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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한여름의 치기
작가 : 이소이
작품등록일 : 2020.8.18

사랑이 가장 청량하게 빛날 수 있는 계절 여름, 그리고 그런 여름에 걸맞게 다채로운 선물들을 선사할 하동.

우리 모두가 각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듯 사랑에는, 삶에는 참 다양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저 예쁜 풍경이 좋아서 기대를 끌어안고 향한 여름이와 어디든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떠난 제연이처럼요.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여태 살아온 삶과는 다른 결의 선택,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에 있는 그대로 반응 하는 것. 이걸 단순히 한여름의 치기라 치부해도 되는 건가요?

여러분은 언제 사랑을 느끼시나요? 또, 여러분의 사랑이 담고 있는 온기와 의미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요? 한 순간에 지나가버린 여름이 잠시나마 푸르르고 찬란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이곳에 제 사랑을 남깁니다.

 
여름을 재연하게
작성일 : 20-08-18 04:39     조회 : 530     추천 : 0     분량 : 4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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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들아 잘 있어라! 갈게!”

  평화로운 평일. 그것도 참 여유롭고 평화로운 대학생의 방학 중 가장 늘어져있는 날일 월요일. 여름의 집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혹여나 가져가려다 빼뜨린 게 있을까 싶어 나가는 순간까지 집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둘러봤다. 대강 훑어본 후 빼먹은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린 여름은 몸통만한 여행용 크로스백을 메고, 아끼는 24인치 분홍 캐리어까지 야무지게 손에 쥐고 집을 나섰다. 매번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머리는 덜 말라 젖은 상태 그대로였고, 미처 가방에 넣지 못한 자질구레한 짐들은 반대쪽 손에 잔뜩 들려있는 상태였다. 평상시와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오랜 기간 집을 떠나 타지에서 지낼 설렘이 잔뜩 담겨있는 얼굴 정도?

  매사에 모든 일을 닥쳐서 처리하는 탓에 어제 밤늦게까지 집안이 전쟁통이었던걸 떠올리며 피식 웃은 여름은 씩씩하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갈 길이 멀다. 서울 남부터미널로 가는데 대략 한 시간 정도. 그리고 터미널에서 한동안 지낼 새 보금자리인 하동까지 대략 네 시간 정도. 장장 다섯 시간을 몸 포함 거대한 짐 세 개를 들고 향해야 했다. 그래도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신나는 기분을 잔뜩 담은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건, 하동에서 펼쳐질 이야기들이 벌써부터 설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든 하동에서의 모든 시간들은 나에게 특별한 여름날들을 선물해줄 거야. 확신에 찬 생각 덕분이기도 했다.

 

  하동으로 향하는 여름의 선택이 계획되어 있던 것이냐 묻는다면 전혀 아니다. 함께 근무하던 알바생이 퇴사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알바 근무일이 두 배로 늘어버렸고,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과 행사들에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고, 그 덕에 매 방학마다 가던 여행을 단 하루도 다녀오지 못했다. 그래, 이번 방학은 글렀어. 그렇게 지친 상태로 체념하듯 생각하고 있던 와중 거들떠도 안 보던 산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산을 가볼까 고민하다 해외여행 대신 가는 여행이면 기왕 가는 거 멀리 가야지! 해서 남해에 있는 지리산을 택했다. 그 이후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물론 해결되었다기보다는 여름의 일방적이고 즉흥적인 결정들의 결과 값이었다.

  2주 뒤까지 근무하겠다고 점장님께 말씀드리고, 그 2주간 열심히 숙소를 찾았다. 혼자서 지낼만한 민박이어야 하고, 가격도 혼자 내기에 부담이 없어야 하고, 사람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 한적한 위치에 있어야 하고, 숙소 방 개수가 적어 시끄러운 옆방이 당첨될 확률이 낮아야 한다. 하동이 생각보다 넓은 지역이 아니라는 지역적 특성을 생각하면 꽤나 어려운 난이도의 미션이었기에 떠나는 날까지 주어진 14일 중 10일을 숙소 찾기에 날렸다. 전전긍긍 어려움 가운데 헤매던 여름은 숙소 찾기 대장정 11일째에 마음에 쏙 드는 민박을 찾았다. 그리고 그 보금자리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던 나머지 휴학계를 내버렸다. 그렇게 이미 일을 벌려둔 상태에서 민박 사장님께 문의를 넣었다.

 

 ‘안녕하세요. 하동에 한 달 살기 하러 가기로 마음먹은 학생인데, 민박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혹시 달 단위로 숙박비 지불하고 6개월 정도 있어도 괜찮을까요?? 숙박비는 매달 정해주시는 날짜에 한 달 치 입금할게요! 일단 가서 6개월 지내다 괜찮으면 조금 더 연장할 생각도 있습니다! 답장 기다릴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돌아온 답장은 이랬다.

 

 ‘별채 1인실 말하는 거 맞나요? 2일째부터는 하루에 만원씩 연박할인 해줄게요~^^ 하동에는 며칠부터 있을 생각이에요?’

 

  가히 긍정적인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고로 여름은 곧바로 사장님께 한 달 치 숙박비를 송금했다. 계획? 그런 건 하나도 없다. 일단 국내가 아닌가.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택배로 무리 없이 주문 가능한 국내의 장점을 살릴 생각이었다. 언어적인 불편함도 없을 거고, 매일 눈을 뜨면 아름다운 풍경이 반겨줄 거다. 완전 충분해! 내 평생에 이 정도로 완벽한 여름은 없을 거야! 여름은 놀이동산에 처음 가보는 어린 아이만큼이나 방방 뜬 상태였다.

