이블 벨을 누른 다빈이 주문을 줄줄 읊었다.
“마지막에 오신 고객님 신분증 검사 한 번만 할게요.”
자연스럽게 정민이 제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직원과 거리가 먼 제연을 배려해 대신 신분증을 건네주기 위함이었다.
“여기요. 술은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이어진 행동들. 특이점이라곤 일면식도 없던 사이인 제연이 더해진 것 뿐인데, 표정이 왜 저렇지? 다빈은 발을 뻗어 정민의 다리를 툭툭 쳤다.
‘왜.’
분명 차정민 미간 찌뿌린 거 봤는데.
‘나중에.’
정민은 대강 상황 파악을 끝낸 후라 속으로 그저 웃었다. 한여름 이 귀여운 자식. 놀려먹을 일 생겼네.
대다수의 큰 사건들은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멀티탭이랑 충전 케이블 주고 온다 해놓고 그대로 가져왔네.”
“맞다. 저도 받는다 해놓고 완전 까먹고 있었어요.”
“이거 어떻게 줄까. 택배로?”
“음, 아뇨! 집 근처 사는 친구 통해서 받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친구한테 전해주실 수 있어요?”
“물병 빌렸던 것도 있다. 이것도 같이 줄게.”
“친구한테도 부탁해둘게요! 공강 언제예요?”
돌려준다는 걸 그대로 서울에 들고 와버린 여름의 물건들을 전하러 갔던 게 전부였다.
“저희 다 같이 가볍게 술 한 잔 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같이 가실래요?”
“아뇨, 다시 가봐야 해서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여름이랑은 하동에서 알게 되셨어요?”
“얼핏 들었는데 오늘 공강이라면서요?”
코 꿰이듯 한 마디를 최소 세 마디로 돌려주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갔다. 그리고 같이 술을 마셨다. 그래. 여기까지는 어찌저찌 양호했다고 치자.
“아니 보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보였으면 좋겠다니까.”
“와, 결론은 보고 싶다는 건데 빙빙 돌려 말하네.”
“그게 아니라니까. 보이다 안 보이는 게 신기하다는 거지.”
“여름이가 무슨 심령사진이냐? 보였다 안 보이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정과 꼬장에 대한 기억은 도대체 뭐며,
“처음 봤을 땐 산책 나온 개 같았어.”
“야 이거 찍어! 나중에 한여름 보여주면 허니잼 그 자체.”
“근데 나만 그래? 보다보면 골든 리트리버 생각나지 않아?”
“여름이가 러블리 큐티로 보이는 거 잘 알겠고요. 다음 커플.”
구구절절 첫 인상부터 지금 가지고 있는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 설명하던 기억은 뭘까.
“남들이 보기에도 그래? 이거, 사랑이야?”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마지막 멘트에 제연은 있는 힘껏 머리를 쥐어뜯었다. 여기가 누구 집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어제 같이 죽자 살자 마셨던 사람들이 널부러져 있는 걸 봐선 이 중 누군가의 집인 건 확실하니 일단 패스.
‘이제연 너 죽었냐? 강의 시작 5분 전’
주섬주섬 핸드폰과 지갑, 가방을 챙기고 일어서자마자 울리는 카톡 알림에 진심으로 미쳤나 생각했다.
‘급해서 그러는데 대출 좀’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런 노답 같은 짓을 저지를 수가 없는데.
‘꽁으로 얻어먹을 생각 말고 점심 사’
운동화를 구겨 신고 무작정 달렸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안하던 짓을 많이 해?”
“난들 아냐.”
“그럼 누가 알아. 목숨 걸고 지 인생 하나 지키면서 사는 이제연 아니면 알 사람이 어딨어.”
“아 나도 몰라.”
강의가 끝나자마자 둘은 정문 앞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메뉴판을 볼 것도 없이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주문도 끝마쳤다. 자주 앉는 구석 선풍기 앞 테이블에 앉은 제연은 우선 물부터 한 잔 들이켰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알 길이 없다.
“사랑을 사랑으로 잊는다는 말이 괜히 있겠냐. 괜찮을 거 같은데 뭘 고민 중인 건데?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야 주승원.”
“왜.”
“이게 사랑이냐?”
하마타면 승원은 씹던 걸 그대로 다 뱉어낼 뻔 했다. 턱이 제 기능 상실할 만한 소리를 해온 저 멍청이 덕에.
“말이라고 하는 거지?”
“걔도 나한테 내가 하고 있는 게 사랑이래. 걔랑 친한 사람들도 전부 나보고 사랑이 아니면 뭐냐 그러더라. 네가 보기에도 그래?”
설마 이제연이 사랑은 개뿔 관심도 없을 거 같은 인간이어도 어쨌든 사람인데 미친 짓을 저지르진 않았겠지. 심각한 문제라는 것처럼 진지하게 내뱉는 제연을 바라보며 거칠게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한 승원은 조금이라도 진정해보고자 했다.
“설마, 그래서 찼냐?”
“이것도 찬 건가. 그게 고백이긴 한가?”
진정에 개뿔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답변이었다.
“뭐라 했는데?”
“좋아하는 거 같다 길래 확실해지면 말하라,”
“돌았냐?”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아침 드라마에도 안 나올 막장인가. 돌았냐는 악에 찬 외침 이후 둘 사이엔 적막만 흘렀다.
“…설마 너 전에 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아무리 뭐가 답인지 모르겠어도 그렇게 벽부터 치진 마라.”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좋다, 좋다 했을 때랑 지금이랑 비교해봐. 남들한테 틈도 안내주던 애가 여기저기 여지주면서 받아주고 있으면서도 뭔 답이 필요해. 특히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 물어보는 거, 이건 정말 너답지 않네.”
가까이서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안타까웠다. 사람이 변하는 무수히 많은 이유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일 텐데. 실패했던 첫 연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밀려오는 사랑을 밀어내는 모습이 답답했다.
“이제연. 너 고작 그 사람이랑 지냈던 시간 떠올리는데도 입 꼬리 올라가는 건 모르지. 제일 큰 변화라면 변화고, 확실한 답이라면 답이다. 이제 끝.”
틀린 말 하나 없는 마지막 말을 마치곤 승원은 가게 밖으로 향했다. 담배 피는데 시간 걸리니까 잠깐만 더 앉아있다 나가자. 넋 놓고 있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 계획 없고 생각 없는 실패한 사람들이나 대는 거라 생각했던 핑계.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승원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거 잘 안다. 그리고 제가 여름을 사랑하는 건지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노답, 나사 빠진 미친놈, 정신 나간 새끼가 되어가는 스스로가 싫지 않다는 거다. 저와는 정반대 성향의 상대방에게 동화라도 되어가는 것 마냥.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여태 사랑이 아니라 부정해왔던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누가 미리 알려주면 좋을 텐데. 위기 상황 대처법, 재난 대처법, 응급 처치법, 수많은 매뉴얼들처럼 이 타이밍을 눈 여겨 봐야 한다고, 이때가 제일 피크라고, 그 순간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그래서 내가 좀 더 널 따스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