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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한여름의 치기
작가 : 이소이
작품등록일 : 2020.8.18

사랑이 가장 청량하게 빛날 수 있는 계절 여름, 그리고 그런 여름에 걸맞게 다채로운 선물들을 선사할 하동.

우리 모두가 각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듯 사랑에는, 삶에는 참 다양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저 예쁜 풍경이 좋아서 기대를 끌어안고 향한 여름이와 어디든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떠난 제연이처럼요.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여태 살아온 삶과는 다른 결의 선택,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에 있는 그대로 반응 하는 것. 이걸 단순히 한여름의 치기라 치부해도 되는 건가요?

여러분은 언제 사랑을 느끼시나요? 또, 여러분의 사랑이 담고 있는 온기와 의미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요? 한 순간에 지나가버린 여름이 잠시나마 푸르르고 찬란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이곳에 제 사랑을 남깁니다.

 
잔잔한 파도
작성일 : 20-09-30 21:47     조회 : 278     추천 : 0     분량 : 5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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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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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제연은 여름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나오면 안 될 사람이 나온 거 같은 표정이네요?”

 “당연한 말 하지 마.”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여름의 고백 아닌 고백 이후로 저도 모르게 여름을 막게 됐다. 정작 본인도 정확히 뭐에 대한 반사적 반응인지 잘 몰랐다. 그저 몸이 하는 반응이었다.

 “손해 보는 것도 없으면서. 잃는 장사는 아니잖아요.”

  여름은 이렇게 말한 뒤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벌써 5분이나 지난 거 알아요? 맨날 알림시계만큼 정확히 출발했잖아요.”

  딱히 답변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지각이에요. 얼른 가요, 출발!”

  씩씩하게 아침 운동을 하러 앞장서 가는 여름을 보며 체념했다. 하긴 제가 밀어냈다고 밀려날 사람이었으면 애진작 이미 떨어져나갔겠지. 제연은 이틀 만에 포기했다. 밀어낼 수 없다면 제가 밀려가지만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젠 여름의 숙소–물론 여름은 들을 때마다 집이라고 정정했다.- 마당에 있는 평상이 살아온 고향만큼이나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제연이 머무는 숙소에 마당이 없냐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더 넓은 마당이 있었다. 차도 몇 대 주차할 수 있을 만큼의 넓은 공간이었다. 다만, 여름의 집 마당은 정말 집 안에 있는 느낌이 강하다면, 제연의 숙소 앞은 공터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보니 부담 없이 앉아있을 수 있는 장소로 여름의 평상을 찾게 됐다.

 “오늘은 뭐 할까요?”

  여름은 엎드려 누운 자세로 다리를 휘적이고 있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떠오르는 건 없는데, 왜요?”

 “하고 싶은 거 있어서 물어본 건가 해서.”

  제연을 쳐다보기 위해 턱을 꽃받침 손으로 받쳤다. 옆에서 다리를 쭉 뻗고 두 손을 짚고 있던 제연이 아무렇지 않게 눈을 마주 봤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럼 우리 30분만 쉬고 생각해봐요.”

  말이 쉬는 거지 그 시간동안 핸드폰을 하다 이것저것 검색하고 있을 서로의 모습이 빤했다. 그래서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동안 정적 속에서 서로 핸드폰만 보고 있었을까 갑자기 여름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제연은 놀란 기색도 없이 물었다. 왜.

 “와 바다 대박. 이것 좀 봐요.”

  여름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보고 있던 sns 게시물을 제연에게 보여줬다.

 “시원해보이네.”

 “너무 예쁘지 않아요? 다들 여름이라 바닷가 놀러 가나 봐요.”

  마치 바다 영상이 여름을 홀리기라도 한 듯 했다. 해시태그를 타고 넘어가 수많은 바다 사진과 영상을 보는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우리 바닷가 갈래요?”

  언제 가자는 말은 없길래 언젠가 가자는 말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연은 그 경솔했던 반응을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하동에도 바다가 있어요! 다도해가 제일 가까운 거 같은데, 다들 일출이나 석양 보러 갔다는 거 보면 바닷가 주변에는 못가는 거겠죠?”

  신이 나서 검색하는 모습이 누가 봐도 지금 당장 가겠다는 의지로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 꽤 걸릴 텐데. 오늘은 섬진강에 자전거 타러 가는 게 어때?”

 “섬진강도 예쁘긴 한데, 그래도 강이잖아요. 바다 보고 싶은데….”

  시무룩하게 쳐진 눈가와 내려간 입 꼬리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잘못한 것만 같은 이 느낌.

