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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독기
작가 : Lulla
작품등록일 : 2019.11.10

신을 배척하고 인간만의 삶을 추구하는 안개와 강철의 나라 스팀 헤이즈.

눈부신 발전 뒤에 가려진 빈민굴에서 태어난 로렌스는 언제나 자신이 평균 이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그의 꿈 속에 검은 뱀이 나타났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거머쥘 기회를 주겠노라고 속삭인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로렌스는 검은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7화. 연어는 급류를 거슬러
작성일 : 19-11-10 19:15     조회 : 264     추천 : 7     분량 : 7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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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알고 있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는 티끌 덩어리나 다름없다는 것을."

 

  제시카가 조용하게 말했다.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녀의 입가에 조롱 섞인 비릿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녀에서 반시계방향으로 카일, 아로네프, 로렌스가 앉아 마치 취조실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맞는 말을 하는구나 제시. 하지만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앉아있는 자리가 순서라도 되는지, 카일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그는 테이블을 톡톡 치고 있었는데, 손가락에 이상하게 생긴 철제 골무를 낀 탓에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 조금씩 갈려 나갔다.

 

  "티끌이 아니라 보석이야. 우리는 서로 의지할 필요가 있다고."

 

  "하! 속 편한 소리를 하기는. 나약한 토끼 같은 녀석은 한낱 저녁 반찬일 뿐이지."

 

  열심히 중재하려는 아로네프를 카일이 거칠게 몰아붙였다.

 

  쾅-!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원형 테이블이 크게 흔들렸다. 누군가가 테이블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제시카가 커다란 눈을 부릅뜬 채로 카일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머리에 납탄을 박아버리겠어!"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누나가 살아있다면 말이야!"

 

  "진정하지 않으면 둘 다 죽여버리겠어!"

 

  흔들리는 조명 아래에 세 명의 총잡이가 일어났다. 승부는 공평하지 않았다. 쏘아질 탄환은 총 네 개, 그 중 카일의 몫이 두 개였다. 카일은 언제라도 총을 뽑을 수 있게 허리춤에 손을 얹었고, 그 때문에 나머지 두 사람은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 아래에서 제시카는 턱으로 아로네프를 가리키며 카일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카일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듣고 섬뜩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카일은 제시카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뽑아 든 총구는 뜻밖에도 제시카의 얼굴을 향했다. 동시에 아로네프의 총구 역시 제시카를 향했고, 순식간에 이 대 일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제시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상하관계라는 거다, 멍청아."

 

  배신감에 치를 떠는 저 표정이 얼마나 유쾌한지! 카일은 이 상황이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로네프라면 제시카를 먼저 노릴 줄 알고 있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뢰는 티끌과 같다고 했던가? 제시카가 죽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누구에게도 신뢰를 주지 않았던 그 안일한 태도의 죗값이었다.

 

  제시카는 선택해야만 했다. 살려달라고 빌거나, 아니면 저승길 선물로 저들의 팔다리를 가져가거나. 제시카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죽어라, 카일!"

 

  "어림도 없지!"

 

  제시와 카일은 서로에게, 아로네프는 두 명에게 총구를 겨누어 보이지 않는 삼각형을 만들었다. 모두의 눈에 살의가 가득 차고, 세 개의 총구가 동시에 불을 뿜으려는 찰나.

 

  "저기... 모두들?"

 

  아까부터 한 마디도 없던 로렌스가 조용하게 손을 올렸다. 막 방아쇠를 당기려던 세 명의 관심이 동시에 로렌스에게로 옮겨 갔다.

 

  "우리가 뱅(BANG!)을 하는 거지, 느와르 영화를 찍는 게 아니잖아? 조금 진정하는 게 어떨까?"

 

  말을 해놓고 로렌스는 세 명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세 명을 포함한 관객이 모두 짜증 섞인 한탄을 하며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여기까지 했으면 좀 맞춰 주라 동생 놈아! 우리의 노력이 참 헛돼 보이든?"

 

  제시카가 총 모양으로 만든 손을 로렌스에게 겨누며 윽박질렀다.

 

  "아니, 규칙이라는 게 있잖아. 애초에 카일이랑 선생님이 먼저인데 네가 어떻게 총을 쏘는데?"

 

  "분위기 탄 거잖아! 몇 년 동안 한 게임인데 내가 규칙을 모르겠니?"

