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어느 날
비가 내린다. 마치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생긴 듯 쏟아진다. 세상도 잿빛이다. 만약 색이 하나둘 사라진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온통 회색빛이다. 내가 태어난 도시를 닮았네. …지금의 나도, 닮았네.
Q. 유달리 기분이 축 늘어지고 쳐지는 날, 보통 그 이유가 뭐였나요?
A.
-천둥번개 치고, 하늘이 무너져라 비가 쏟아지는 날.
-머피의 법칙처럼 안 좋은 일만 잔뜩 생겨서.
-생리통이 심한 편이라 생리하는 날이면 항상 그래요.
-시간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상관없이 무언가가 너무 그리울 때.
-나와 관련된 것들(성격, 가치관, 맡고 있는 일, 결과물 등)이 가치 없게 여겨져 나도 그런 것만 같을 때.
이 모든 게 동시에 찾아온다면 어떨까?
물어 뭐해. 지금의 여름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번에 휘몰아친 아픔들에 여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약을 하루에 한 통 다 먹어도 아픔이 가시지 않는 심각한 생리통에 몸져누운 건 약과였다는 듯 아침에 낑낑 거리며 일어나 불을 켜는 순간 전구가 나갔다. 전구를 찾으러 나가는 길엔 평소 걸리적거리지도 않던 문지방에 걸려 넘어졌고, 차를 마시려 찻잔을 들고 테이블로 가다 손에 힘이 풀려 손에 갓 우린 뜨거운 차를 전부 쏟은 것도 모자라 아끼던 찻잔도 산산조각 났다. 그 뒤로도 아파서 누워있다 잠들려고만 하면 모기 소리에 깨고, 평상에나 나가있을까 하고 책을 들고 나왔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덕분에 아픈 몸으로 평상에 뒀던 담요 빨래나 열심히 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눈물 날 거 같았는데, 과사에서 온 전화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슬퍼할 힘조차 다 빠져버렸다.
“그래서 여름 학생이 그때 진행했던 과 프로젝트 협력 업체에 연락해서 담당자랑 의견 조율을 해보셔야 할 거 같아요.”
“사전에 협의했던 부분들도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거죠?”
“네. 업체에서 갑자기 말을 바꾸더니 이것저것 변동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해서요.”
“통화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서울을 뜨기 전 이미 다 끝내놨던 일이 3주 가까이 지난 시점에 꼬여가고 있다는 걸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꾸역꾸역 감정을 억누르고 업체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는데 또 연락이 왔다.
“여름아 진짜 미안한데, 우리 학교 홍보팀이랑 컨텐츠 만들었던 거 있잖아. 그거 명부랑 활동내역 홍보팀에 넘긴 거 맞아?”
“응. 내가 다 정리하고 마지막에 추가해야 하는 부분은 선배가 해주시기로 해서 학회장 선배한테 넘겼는데?”
“그게, 홍보팀에 안 갔대. 근데 학회장 선배는 네가 그거 담당이었다고 그래서 다들 완전 난리야. 그럼 학회장 선배가 안 보내놓고 너한테 덤탱이 씌운 거야?”
“…나 진짜 보냈어. 심지어 그거 선배가 추가된 부분은 직접 작성하시겠다고 내용도 나한테 알려주신 적 없단 말이야.”
같은 학회 동기한테 온 전화는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멘탈을 가루가 되도록 부수는데 제격이었다. 인도네시아에 가서도 2년간 흔한 향수병 한 번 앓지 않았던 여름인데, 갑자기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서러워졌다. 이젠 하다하다 내가 문제인 것만 같다. 이런 힘든 일, 억울한 일, 아픈 일이 나에게만 휘몰아치는 게 꼭 ‘네가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하고 무너질 때까지 밀어붙이는 것처럼 느껴져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싫어졌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몸을 한껏 웅크린 채 하염없이 울던 여름은 그렇게 울다 지쳐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뜬 여름은 어제 왔던 비가 정말 단순 소나기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맑은 날씨에 버스정류장 근처 길이라도 산책삼아 걸을까 싶었다. 그렇게라도 안하면 밑바닥까지 무너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라,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정작 밖에 나왔는데, 그닥 의욕도 없었다. 돌아다녀야지 싶은데 움직일 힘은 없고 걷기도 싫어서 내려가는 길에 보인 풀밭 근처에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그 상태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고스란히 눈에 담기는 하늘. 평소엔 맑은 날 하늘이 예쁘게만 느껴졌는데, 왜 오늘따라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참 이상한 일이다. 무엇이든 바라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 보인다. 그런 면에선 하늘도 좀 억울한 거 아닌가? 너도 네 상태 따위 아무도 중요하게 여겨주지 않는 구나? 드라마에서 실연당한 여주인공이 맑은 하늘 보고 눈물 흘리는 거 세상에서 제일 청승맞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제 꼴이 딱 그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름은 더 초라해졌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힘들어야해. 힘들다는 마음조차 문제인거야?
