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웬만한 시간은 전부 복작복작 참 사람이 많고, 정신없이, 쉴 새 없이 달리기만 하는 도시에서 살아와서 이런 한적한 시골마을의 고요한 버스 정류장을 겪어보는 건 매번 색다르게 느껴졌다. 하동에 막 왔던 초반엔 기다리는 시간이 막막했는데, 어느덧 이런 생활도 익숙해졌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면 느긋하게 풀밭의 풀꽃들을 손끝에 스쳐보며 걸어갔다. 맑은 날씨면 감탄이 나올 만큼 예쁜 하늘을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소박한 행복으로 자리 잡은 것들이었다.
여름은 이래서 좋다. 온통 푸르른 풀밭과 나무, 싱그러운 자연의 소리들, 어떤 계절보다 풍경과 잘 어우러지는 하늘의 푸른 빛. 그 모든 게 미소를 불러일으키는 계절. 매년 여름을 겪으며 생각했다. 제 이름과 같은 계절이 주는 모든 감정, 생각, 느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많은 것들을 똑 닮은 삶을 살고 싶다고. 나를 겪어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짧은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여름을 닮았다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정류장 의자에 앉아 양손을 다리 밑에 넣고 다리를 앞뒤로 흔들흔들 거리며 피식 웃는 순간, 익숙한 인영이 가까워져 왔다.
“어? 오늘 어디 나가요?”
역시 운이 좋았다. 오늘 마주칠 거라곤 기대도 안했는데. 여름은 남몰래 아까 풀밭에서 마주친 세잎 클로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잠깐 나갔다 오려고.”
뱉은 말이 정말이라고 보여주기라도 하듯 제연은 머리 위로 모자를 푹 눌러쓴 채였다.
“잠깐 나가요? 그럼 어디 갈지는 안정한 거예요?”
“버스 곧 올 거 같길래.”
“아 일단 타 본다는 거구나?”
이상하게 여름이 보기에 제연은 계획이 없다는 말을 제 입으로 발음하는 걸 어려워하는 거 같았다. 처음엔 저게 뭔 딴 소리야, 대답이 어딘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하나씩 익숙해져가는 하동에서의 삶 속에서 이것 또한 익숙해졌다. 그렇게 본인 입으로 말하는 게 어려운가? 정 그러면 내가 말해주면 되는 거지 뭐. 여름다운 생각이었다.
예정 없이 마주쳐 기분이 좋았다. 매일 만나자고 약속을 해둔 것도 아니다보니 요 며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제연에 늘어져라 늦잠도 자고, 다도 체험 수업도 열심히 하고, 남은 시간엔 평상에 누워 그간 찍었던 사진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 지냈다. 조금은 무료한 일상.
얼마나 오래 못 봤다고 괜히 옆에 제연이 있는 게 낯설었다. 그런 여름을 눈치 챈 제연은 조용히 물었다.
“왜.”
“…아뇨, 그냥. 어디서 내릴 거예요?”
“넌 어디 가?”
“저요? 저는 도서관이요.”
“어디서 내려?”
“군청앞이요. 같이 가려고요?”
대답 없이 여름을 빤히 쳐다봤다. 그에 여름은 본인이 말실수를 했나 싶었다.
“응. 같이 가.”
한참 뒤에야 답변이 들려왔다. 아무렴 답을 했으면 됐지. 여름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와, 여기 먹고 싶은 거 다 있어요.”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 올 때쯤 두 손을 다 창문에 붙이고 얼굴마저 붙을 듯 창문 가까이 댄 여름이 말했다.
“시내니까.”
그에 창밖을 슥 둘러본 제연이 덤덤히 덧붙였다.
“우리 도서관 갔다가 저녁 먹고 가요!”
“뭐 먹고 싶은데?”
“음…, 햄버거?”
“그래.”
“그럼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먹고 가면 안돼요?”
“그러자.”
벌써 신난 듯 한껏 들뜬 여름을 보는 제연이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하차 벨을 눌렀다.