 

  "아니..."

 

  로렌스는 억울하다는 듯이 모두를 훑어봐도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흥미를 잃었는지, 모두 일어나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로렌스는 자기 때문에 흐름이 끊긴 것 같아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악몽에서 깨어나고 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꿈에서 봤던 검은 옷의 남자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서 아이들의 장단에 맞춰 주기가 힘들었다. 로렌스는 습관처럼 손목의 상처를 매만지며 꿈속의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다. 너는 나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남자는 끝끝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남자는 형태를 빌렸을 뿐 절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이질적이고 위험했다. 사람이라면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로렌스는 똑똑히 기억했다.

 

  뱀의 몸통을 지니고 언어를 사용하는 생물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언동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로렌스를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로 정의하는 듯했다. 가능성은 몇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남자가 인간을 초월한 누군가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현실감이 짙은 꿈이거나.

 

  "제시, 꿈에서 나온 생물이 현실의 나에게 상처입힐 수 있다고 생각해?"

 

  "또 그 질문이야?"

 

  제시카가 질렸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미 제시카는 한밤중에 일어났을 때부터 로렌스의 푸념을 들어주느라 눈 밑에 다크 서클이 깊게 내려온 상태였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사람이 어디에 무슨 상처가 났는지 다 느끼지 못한다니까. 길을 걷다가 우연히 손등을 보면 긁힌 자국에서 피가 흐르고 그러잖아."

 

  "근데 이건 누가 봐도 뱀에게 물린 자국이잖아. 마침 꿈에서도 뱀이 나왔고."

 

  "절대 아니라고. 절대, 절대! 거북 신님이라면 모를까 뱀은 또 뭐야, 김빠지게."

 

  "왜? 있을 수도 있지, 뱀 신님."

 

  라일라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의 라일라는 한층 표정이 밝아 보였다.

 

  "엄마? 너는 또 왜 그러냐?"

 

  "이번 ‘여러분의 알 권리’ 못 봤어? 장인 조합장이 한마디 했다잖아. 검은 옷의 남자들이 뭐라고 하던데."

 

  그러면서 라일라는 제시카에게 신문 한 뭉치를 쥐여줬다. 제시카는 라일라는 뚱하게 라일라를 쳐다보고 신문 헤드라인으로 시선을 옮겼다.

 

 

 

  스팀 헤이즈가 과거에 어떤 도시였는지는 어른들조차 알지 못한다. 너무나도 옛날 일인 데다 현대 회장인 노바 휠러 이전의 역사서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의 평균 수명이 낮은 탓에 휠러 회장보다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은 이미 죽음을 문턱에 둔 사람들이라, 자손들이 말을 이해할 만큼 성장했을 때는 이미 얼굴도 못 알아볼 만큼 나이를 먹은 뒤였다.

 

  그들은 귀신과 이야기를 나누듯 혼잣말을 흘렸는데, 유족들은 그 이야기를 토대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며 동화책 형태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동화의 내용은 이랬다.

 

  과거 스팀 헤이즈의 자리에는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 날 어디선가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나타나 이 마을을 근본부터 바꾸기 시작했다. 그들은 검은색 방독면을 쓰고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팔을 한 번 휘두르면 땅이 비옥해지고 뜨겁고 붉은 액체를 부어 바위보다 단단한 물건을 창조해냈다고 한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이 힘으로 공장을 세우고 주민들에게 농기구를 보급하며 점차 마을 크기를 키워가더니, 있는 건 풀뿌리밖에 없던 마을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성장시켜나갔다는 내용이었다.

 

  동화책을 본 사람들은 곧바로 그들이 주민들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현대에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을 그들이 전파했을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괴담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검은 옷의 무리의 지도자가 현재 회장의 성씨와 똑같은 휠러였기 때문이다.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만큼 동화책의 화제성은 엄청났고,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스팀 헤이즈를 위해 몸을 바친 휠러 가문의 일족을 존경했다.

 

  그렇다면 일부의 사람들이 왜 휠러 가문을 부정했는가 하면, 지극히 추상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회장은 지금껏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없을뿐더러, 최근에 자식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이 밝혀졌을 뿐 그 이외에 어떠한 신상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회장과 동년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죽어가는데 회장은 외견적인 변화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각했다. 선대 회장은 애초에 없었으며, 모종의 이유로 도시를 개척했던 휠러 회장이 지금까지 살아서 도시를 지키고 있다고.