그렇게 마치 정해진 순리마냥 여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더 이상 잔뜩 고인 눈물이 버티지 못해 눈가를 타고 흐르는 순간이었다.
“비가 오면 좀 피해. 그렇게 무식하게 온 몸으로 맞지 말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제 위로 조용히 빨간 우산이 씌워졌다. 그리고 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쪼그려 앉아 있는 상태에서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는 여름, 그런 여름의 곁에 서서 여름이 보고 있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연. 햇빛이 쨍쨍해 계곡 가에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씨에 둘의 위에 씌워져있는 빨간 우산 하나.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 무슨 비가 온다고……”
누가 봐도 방금 울었다 알려주는 것처럼 코끝이 빨개진 여름이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아닌데. 딱 봐도 지금 천둥번개 치고 비 쏟아지고 있는데.”
여전히 하늘을 빤히 바라보며 태평한 말투로 제연이 답했다.
또 들려온 뚱딴지같은 제연의 말에 대답하기를 포기한 여름이 고개를 푹 숙여 바닥을 쳐다봤다.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조금만 멀리 내다봐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좋아해?”
이제는 시야 한 가득 여름을 담은 제연이 물었다.
“아뇨. 그다지 좋아하진 않아요.”
“그럼 비 맞는 건 좋아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마 둘 사이에서 제연이 먼저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해 취향을 묻는 질문을 던진 건 처음일 거다. 물론 언제쯤 이 사람이 먼저 궁금해 하고, 말을 걸까 기다렸던 건 맞는데, 지금은 타이밍이 좀 별로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멀쩡한 상태일 땐 한 번을 안 던지던 질문을 하필 울어서 눈가고 콧망울이고 다 빨개졌을 때 물어보다니. 마지막에 답할 땐 나 서운한 것 좀 알아달라는 애처럼 입가도 좀 삐죽였다.
“난 네가 비 맞는 거 좋아하는 줄 알았지. 처음 봤을 때도, 지금도 피할 생각조차 없이 흠뻑 젖을 때까지 맞으려고 하길래.”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조금 흐려진 기억을 더듬었다. 제연은 저보고 처음에도, 지금도 온몸을 비에게 내어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는 제연도 똑같다. 이상하게 하나도 상관없는 사람인데 비에 젖지 말라고 호의를 베푼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수 있게 대놓고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돌려 마주보면 애초에 우린 마주칠 일조차 없는 사이라는 것처럼 함께 눈을 맞추지도 않는다. 그리고 전하지는 못하는 말이지만 비 맞는 걸 좋아하진 않아도 그게 죽어라 피하고 싶은 일이라곤 생각해본 적 없다. 나를 내어주는 게 어디 꼭 나쁜 일이기만 하던가.
“인생에 먹구름이 껴서 비가 쏟아지면 도망쳐도 되니까 누구보다 먼저 움직여서 피해. 왜 젖어주고 있어? 누가 너한테 무조건 다 받아들이래?”
근데 이 사람은 아니라고 나한테 말한다. 도망갈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지 말라고, 젖어서 잉크가 번져버린 종이처럼 속절없이 주변 색에 물들지 말라고, 그럴 수도 있지 하며 그러려니 수긍하지 말라고 한다.
“세상이 멍청하게 감당하는 것조차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면, 너는 당차게 아니라 말해야지. 지금처럼 비 맞기 싫다고 해. 그러니까,”
처음이었다. 항상 괜찮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살아가는 여름에게 그건 괜찮지 않은 거라고 말해준 사람은. 그래서 울 것 같았다. 누군가 툭 치면 그동안 쌓였던 모든 걸 쏟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서러움이 물밀 듯 올라 찼다. 그런 여름에게 눈빛으로, 잔잔한 공기의 흐름으로, 내뱉는 모든 숨으로 위로를 건네던 제연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네가 살아가는 세상까진 내어주지 말라는 얘기야.”