 “그럼 제대로 알아보고 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바다에 가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하동이 정말 넓었으며, 제연과 여름이 머물고 있는 곳은 지리산 가까운 곳이었기에 바다와 먼 편에 속했다. 버스타고 가는 방법을 알아보면 최소 1번은 환승을 해야 했고, 예상 소요시간이 대략 3시간이었다. 말이 3시간이지 버스 시간표나 배차를 생각했을 때 하루를 꼴딱 걸려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둘은 처음으로 사치를 누려보기로 했다. 이곳의 속도에 맞춰 항상 느긋하게 천천히 시간을 쏟아 부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고작 며칠 남은 시간 중 하루 가까이를 이동하느라 쓰면 그건 좀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았다.

  제연이 최대한 정확한 버스 시간들을 알아볼 동안, 여름은 슬금슬금 부엌으로 향했다. 버스 회사에 전화하다 말고 집 안에 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대충 들고 있던 머그잔을 흔들었다. 마실 거 가지러 간다 생각하겠지? 그러곤 부엌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주머니께 전화했다. 콜택시를 부르기 위해서.

 “저 여름인데요. 전에 아주머니 아시는 분이 택시 기사님이니까 멀리 나갈 일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전화를 받자마자 급한 듯 와다다 쏟아지는 멘트에 아주머니는 휴대폰을 더 꼭 쥐고 여름의 말에 집중했다.

 “어디 나가게?”

 “네. 바다 다녀오려고 했는데 버스 타고는 오늘 하루 다 써야 겨우 도착할 거 같아서 택시 타고 다녀오려고요.”

 “어휴, 그럼 그럼. 차가 편하지. 언제 출발해?”

 “최대한 빠르면 좋긴 한데, 제가 통화하는 게 나을까요? 연락처 알려주시면 연락해볼게요!”

 “아냐. 그럼 바로 와 달라 할게. 집 앞 버스 정류장으로 오라 할 거니까 문자 주는 대로 내려가.”

 “정말 감사해요! 제가 가서 바다 사진 많이 찍어 올게요.”

  아주머니가 앞에 계신 것도 아닌데 감사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던 여름이 기분 좋게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뛰어 나갔다.

 “저희 바다 가요! 차타고!”

 

 “바다 냄새. 진짜 바다예요!”

  기사님께도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하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열심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바다 냄새를 맡았다. 여름이 두고 내린 가방을 챙겨 내린 제연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바닷가로 향했다.

 “역시 바다 한 번은 봐줘야 여름 같아요.”

 “매년 봤어?”

  배알도 해수욕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둘은 따로 별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발이 푹푹 파이는 모래사장이 아니라 바다 가까이 걸어도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거나 신발이 더러워지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본 거 같아요. 근데 전 겨울바다가 더 좋아요.”

 “춥잖아.”

 “그래도 겨울바다만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있어요. 확실히 사람도 적어서 조용하고, 되게 좋아요.”

 “여름바다도 되게 조용한데?”

  그렇네요. 여름바다가 이렇게 조용할 수도 있구나. 작게 중얼거린 여름이 배시시 웃었다. 이젠 제연이 건네는 농담을 농담으로 구분하고 웃을 수 있었다.

 “앉을까?”

  몇 번이고 왔다갔다 바닷가를 거닐다 먼저 물었다. 마침 여름도 앉아있자고 말하려던 참이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파도가 얼마 안치네요.”

  그렇게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걸터앉아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었을까 조곤조곤 내뱉는 말에 여름의 눈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게. 강 같네.”

  확실히 이곳은 바다라고 하기엔 많이 잔잔했다. 흔히 바다 하면 떠올릴만한 파도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실제로 파도치는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바다는 바다예요. 눈에 안보일 뿐이지 쉴 새 없이 계속 파도치고 있잖아요.”

  여름은 전과는 달리 확신에 찬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아주 가끔 그게 위로가 될 때가 있어요. 바다의 잔잔함은 사실 꾸준한 노력의 결과물이에요. 언제든 크게 파도를 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잖아요. 꼭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닮았어요.”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하는 것도 불가능해 대화에 좀 더 집중하던 제연이 움찔했다. 가슴께가 따끔따끔 찔리는 것 같았다. 뭐든 이 악물고 이뤄낼 때까지 달려드는 내 눈에 참 쉬워 보이고 잔잔해 보이는 네 삶도 그렇겠지.

 “꼭 대단하다 인정받는 삶을 살지 않아도 괜찮은 거 같아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칭찬하고 치켜세워도 내가 내 잔잔함을 돌아볼 줄 모르면,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제연은 말없이 여름이 전하는 말들을 곱씹으며 담아냈다.

