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꿈을 꿨다.
“내가 왜 인도네시아를 가?”
“경험삼아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한동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던 시기에 대한 꿈.
“네가 여름이구나? 어머니께 얘기 많이 들었어.”
“…안녕하세요.”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꼬박 한 달을 후유증에 시달린 이후 떠올리지 않던 꿈의 시간.
“That's the university your homestay friend attends. It's the top 5 university in Indonesia.”
“Really? How smart you are!”
그곳이었기에 꿈꿨던, 꿈꿀 수 있었던 아름답던 추억.
“So, today is the last day.”
“…I'm gonna miss this place so much.”
“But I'm happy to be with you until the end of your life in Indonesia.”
“……I already miss you.”
퇴색될까 두려워 꽁꽁 숨겨 지켜온 내 인생의 전부.
“…It's time to go.”
지금 눈을 뜨면 이 꿈이 끝난다는 걸 알면서도 야속하게 눈꺼풀이 움직였고, 황토 빛 천장이 여름을 맞이했다. 드디어, 비가 멎었다.
“오늘은 다도 손님 예약이 하나 있네.”
“그래요? 드디어 첫 다도 손님맞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여름이 또 칠칠맞게 다도 잔 깨면 큰일인데.”
“에이, 실수는 딱 한 번이죠! 저 그동안 연습 많이 했어요.”
정이 넘치는 주인 아주머니는 싹싹하고 활달한 여름을 마음에 쏙 들어 하셨다. 그래서 여름은 또다시 상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바로 아주머니가 운영하시는 차집의 다도 체험 진행 알바. 말이 알바지 급여를 받는 건 아니었으나 예약이 잡힐 때마다 체험 진행을 해주는 대신 다음달부터 방값을 절반만 받으시겠다는 얘기에 두 팔 벌려 승낙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여름은 나중에 다원에서 찻잎을 재배하는 것도 해보고 싶다며 한 쪽 보조개가 파이게 싱긋 웃었다.
“제가 전에 중국 여행 갔을 때 마셔봤던 차가 있는데요. 그게 진짜 제가 살면서 마셔본 차 중에 제일 맛있었거든요.”
“무슨 차였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을까?”
“메뉴판이 전부 중국어였어서 메뉴판 사진 찍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주문한 거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복숭아차였던 거 같아요.”
“복숭아차? 복숭아차도 나름 종류가 여러 개 있어.”
“백도? 우리나라에서도 백도라고 해요?”
“아아 백도. 그럼 백도라고 하지. 백도차였구나.”
“향도 진짜 좋고, 맛도 되게 부담스럽지 않은 은은한 단맛이었어서 한국 오면 꼭 찾아봐야지 했는데 정작 한국 오고 개강해서 완전 잊어먹고 지냈어요.”
“어쩌나. 우리나라에서는 시중에 나오는 백도차가 없을 텐데. 보통 수입해서 파는 티백이 대부분일 거야.”
“그거 완전 슬픈 소식이네요.”
어느덧 일주일. 매일 아침 아주머니와 마주앉아 잔잔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일상이 되었다. 본래 아침밥을 챙겨먹는 편이 아니라 ‘밥 먹을 시간에 더 자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오전 일찍 눈을 뜰 때마다 늘어져라 발목을 잡지만, 어제 앞으로 여름의 아침을 책임질 친구들도 도착 했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선반 위에서 그릇을 챙겼다.
오늘의 아침밥 메뉴는 된장찌개와 콩나물 무침. 물론 이건 아주머니의 아침밥이고, 여름의 아침밥 메뉴는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쭉 그래놀라 시리얼일 예정이다. 그래놀라 시리얼이 도착하기 전까지 죽어도 밥을 먹기는 부담스럽다고 거절한 여름은 따뜻한 차 한 잔을 홀짝였었다. 그게 며칠이나 됐다고 따뜻한 차 없는 아침이 어색해 결국 차를 내왔다.
“근데 중국 여행은 어디로 다녀왔어?”