“내려야 돼.”
뒤늦게 허둥지둥 대던 여름이 이미 자신이 들고 탔던 가방을 팔에 끼고 하차 문으로 향하던 제연을 보고 서둘러 버스를 내렸다. 버스를 30분 정도 타고 왔지만, 정류장에서 도서관까지 1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물론 하동 살이에 익숙해진 둘에게 10분 걷기는 문제도 아니었다.
“근데 무슨 책 읽을 거예요?”
“보고.”
들뜬 목소리로 허밍을 하던 여름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름과 함께하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도서관이 있다는 얘기에 오긴 했는데, 책이 적게 있거나 그렇진 않겠죠?”
“있을만한 건 다 있을 거야.”
“저는 괜찮은데, 혹시 괜히 왔다 생각할까봐 그렇죠.”
“괜찮아.”
상대방을 챙기며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위해주는 말들도 끊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도서관은 컸다.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던 도서관에 여름은 읽고 싶던 책을 원 없이 읽었다. 또, 예상치 못한 기억도 남겼다.
“여름아.”
검색대에서 찾고 싶은 책을 검색하고 청구기호를 받아 적은 여름이 온통 노란 라벨 스티커로 가득한 책장으로 향했다. 개나리밭 같기도 하고, 유채꽃밭 같기도 한 분류번호. 여름의 애정이 가장 많이 담겨있는 분야. 덕분에 여름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도 6이다. 자신을 둘러싼 온통 노란 라벨이 가득한 세상에 정신이 팔린 여름은 제연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름.”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탓에 다시금 작게 불렀으나 그 소리를 여름이 들었을 리 만무했다.
“한여름.”
또 다시 불렀을 때조차 여름이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한 제연이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남색 빛이 가득하던 세상에서, 싱그러운 연두빛깔을 지닌 푸릇푸릇한 세상을 지나 도서관에서 가장 밝은 노란 빛깔 세상으로. 그렇게 여름이 서있는 책장 너머로 가까이 갔을 때,
“여름아.”
눈빛을 빛내며 집중해서 마치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것 같은 여름의 모습이 시야에 찼다.
“…”
제연은 여름을 다시 부르지 못했다. 책장을 가운데 두고 마주 서있는 둘. 높이가 낮은 책들이 있어 맞은편이 보이는 틈을 통해 빤히 눈빛을 보내는 제연. 옆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 따스한 햇빛의 색감으로 뒤덮인 여름. 꿈결 같은 장면.
그렇게 제연은 오랫동안 멈춰 여름을 바라보다 조용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여름이 고개만 돌리면 곧바로 눈이 마주칠 위치였다. 그냥 더 시선이 머무르게 두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넣어뒀던 이어폰도 꺼내 연결했다. 얼마 전 쓰던 무선 이어폰이 고장 나서 요즘 줄 이어폰을 다시 쓰고 있었다.
그렇게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는 여름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하는 걸 반복해 몸이 뻐근하다 느껴졌을 때쯤 여름이 저를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책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자신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려 비스듬히 책장에 기댄 채로. 창틀에 걸터앉듯 기대 서있는 제연을 한가득 담던 여름은 꿈만 같았다.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제연의 머리칼까지 밝았다. 예쁘다. 지금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는 우리 모습. 분명 나중에 떠올려도 예쁘겠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전부 담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주보고 서있는 둘 주위로 온통 노랑으로 물들어있는 공간과 이곳에 녹아들 듯 따스한 햇빛을 담아 노란빛에 물들어버린 서로에 결국 여름은 통통 튀는 색을 닮은 웃음을 내비쳤다.
하동에 머무를 날이 한참 남았기에 조만간 또 도서관에 올 생각으로 책을 빌렸다. 물론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제연은 빈손이었다. 그렇게 여름의 가방만 두둑히 무거워진 채로 저녁을 먹으러 걸어가는 중이었다. 도서관을 나서 버스를 타고 오며 봤던 햄버거 집으로 향하는 길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대충 시계를 확인하니 하교 시간이었다.