 “스스로 대단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내 잔잔함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 그때까지 기다려주는 때도 있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잔잔함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며 내 상황과 맞물릴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제연의 삶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표가 있다면 당장 스타트 라인에 서 전력 질주를 시작하는 게 당연한 삶이었다. 여름의 말들이 다른 나라 말처럼 까마득하게 들리다가도 어느 한 부분을 쿡쿡 쑤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먹먹했다.

 “고요하게 흘러 윤슬이 표면을 가득 채운 강도 좋고,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파도치는 바다도 좋아요. 근데 오늘은 왠지 바다가 너무 보고 싶은 날이었어요.”

  그냥. 이유 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을 보여주고 싶어서. 역동적이기만 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제연에게 남아있는 하동에서의 시간이 적어 줄 수 있는 무형의 것들을 더 많이, 더 짙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집인 걸 알면서도 바다에 오자고 졸랐다. 말을 다 마치곤 앉아있던 곳에서 폴짝 내려가 손바닥을 탁탁 털던 여름이 항상 그랬듯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위로치곤 참 미적지근하다. 따뜻한 마음과 찬 바다가 섞이면 이런 미지근함이 되는 건지. 동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뜻했다던 여름의 말이 떠올랐다. 각자가 저마다의 온도로 살아가듯 위로도 그럴까? 너에겐 넘치도록 다정하고 따스한 것들이 위로로 느껴지지만, 나에겐 적당한 온도로 스며드는 이 미지근함이 위로로 받아들여지는 걸까?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그때, 나 하동에서 속상해서 엄청 울었던 날. 날씨 엄청 좋았는데 우산은 왜 들고 가고 있었어?”

 “다원에 재배가시는 할머니가 쓰시던 우산이 고장 났다고 주인아저씨가 우산 있으면 양산으로 쓰시라고 하루만 빌려드리라고 하셔서.”

 “뭐야, 진짜 웃기다. 차밭에서 빨간 우산이면 완전 크리스마스네.”

 “다행이지. 그날이 딱 한여름 서러움 폭발했던 때라. 하마타면 혼자 힘들어하다 끝났을 뻔 했잖아.”

 “아닐 걸? 꼭 그날이 아니었어도 넌 분명 그날만큼 벅찬 위로를 건넸을 거야. 내가 보고, 겪은 이제연은 그래.”

 

 

  기왕 바다에 온 김에 해산물을 잔뜩 먹고 돌아가자는 여름의 제안에 횟집에 갔다. 자연스럽게 메뉴를 주문하고 주먹밥을 동글동글 말고 있는 여름을 보다 물었다.

 “겨울바다가 좋다 했잖아.”

 “네. 완전 좋죠?”

 “그럼 겨울을 제일 좋아해?”

 “어떻게 알았어요? 다들 여름이는 이름부터 여름이니까 제일 좋아하는 계절도 여름이겠네 그러던데.”

  정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먹밥을 말던 손마저 그대로 굳은 채 종알종알 말하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그럴 거 같았어.”

 “신기하죠.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고, 손꼽아 기다리는 계절은 봄이에요. 계절 냄새 중에는 가을 제일 좋아해요.”

 “봄을 왜 기다리는데?”

 “풍등축제 있어서요. 처음 풍등축제 본 건 태국에서였는데, 디즈니 영화 주인공이 된 것처럼 너무 완벽한 풍경인 거예요. 그래서 매번 그때 사진 보면서 아쉬운 마음 달래곤 했거든요.”

 “응.”

 “근데 한국에도 있는 거 있죠? 대구에서 매년 해요. 알게 된 뒤로는 매년 봄마다 대구에 풍등축제 보러 가고 있어요.”

  여름이 흥미롭게 말하는 것들은 이상하게 관심을 끌었다. 근데 그게 꼭 여름이 좋다는 것들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보는 여름의 눈빛과 표정이 궁금해서였다. 그토록 좋아서 매년 설렘으로 기다린다는 풍등축제를 볼 때의 너는 어떤 모습일까. 여태 봤던 어떤 모습보다도 황홀한 표정을 지을까.

 “아무튼 그래서 전 사계예요. 사계절 전부 다 담고 있으니까?”

 “응. 그런 거 같네.”

 “엥? 보통 말하면 다들 웃던데, 그렇게 순순히 인정하니까 민망하잖아요.”

  머릿속을 채웠던 잡생각들을 떨쳐낸 제연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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