 

  괴담은 일부 음모론자들에 의해 음지에서 퍼져나갔다. 특히 외곽 구역 주민들은 그게 사실인 양 부풀려서 아직 듣지 못한 이들에게 전파했고, 그들의 입맛에 맞춰져 회장은 몇백 년 동안 살아온 괴물이라며 입을 모아 휠러 회장을 비난했다. 내부와 완전히 상반된 반응은 외부 봉사자들의 귀에 들어갔고, 그들이 상부에 보고하여 마침내 휠러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휠러 회장의 반응은 간단했다.

 

  “대화가 부족했군.”

 

  다음날을 기점으로 회장은 외곽 구역의 구호 캠프를 돌며 주민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시작한다. 처음 방문은 구역별 구호 캠프의 운영 조직도를 관찰하기 위해, 두 번째는 주민들의 생활상을 피부를 맞대어 경험하기 위해, 세 번째 방문은 새로 사귄 친구를 만나기 위해 회사와 봉사 캠프를 오가며 대화를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의 오해가 풀려 외곽 구역 주민들의 일그러진 민심을 회복했다.

 

  회장은 끝까지 검은 옷의 무리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았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함부로 회장을 비난하지 못했다. 회장은 여전히 내부의 생활 구역을 늘려 외곽 구역 주민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있고, 주민들은 그런 회장에게 크나큰 감사를 표했다.

 

  휠러 회장은 그런 사람이다. 나 역시 회장의 인덕을 입어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분은 나의 은인이고 존경받는 사업가이며, 동시에 창의적인 발상으로 모두의 눈을 사로잡는 마술사이자 예술가이기도 하다. 내 온몸의 뼈가 부서지더라도 회장님의 방패가 되어 삶을 마감하고 싶다.

 

  감히 말하건데, 그는 나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존재이다.

 

 

 

  "이 사람의 회장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기사는 회장에 관한 괴담의 설명으로 시작하고 수식어를 덕지덕지 갖다 붙인 찬양으로 끝이 났다. 제시카는 그게 입에 발린 소리를 일삼는 기회주의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과거에도 검은 옷을 입은 집단이 나타나서 아무것도 없던 마을을 크게 발전시켰다잖아. 전능함을 몸소 증명한 그분들이 로렌스의 꿈에 나타났다면 무엇을 의미하겠어?”

 

  “개꿈이지.”

 

  “계시를 받은 거야!”

 

  라일라는 제시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잔뜩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노골적으로 귀를 후비며 귀찮아하는 제시카와 다르게, 로렌스는 아닌 척 라일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신님이 인간에게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분명 로렌스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이 도시에 태어났어! 언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그런 펜던트를 차고 다닐 리가 없잖아?”

 

  “거북 신님은 달라! 있는 지도 불분명한 그딴 신이랑 비교하지 마.”

 

  마치 라일라가 훔치려고 했다는 것처럼 제시카는 펜던트를 손으로 붙잡으며 면박을 줬다. 생각보다 거센 반응에 놀랐는지 라일라가 귀를 막으며 몸을 움츠렸다. 제시카는 순간 자신이 너무 격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수습했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 뱀 신이 있을 수도 있지. 나야 잘 모르니까 이런 말 하겠지만, 봤다는 사람이 있을 줄 누가 알아?”

 

  “아니야, 언니가 없다면 없는 거야. 미안해...”

 

  라일라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제시카는 손과 발을 마구 휘저으며 어떻게든 라일라를 달래려고 애를 썼다.

 

  “네가 사과를 왜 해? 오늘따라 존댓말도 안 쓰고 평소랑 너무 다르길래 무심코 울컥했나 봐. 이제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

 

  “어?”

 

  “에?”

 

  제시카의 입에서 맥이 빠지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던 표정은 어디 가고 라일라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제시카를 바라봤다. 제시카의 눈에는 그게 못된 장난이 들통난 아이의 반응처럼 느껴졌다.

 

  “언제라도 말을 놓아도 된다 했으니까 오늘 놓았을 뿐인걸.”

 

  “어? 같은 말 아닌... 아닌가?”