“교복 입은 학생들 보는 것도 되게 오랜만이에요.”
고작 몇 년 전 본인의 모습인데, 뭐가 그렇게 감동적인지 아련한 눈빛으로 지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여름이었다. 제연은 별 감흥 없이 걷던 길을 계속 걸을 뿐이었다.
“저때가 정말 예쁜데. 그걸 알까요?”
그냥 다들 살면서 거쳐 오는 시기 아닌가. 말하진 않았으나 제연의 생각은 그랬다.
“꾸미고, 뭘 더하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인 거 같아요. 같은 교복입고 하루 종일 붙어있던 친구들이랑 학교 끝나고 집 가는 모습조차 너무 예뻐요.”
발은 꾸준히 앞을 향해 걷고 있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감회가 새로운 듯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애들은 교복입고 학교 가는 걸 제일 싫어할 텐데.”
“좀만 지나고 성인되면 그리워하게 될 걸요?”
그런 여름이 불안해 몰래 여름이 멘 에코백 가방만 슬쩍슬쩍 잡아당기며 방향을 잡아줬다. 여름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여전히 온 정신이 다 학생들에게 가있었다.
“그리워? 저 때가?”
이젠 아예 에코백 끄트머리를 계속 잡고 있는 상태로 걷던 제연이 여름을 바라봤다. 그렇게도 그리울까. 저렇게 복합적인 감정을 담은 시선을 담고 바라볼 정도로.
“아뇨.”
드디어 학생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닥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까는 미묘한 감정이 한껏 담겨있었다면, 지금은 조금 속상해보였다.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워하는 건, 그리워할게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예요.”
“…”
“전 없어요. 교복입고 친구들이랑 보냈던 저런 시간.”
점점 걷는 속도가 느려져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걸음이 소중하기라도 한 것처럼 찬찬히 발뒤꿈치부터 엄지발가락까지 땅에 대며 걸었다.
“…그럼 부러워?”
“그것도 아뇨. 저런 시간이 없어서 저한테만 있는 시간이 있으니까 안 부러워요. 하나도 안 부럽다 하면 거짓말이라 그냥 안 부러운 걸로 할게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민망해 괜히 팔을 앞뒤로 흔드는 여름에 에코백 끄트머리를 잡고 있던 제연의 손과 여름의 손이 살살 스쳤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
“예를 들면 어떤 거요?”
“교복입고 어딘가를 가본다든지. 그런 거.”
“놀이동산 이런 곳이요? 다들 교복입고 많이 가더라고요.”
둘 다 얼핏 얼핏 스치고 있는 손등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박자에 맞춰 맞닿는 온기가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학교.”
“갈 수 있어요?”
“못 갈 건 뭐야.”
“졸업생도 아니고, 요즘 외부인이 학교 출입하는 거에 되게 예민하잖아요.”
“찾아보면 갈 수 있는 곳 다 있어.”
“제가 들었던 위로 중 제일 좋은 말이었어요.”
제연은 여름의 손을 잡았다. 스쳐서 지나가버리지 않도록 손 안에 여름의 온기를 담았다.
“동정 아니야.”
“알아요.”
“진짜 아니야.”
“진짜 알아요. 동정이라 하기엔 너무 다정했어요.”
저도 모르게 말할 때마다 손에 살짝씩 힘을 줬다. 의도치 않은 강조였다. 그렇게 여름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도 무뎌졌다.
“그리고,”
여름이 꼭 닿아 있는 손을 들어 올렸다. 여름에겐 제연의 손등이, 제연에겐 여름의 손등이 보였다.
“너무 따뜻했어요. 세상에 이런 동정이 어디 있어요.”
현실을 자각한 제연이 당황해 손을 빼내려하자 이번엔 여름이 손을 더 꽉 잡아왔다. 그렇게 다시 손을 내려 방금 전처럼 앞뒤로 팔을 살살 흔들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속도, 같은 온기. 모든 것이 같았던 그 날의 해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