 

 

 “그래서, 어디로 간다고?”

 “하동.”

  곧 주말이 다가오기에 누구나 행복한 날일 금요일. 그것도 모든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대에 제연은 이 시대의 젊은 청춘답게 동네 친구와 함께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하동? 거기가 어딘데? 처음 듣는 곳인데.”

 “있어. 남해에 있는 지역.”

  덤덤하게 오랫동안 다른 지역에 가 있는다고 말하는 제연이나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나 남이 보기에 참 감흥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너 그거 완전 도피성 여행이야. 아니 여행이라는 말도 아깝다. 너도 알지?”

 “응. 근데 그게 왜. 내가 좀 가겠다는데 뭐가 어때서.”

  안주 없이 깡소주 들이붓는 건 스무살 때나 부리는 패기라 생각했는데, 원하는 대로 풀리는 일 없는 세상을 살다보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지경에 다다랐다. 그렇게 한 마디 내뱉고 소주 한 잔 들이키고, 또 한 마디 내뱉고, 소주 한 잔 들이키고를 반복하다 보니 만난 지 한 시간만에 비운 한라산만 3병이었다.

 “그래. 가서 속세랑 연 끊고 지내다 와라. 나쁘진 않겠네.”

  오래 본 친구 사이기에 곧 죽어도 쑥스러운 인사는 건네주지 못할 것 같아 고른 선지는 털털하게 답해주기였다. 겉보기엔 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네 선택을 존중한다는, 그러니 다시 서울에 왔을 때는 덤덤해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위로였다.

 “야 그런 기념으로 감자튀김이라도 좀 시켜봐. 이게 언제적 안주 값 아끼는 찌질이 모드냐?”

  물론 이것도 위로였다. 거름망 없이 전부 직격타로 깡소주에 두들겨 맞고 있을 소중한 내장을 향한 위로.

 

  무식하게 술을 들이부은 것도 1년만이라 제연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눈을 떴다. 오후 3시 45분. 이 시간에 숙취에 허덕이며 일어난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참 바쁘게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 틈 없이 빽빽하던 시간들이 분명 원하는 결과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했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죽어라 공부했던 시간, 입학한 후에 밤새 술을 마시더라도 1교시 강의를 빠짐없이 출석하며 열심히 챙겼던 학점, 남들 다 가는 군대에서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받았던 남들 다 누리지 못하는 포상 휴가. 그래, 고등학교 입시도, 대학교 입시도, 하물며 군대에서의 휴가 쟁취도 전부 성공적이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냐고.

  인터넷에서 최근 유행이라는 주접 댓글을 보고 제연은 웃지 못했다. 정확히는 웃을 수 없었다.

 

 ‘00이라는 완벽한 인생에 유일한 오점이 되고 싶다ㅠ’

 

  누군가에게-아마 제연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우스갯소리일 문장이 제연에게는 현실이었다. 다만, 제연이 오점을 남긴 건지, 제연이 오점이 된 건지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난제로 남아있었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린 제연은 슬금슬금 이불에서 벗어났다. 예매해둔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야 했다. 서울 자취방이야 어제 같이 술에 젖어준 친구 놈이 와서 살겠다 했으니 됐고, 짐을 하나도 안 챙겼는데 어쩌냐. 대강 어제 벗어둔 옷더미들을 발로 휙휙 치우며 화장실에 들어가던 제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옷장 열어서 보이는 옷들 몇 개랑 간단한 세면도구들만 챙겨서 내려가자. 내일부터 짐 싸들고 여기 와서 살 애한테 나머지 짐들 추려서 택배로 보내 달라 하면 되겠지. 숙취로 이미 정신머리가 저 멀리 가출한 거 같으니까 버스 터미널까지는 택시타고 가야겠다. 근데 터미널에서 내려서 숙소까지 가는 길 되게 애매했던 거 같은데 어떻게 가더라. 그건 대강 버스타서 생각해봐도 되겠지?

  열심히 양치질을 하며 자취방 곳곳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을 찾아 큰 백팩에 던지듯이 집어넣은 제연은 대강 어느 정도는 추려진 듯한 짐을 보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그리고 안 봐도 아직까지 뻗어있을게 뻔한 제 친구에게 카톡을 남기며 집을 나섰다.

 

 ‘나 간다. 그동안 더럽히지 말고 잘 치우고 지내.’

 ‘정신없어서 옷 몇 벌만 들고 가니까 내 짐 좀 정리해서 택배로 보내. 필요한 거 톡 할게.’

 ‘이제연님이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름 본인을 위해 고생해줄 단기 세입자를 위해 숙취 해소제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 시절부터 함께 음주 라이프를 살아온 승원의 술 마신 다음날 습관을 아는 탓이었다. 주승원 이 자식 덤벙대다 집안 홀라당 날려먹는 건 아닌가 몰라. 머리에 성의 없이 얹어져 있던 모자를 푹 눌러쓴 제연은 택시를 타기 위해 터덜터덜 큰길가로 향했다.

  이때까지 제연은 모르고 있었다. 완벽한 계획과 그에 따른 계산된 행동들로만 이루어졌던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보낸 노답-제연의 언어 사전은 무계획을 철저히 노답으로 칭해왔다.-의 하루가 하동으로 떠난 첫날이었다는 것을.

  애초에 하동에서의 삶은 시작부터 노답이었다.

 

 

 

  어서오세요.

  이곳은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남해, 그 안에서도 풍성하게 펼쳐진 차 밭과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가, 산의 무성히 푸른 풍경이 조화롭게 함께해 누구에게나 꿈같은 순간을 선물할 지역,

  하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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