“상해랑 북경이요! 아, 청도도 가봤어요.”
“중국, 여행으로 어때?”
“음…. 나쁘지 않아요! 상해랑 북경은 되게 반짝반짝한 도시여서 좋았고, 청도는 예쁜 풍경이 잔뜩 있는 곳이라 좋았어요.”
대충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으며 학교 앞에 있던 그릭 요거트집이 떠올라 언젠가 그릭 요거트를 만들어 아침으로 먹어야지 생각하던 여름에게 아주머니가 물었다. 전에 어렴풋이 해외에는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하셨던 거 같긴 한데, 그래서인지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여름은 더 신이나 해맑게 대답했다. 마치 엄청나게 재밌는 동화를 전해주고 있을 때의 기분이었다.
“표정만 봐도 좋아 보이네. 또 어디 여행으로 가봤어?”
“어우, 저 여행 엄청 많이 다녀서 다 얘기하면 밤새도 모자라요.”
밝게 웃을 때 슬쩍 들리는 어깨와 쏙 파이는 한 쪽 보조개, 싱긋 접히는 두 눈, 시원하게 올라간 입 꼬리. 여름만이 지닌 한여름 전매특허 사랑스러운 웃음. 아주머니를 향해 그 웃음을 아낌없이 흩뿌린 여름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과 숟가락, 컵을 치웠다.
오늘은 처음으로 지리산에 가는 날이다.
*8월 9일 여름이의 일정 ت
아주머니랑 아침 먹기- 나 홀로 첫 지리산 걷기 도전– 평상에 누워서 넷플 보기- 다도 체험 진행- 자전거 타고 동네 한 바퀴 돌기
오전 8시. 제연은 방문을 활짝 열고, 아침 공기를 맡으며 마당으로 나왔다. 이렇게 나오면 상쾌한 공기를 맡을 수도 있고, 오늘 날씨가 어떤지도 대강 살필 수 있다. 산에서 지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몇 발자국 걸어 다니며 두 팔을 쭉 올려 기지개를 키던 제연은 때마침 마주친 눈에 고양이에게 눈인사도 건넸다.
이제 다시 방에 들어가 간단히 씻고 아침 운동을 다녀올 차례다. 방에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며 문 옆 고리에 걸려있는 모자를 눌러 썼다. 자동으로 부엌에 발이 향하고 지난 밤 얼려둔 작은 페트병을 챙긴 뒤,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기 전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은 후 끈도 한 번 다시 묶었다. 그렇게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이고 나면 대략 8시 30분. 슬슬 숙소에서 나와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말이 거창하게 아침 운동이지 실질적으론 그냥 숙소 근처 길 걷기나 마찬가지이긴 했다. 물론 그 숙소가 지리산 둘레길 근처에 위치해 있어 산책이라기엔 이러나저러나 산행이었지만. 어김없이 이어폰을 꽂고 묵묵히 길을 걷다보니 목표지점으로 찍고 돌아오는 곳이 저 멀리 슬쩍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쩜 이리 생존신고를 자주도 해주는지 웬수같은 단기 세입자한테 연락이 왔다.
“이제연 샴푸 새 거 어디 있냐?”
“너 또 뭐 부시니? 방금 들린 소리 뭐야.”
전화를 수락한다는 초록 동그라미를 터치하자마자 반기는 건, 역시나 요란한 제 친구의 소리와 함께 들리는 우당탕 소리였다. 우당탕 소리? 하……. 내가 누구한테 집을 맡기냐. 다시 돌아갔을 때 집안 난장판은 확정이구나.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마 옆쪽을 꾹꾹 눌렀다.
“아니 야. 지금 내가 머리 감으려고 물 다 적셨는데 샴푸가 없어서 매우 급하거든? 새 거 어디 있는데.”
“맡겨놨냐? 생필품은 좀 네가 사서 써라.”
“아이 왜 또 이렇게 각박하게 구실까. 어디 있는데요.”
“세탁기 위 선반. 앞쪽에 있는 거 먼저.”