 

  제시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변덕이 이렇게 심하면 조울증을 의심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치 활활 타오르던 횃불이 미풍에 맥없이 꺼진 듯했다.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제시카가 고민하는 사이에 로렌스가 제시카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제시카가 뒤를 돌아보자 심각한 표정의 로렌스가 눈에 들어왔다.

 

  "나, 계시를 받은 건가?"

 

  "아, 이건 또 뭐지."

 

  제시카가 탄식했다. 타이밍 좋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 덕분에 제시카는 가까스로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모리스 역시 잠을 설친 듯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눈에 제시카와 똑같은 다크 서클이 내려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거의 '걸어온다' 가 아닌 '끌려온다'가 적절할 것 같은 걸음걸이로 모리스는 자신의 책상 앞으로 이동했다.

 

  "아 젠장, 죽겠구만."

 

  모리스의 손에는 이미 읽은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모리스는 서자마자 그게 무슨 흉물스러운 물체라도 되는 것처럼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아침부터 한숨 쉬면 복 날아간대요."

 

  "너 때문이야! 젠장,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나 해?"

 

  제시카가 눈치 없이 이죽대자 모리스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제시카, 로렌스, 카일!"

 

  모리스가 편지를 보며 호명했다. ㄷ자 모양으로 배열된 책상에 우연인지 세 명 다 한 열에 붙어있어 잠시 오른쪽 책상 열에 앉은 아이들이 전부 일어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징계! 외곽 구역 봉사 일주일이다!"

 

  "예?"

 

  순간 로렌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 카일은 온몸으로 억울함을 표현하며 모리스에게 마구 대들었다.

 

  "제가 왜요? 저는 전혀 집히는 게 없는데요."

 

  "병원 서류창고에 숨어 들어가서 사진 찍는 게 자랑이냐 그러면."

 

  모리스가 귀를 후비며 말했다.

 

  "저는 기자라고요. 뒤가 구린 사람은 당연히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자는 개뿔. 성적이나 잘 내봐라."

 

  “거기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요? 저희가 왜요?”

 

  제시카 역시 광분하여 따지고 들었다. 외곽 구역에서 구르고 짓밟힌 경험자로서 로렌스는 물론 제시카도 구역에 관한 감정이 결코 좋지 못했다.

 

  "나 말고 소리지르는 사람은 누구야? 참나..."

 

  모리스가 혀를 차며 편지를 흔들었다. 가장 앞에 나와 있던 로렌스가 편지를 건네받았다.

 

  "넌 도둑질이 가볍다고 생각하냐? 로렌스는 그 자리에 있었으니 방관죄 비슷한 거겠지. 나도 당황스럽다. 어제 회장님이 사태 파악하고 직접 징계 내리신 것 같은데, 나한테 한 마디라도 전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심지어 교장 선생님도 모르고 계셨어. 이 정도면 권력 남용으로 고소해도 할 말 없지 않냐?"

 

  "진짜네? 여기 회장님 서명이랑 인장도 박혀 있어."

 

  카일이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로렌스는 아니죠. 제가 몰아받을 수는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모리스가 딱 잘라 말했다.

 

  "본사에서 감독관이 따로 파견 나온다는데, 한 명 빠지면 어떻게 생각하겠냐."

 

  "그건 모르는 일이죠. 감독관 누가 오는 데요? 제가 직접..."

 

  "제시."

 

  로렌스가 나지막이 제시카를 부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장님이 직접 지시하셨다잖아. 감독관 설득한다고 끝이 아니야. 회장님이 봉사단장님에게 따로 보고 안 받을 것 같아? 회장님의 외곽 구역 시찰도 있고, 월간 보고서에도 징계 학생 명단이 따로 있어. 그냥 조용히 다녀오자, 난 상관없어.”

 

  제일 억울해야 할 로렌스까지 한 수 접고 들어가니 제시카는 할 말이 궁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리스는 손뼉을 치며 상황 정리에 나섰다.

 

  “자, 나도 따라가야 하니까, 나머지는 내일부터 부담임 선생님에게 수업 들으면 된다. 로렌스, 제시카, 카일은 편지에 쓰인 준비물 챙겨서 열 시까지 관문 앞으로 집합할 것.”

 

  "책 펴라." 하는 말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제시카는 결국 끝날 때까지 불편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로렌스는 의연하게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여러 감정이 충돌하고 있음을 제시카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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