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의원의 피살 소식은 도심 곳곳에서 속보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특히나 보는 이조차 위태로움을 느낄 만큼 파격적인 행보를 펼치고 있었던 정치인이었기에 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 속보가 어찌나 빨랐던지, 인성혁과 전혀 상관도 없을 일반인들이 먼저 상세정황을 전해들을 정도였다. 그의 친모인 인경자보다도 더 빨리. 집안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던 경자는 결국 성혁의 사망 소식이 증권가에 지라시로 한 바퀴 돈 후에야 비서를 통해 전해 듣게 되었고,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 사이, 안 변호사와 원장은 평생에 없을 친절을 발휘해 성혁을 살해한 범인의 모습이 담긴 CCTV를 수사팀에 제공했고, 수사팀에서는 범인을 특정하기에 나섰다. 그 수법과 능숙한 솜씨를 보았을 때, 전문 기술을 가진 살인범임이 분명했다. 이에 주류 언론은 성혁의 반대파였던 정치인들의 청부살인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그리고 인터넷 등의 삼류 언론에서는 인성혁의 어머니인 인경자와 척을 진 이들의 보복 살인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그라운드에서 맴돌 뿐, 오피스텔의 꼭대기인 54층까지는 올라오지 못했다. 그곳은 여전히 세상과 동떨어진 듯, 조용하게 멈춰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센서등이 켜졌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그곳에 누군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유진이었다.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 시간이 영겁과도 같았다. 그러나 수연이 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아누비스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그저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곳으로 올라온 걸까. 무슨 배짱으로. 무슨 염치로.
마침내 유진과 수연의 눈이 마주쳤다. 한참의 눈맞춤 끝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유진이었다.
“이제... 다 끝났어요? 복수.”
모든 것을 알아버린 아이의 말은 생각과 달리 침착했다. 분노도 억울함도, 심지어 슬픔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 무심함만이 떠돌 뿐이었다.
“끝이고 말고도 없어. 애초에 멈췄어야 했던 걸 미련하게 붙잡고 있었을 뿐이니까.”
이 복수의 무의미함을 언제 알았을까? 알고보니 아버지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던 때? 알고보니 내가 성도현의 설계 속에서 춤추는 꼭두각시라는 걸 알았을 때? 오로지 복수만을 향해 가는 삶이 너무 힘겨워 모든 걸 끝낼 생각으로 인병철을 죽여 버렸을 때?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복수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다. 부모님이 살해 당한 그날. 그날의 내게 필요했던 건 복수가 아니라 한바탕 펑펑 울며 한풀이를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그 억울하게 죽은 일가의 유가족이라 고래고래 외치고, 매스컴과 대중의 값싼 동정이라도 받으며 부모님과 친구의 시신 앞에서 실컷 울다 혼절하고, 그렇게 요란하게 장례의 세레모니를 치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면 주변 사람들이 말해 줬겠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다 잊으라고. 그래도 된다고.
다만, 내 주변에 있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던지라. 그 사람도 비극적 상황 속에서 망자를 보내는 세레모니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던 사람이었던지라. 둘이 만나 내린 결론이라는 게 울고불며 질척한 한풀이를 대신 냉철한 척 복수를 하는 것이었던지라.
만약에, 정말 만약에. 도현과 수연의 곁에 제대로 된 길로 이끌어줄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우리의 결론은 조금 달라졌을까?
하지만 이 또한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지. 수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남은 건... 너의 복수 뿐이네.”
수연은 유진의 옆으로 가 털썩 주저 앉았다.
“어떡할래?”
순간, 유진의 눈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
“지금까지는 나 혼자 아무것도 해선 안된다는 듯 하나하나 다 가르쳐주고선, 마지막 순간에는 나더러 알아서 하라니...”
“난 네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할머니도, 아저씨도 그랬어요. 모든 일에 이렇게 해야 한다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것 같다가도 정작 중요할 땐 나더러 알아서 하래.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가르쳐 주려면 끝까지 가르쳐 줘야지. 근데 이제는 누나까지 왜 그래요.”
끝내 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끅끅거리며 흐느끼더나 이내 가슴을 쿵쿵 치기 시작했다.
수연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한참을 울던 유진이 마침내 진정될 때까지.
“어디까지 하실 수 있는데요.”
“어디까지라니?”
“죽으라면 죽으실 수 있어요?”
말에 뾰족한 가시가 느껴졌다. 하지만 덕분에 수연은 오히려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죽으라는 말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네가 원한다면.”
“하...”
유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더니, 무엇인가 결심한 듯 수연을 바라봤다.
“누나.”
“응.”
“누나.”
“... 응.”
“누나는 나한테 뭘 원했어요?”
“......”
“내가... 죽기를 바랐어요?”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감옥에 처박힌 강경식 앞에서 보란 듯이 그렇게 말했었다. 구겨지는 강경식의 표정을 보는 게 속시원해서, 그리고 통쾌해서. 그런데 그 모든 마음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그날, 그집에서 쓰러져 있던 아이를 본 순간, 도무지 그 아이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어린 유진과 함께했던 나날들은 하루하루 핑계를 찾는 나날들이었다. 이 아이가 죽게 두지 않는 이유는 아이를 살려서 복수하기 위해서. 이 아이에게 친절히 대하는 이유는 나를 더 따르게 해 강경식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이 아이를 더 이상 이용하지 않고 떠나는 이유는 이 아이를 이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게 더 복수에 맞는 일이라서. 결국 모든 것이 다 핑계였다. 그냥 이 예쁜 아이가 예쁜 그대로 잘 컸으면 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난... 좋은 어른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꼭 무엇을 원했던 건 아니야. 그냥... 그냥...”
“......”
“미안해.”
긴 한숨 끝에 나온 말은 보잘 것 없었다. 대신 수연은 품에서 준비해둔 것을 꺼내 유진에게 건넸다. 자그마한 명함이었다.
“안 변호사라고 있어. 좀 이따 여기로 올 거야. 인성혁도 죽었고 인경자도 그 지경이니 널 돌봐줄 여력이 안 될 테지. 이상하게 해코지나 안 하면 다행이고. 아마 이 사람이... 널 돌봐줄 거야.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니면 그냥 일상적인 것들이나.”
“그럼 누나는요?”
“돈은 걱정 안해도 돼. 여기만큼 좋은 집은 아니겠지만 안전한 곳으로 구해줄 거니까. 그럼 거기서 학교도 다니고.”
“누나.”
유진에게 필요할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말하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유진은 끈질기게 명함을 받지 않고 수연만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말하고 싶은 건.”
“......”
“넌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어.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어.”
“......”
“하늘이 허락하는 한.”
“......”
“그러니까, 뭐든 네 인생을 살아. 진심이야.”
유진이 받지 않는 명함을 바닥에 내려놓고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수연을 잡은 것은. 그리고 유진의 머릿속에 또 다른 잔상이 스쳐지나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