몇 마디나 나눴다고 벌써 정신머리가 없는 산만함에 제연의 손은 관자놀이에 찰싹 붙어 버렸다. 무의식중에 계속 걸으며 발을 움직이고 있긴 한데,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누르느라 시선은 땅을 향했다.
“아!”
그렇게 여름과 제연은 다시 만났다.
“주승원 해결 됐으면 끊어. 나 지금 통화 어려워. 끊는다.”
앞을 보지 않고 걷던 제연은 가만히 길가에 서있던 여름과 제대로 부딪혔다. 갑자기 세게 부딪혀 살짝 휘청했던 여름은 당황해 뒤를 돌아봤고, 당황스러움이 잔뜩 담겨있는 눈을 마주하자마자 제연은 전화를 끊었다.
“죄송합니다. 통화를 하다 정신이 없어서 앞을 제대로 못 봤어요.”
“…괜찮아요.”
제연은 완벽히 잊은 상태라-정확히는 기억할 필요조차 없었던 일이었기에- 여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여름은 아니었다. 그날 집에 도착해 얼마나 이불을 찼던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너무 창피해 이불킥을 수도 없이 해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은 그때 그 사건의 당사자.
“좀 세게 부딪힌 거 같은데. 다치신 데는 없죠?”
순식간에 여름의 눈동자는 동공지진이 났고, 제연은 뭔가 싶었다. 지금 자기를 쳐다보는 저 눈빛은,
“……혹시 여기 사는 분이세요?”
마치 캠퍼스 내에서 마주칠까 죽어라 피해 다니던 구남친을 볼 때인데. 살면서 딱히 닮은꼴을 들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던 터라 잘못 봤거니 싶었다.
“그건 왜요?”
“전에 우산…. 씌워주셨던 분이랑 닮으셔서요.”
근데 나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인 거 같네.
“이상한 사람은 진짜 아니구요! 저는 서울에서 와서 여기를 잘 몰라서요.”
제가 아무 말이 없자 두 손을 허공에 휘적이며 말하는 걸 보니, 서서히 떠올랐다. 설마 그때 그 버스 안타고 얌전히 우산 안에 있던 리트리버 인간? 제연에게 딱히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라서 오히려 제연은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런 말을 꺼내고 있는가, 나는 왜 이 사람과 지금 대화라는 것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저도 여기 사람 아니에요.”
“정말요? 그럼 놀러 오신 거예요? 하동에는 얼마나 계세요?”
그리고 분명 쳐내려고 했다. 그래서 여기 사람 아니니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의미로 차갑게 대꾸했다. 자신은 맡은 바 역할을 잘 수행했다 자신하는데, 도대체 왜 상대방은 좋아하는 거지? 손뼉을 짝 치고 해맑게 웃으며 조잘조잘 더 많아진 질문을 듣고 있자니 다시 조금씩 골이 아파오는 거 같았다.
정말 장담하는데 본인은 이렇게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걸 즐기는 편이 전혀 아니다. 그럼 평소 치대는 사람을 받아주는 편인가? 그것도 절대 아니다.
“저 여기 오고 타지에서 온 또래 사람은 처음 보거든요. 그럼 대학생이신 거죠?”
“네.”
“저도요! 전 여기 휴학하고 왔어요. 다음 학기 학교 다니실 예정이세요?”
“네.”
“오, 방학동안 계시는 거구나. 여기 계시는 동안 놀러오겠다는 친구 분 있어요?”
“아뇨.”
“저는 제가 여기서 지내는 거 적응될 때까진 오지 말라 했어요. 근데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딱히 적응할게 없더라구요?”
“…”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의도하지 않았고, 원한 적도 없던 상황이었다. 낯가림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지 신나서 말을 걸어오는 이 상황이 정신없어 잠깐 넋 놓고 있었더니 이렇게 됐다.
복작복작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내려가는 길. 하동에 오고 마주했던 나날들 중 처음으로 짙은 여운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