적어도 너로 살아갈 수 있는 순간은 욕심내야지. 모두가 그렇게 살잖아. 그렇게 살 자격 없는 사람 없잖아.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막을 자격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잖아.
말하고 있는 제연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건 누구에게 건네는 말일까. 너에게? 머리로만 알고 있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나에게? 아니면 혹시 우리 둘 다에게 일까?
“…정 못하겠으면, 그 빗속에서 같이 우산 들고 있어줄 사람 한 명쯤 곁에 두고 살아.”
여름은 조금 뜬금없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산을 들고 함께해 줄 사람이 꼭 제연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몰래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이 사람이 앞으로도 제 인생에 내리는 빗속에서 제 머리 위로 우산을 펼쳐 들고,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위로의 말들을 전하게 해주세요.’
제연도 동시에 뜬 구름 같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빨간 우산 아래에 같이 서있으니까, 얘한테는 하나도 울지 않은 내 얼굴도 붉어 보이지 않을까.’
의도치 않게 울어서 붉어진 여름의 얼굴을 숨겨준 우산에게 고마웠다. 혹시 다음에도 서럽게 울 때가 있다면 그때도 내가 빨간 우산을 펼쳐 널 감춰줄 수 있는 타이밍이었으면 좋겠다고, 이때만큼은 제연의 인생에서 쉽게 내어주지 않는 다음을 내어준 것도 같다.
2020년 10월 어느 날
때때로 너무 예쁜 곡이라, 너무 소중한 노래라 슬픈 감정을 묻히기 싫은 순간이 있다. 인간이 가장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하는 1위가 향이라면, 그 다음을 잇는 건 아마 음악이 아닐까 싶다. 그 음악을 한창 즐겨듣던 때의 감정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때 묻지 않은 그대로 남아 아주 먼 훗날 다시 오랜만에 들었을 때 물 밀 듯 밀려들어온다. 그걸 느꼈던 순간이 꽤 많기에, 꼭 지키고 싶은 몇몇 곡들이 있다. 의도적으로라도 신나고 기분이 좋은, 행복이 넘치는 순간에만 들어서 아끼고 아끼는 추억들만 꾹꾹 눌러 담고 싶은 그런 곡들. 욕심내는 거라 하더라도 기꺼이 욕심내서 지키고 싶은 곡들.
그래서 이 곡을 들으면서는 절대 울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 근데……”
진짜 서럽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도 모르겠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서러웠다. 그 와중에도 이 곡을 들었을 때의 행복한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올라서 더 서러웠다. 이러다, 정말 이러다 나중에 이 곡을 다시 찾았을 때 서럽게 울던 기억이 행복했던 기억을 다 망쳐놓은 상태면 어떡하지. 어렴풋이 두려웠다.
“실컷 아닌 척 하더니. 많이 힘들었나 보네.”
여름은 제 앞에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만 쉴 새 없이 흘리는 의영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울고 있는 의영이가, 자신조차 울음이 터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의영이가 낯설지 않았다. 그건 불과 얼마 전 본인의 모습이었다. 네 편 좀 들어주지. 왜 그렇게 매몰차게 굴어. 그러다 지쳐서 상처받는 건 너면서. 전부 다 눌러 참고 괜찮다 되뇌던 순간에도 끊임없이 잔 상처들이 생겼을 텐데, 결국 버팅기다 흉터까지 크고 진하게 남아버린 제 친구. 그리고 나.
그래서 여름은 그렇게 지니고 있는 모든 아픔을 눈물로 흘려보낼 때까지 더 따스하게, 더 포근하게, 더 품 안 가득 의영을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흉터를 품은 채 살아간다. 모양과 위치, 생긴 시기 그 모든 건 각자 다르지만, 흉터 하나 없이 깔끔한 사람은 없다. 어딘가에 감춰져 있을 뿐이다.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살면서 흉터가 생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 짧은 순간에 무언가 성과를 이루려 하면 역으로 더 안 좋은 결과만 불러일으켜 원하던 모습과 더 멀어지는 것처럼 삶에서도 지름길, 비법, 공식 그런 거 전부 소용없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욕심내서 비는 건,
여태 자신만 탓하느라 길고 긴 시간동안 잔잔히 힘들어하며 살아온 네가 한 순간만이라도 스스로를 귀하다 여기기를. 깊게 사무친 아픔을 지닌 채로 삶을 버텨온 세상의 수많은 여름이가, 의영이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품어지기를. 언젠가 한 번은 세상도 너를 위해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