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직실
귀남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직실로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세계가 나를 그들의 중개인으로
선택했다고? 왜 나를 선택했을까?
귀남은 윤차장과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왜 하필 중요한 순간에
괜히 나대 가지고 집에도 못가고 뭐야 진짜."
당분간 행동을 조심하라는 지침에
귀남은 퇴근도 못하고 방송국에 남아 있어야 했다.
진을 치고 있는 타 방송사 기자들 때문에
집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도 오지 않아 숙직실을 빠져나와
사무실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 귀남아!"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귀남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기 PD인 동일이었다.
" 어쩐 일이냐?
사고치고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러 왔냐?"
" 당연하지 자나 깨나 동기사랑 아니냐.
밥도 못 먹고 살 것 같아서
먹을 것 좀 싸왔다."
족발을 흔들어 보이는 동일.
" 12시가 넘었다.
다 늦은 시간에 무슨 족발이야."
사실 어릴 적 친구이자 직장 동료인
동일의 방문이 내심 반가웠다.
" 경위서 썼다며?"
" 어. 경위서도 쓰고 감봉 3개월."
" 그 정도면 뭐 사고 쳤었던 거에 비해서
잘 넘어 갔다."
"그래. 난 또 잘릴까 봐 걱정 많이 했지."
테이블에 족발을 놓고 포장지를 벗겼다.
" 진짜 왜 왔냐?"
" 걱정돼서 왔다니까."
" 내가 널 모르냐?"
귀남은 동일을 빤히 쳐다보고
장난스럽게 노려보았다.
" 솔직히 말해 봐. "
" 계속 물어보라잖아. 왜 그랬는지."
" 누가? 뭘?"
" 누구긴 누구냐 장 부장이지.
뭘 그리 궁금해 하는지."
귀남은 장 부장이라는 말에 날을 세웠다.
" 그 새끼 얘기 꺼내지 마라."
" 나도 꺼내기 싫다. 어쩌겠냐.
한 부서에 있으니 너랑 내가 친구라는 것도 아는데.
그 새끼 궁금한 거 못 참잖아."
" 그래서 대체 뭐가 궁금한 건데?"
" 장 부장이 지금 너 한번 잡으려고 하고 있어."
" 나를? 왜?"
"뭐 예전에 있었던 일도 있고."
"그 일 끝난 지가 언젠데.
다 지난 일을 이 제와서 들먹거려."
"너 신 후보한테 뭐 받아먹은 거 있는 거 아니냐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거 아니냐고."
" 받아먹었으면?
자기나 잘하라 그래. 지금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도
감지덕지하고 착하게 살라고 전해라."
" 심각하다니까.
너 오 현태 후보 알지?"
"알지."
" 오 후보가 장 부장이랑 무슨 관계인지 알아?"
" 관심 없다. 무슨 관계건."
귀남은 족발을 씹어 삼키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 오 후보가 장 부장 매형이야 매형."
" 그래서?"
" 그래서는 인마.
자기 매형이 임금이 되려고 하는데
직속 후배라는 놈이 다른 후보 이름을 외친 거라고
그것도 생방송 중에."
귀남은 쌈을 하나 싸서 동일의 입에 쑤셔 넣는다.
" 이거나 먹어라.
뭐? 그래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서
입이라도 벌리고 있으라는 거야?"
" 굳이 밀어 낼 것 까진 없다는 거야.
솔직히 얼마나 큰 빽이 생기는 거냐?
임금님이 우리 직속 선배 매형이라니까?
신나지 않냐?"
"빽은 무슨.
걱정 마 당선 될 리가 없어."
"그러니까.
그래서 널 캐려고 하는 거라고.
네가 뭔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 비밀? 알려줄까?"
" 어. 알려줘. 비밀이 뭔데?"
" 이미 자기들끼리는 다 알고 있어."
"뭘?"
"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기 마련이야."
" 그래서 그 약점이 뭔데?"
"그야 나도 모르지.
깨끗이 살았으면 떳떳할 텐데
왜 그렇게 지저분하게 살아서
냄새를 풍긴다니."
" 아씨 난 또 뭘 아는 줄 알았지."
" 동일아. 우리 그냥 평범하게 살자."
" 누가 특별하게 살자고 했어?"
" 암튼 난 할 말 없어.
그날 술 많이 처먹고
그냥 헛소리 했던 거라고 전해."
" 너 설마?"
" 설마 뭐?"
"또 제어가 안 되는 거야?"
"뭐가?"
" 그 헛것들이니 안에 들어 온 거냐고?"
"……."
" 한동안 괜찮더니……."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시청률 올려 보려고 쇼 한번 해 본거야.
덕분에 이슈는 됐잖아.
사실 그 만한 후보자 없잖아. "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
지금까지 함께 했던 동일은
귀남이 가진 특별한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동일이었다.
" 너. 진짜 아냐?
야, 잠깐만. 안되겠다.
어머니 전화 드려야겠다."
전화기를 꺼내는 동일의 핸드폰을 뺏는다.
" 너 어디 전화하는 거야!"
" 너희 어머니."
" 하지 마!"
" 너 또 아프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때도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났잖아."
" 어머니가 알아서 하실 거야."
" 그냥 둬. 견딜 만하니까."
" 너 어머니한테는 연락 좀 드려?
연락 드려라.
맨날 나한테 안부 물어보는데."
"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 참 너도. 이해가 안 된다.
어머니가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 됐어. 족발이나 먹어.
너 설마 장 부장한테 이상한 소리 한갓 아니지?"
" 뭘? 무슨 말?
너 귀신 씌었다고?"
" 야!"
" 설마 그걸 얘기하겠냐?
내가 아무리 입이 싸도
그런 말은 못한다.
귀신이 보인데요.
그 귀신이 알려줬데요.
누가 믿기나 하겠냐?
나까지 미친 놈 소리 들어."
" 참 신기하단 말이야."
" 뭐가?"
"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는 게 말이야."
" 흔한 일은 아니지."
' 죽어 없어진 존재들과 함께 공존한다는 게
좀 섬뜩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게 과연 왜 몇몇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인지 궁금하기도 해."
" 그냥 내가 미친놈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 아냐?
내 무의식이 빗어 낸 상상이라 생각하는 거잖아."
" 뭐. 사실 과학적으로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
" 우리가 지하철을 탈 때 말이야."
" 지하철?"
" 어 뭐 지하철이든 버스든.
사람들이 피곤해서 졸다가 갑자기 깨어나 보니
내려야 할 곳인 경우가 많잖아."
" 어 그렇지."
" 넌 그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해?"
" 그야 항상 다녔던 곳이고 잠결에도 안내 방송이
들릴 수 있잖아. 우리 몸 중에 가장 예민한 감각이
청각이기도 하고 무의식이 깨운 거지."
" 그래 다들 무의식중에도 오래된 습관과 패턴으로
깊은 수면에 빠져도 정류장을 놓치지 않고 내린다거나
소파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무심결에 받는다거나
경찰들이 오랜 경험으로 풀리지 않는 미제 사건들을
풀어내는 경우도 있지."
" 그렇지. 우리에겐 오랜 습관과 패턴과 경험이 있으니까."
" 하지만 나에게 보이는 세상은 달라.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 옆엔 저마다 보호령이 있어."
" 보호령?"
" 그래 보호령.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정류장에 다다를 때면
그 보호령들은 그 사람들 어깨 위에 올라가 짓누르거나
머리를 때리거나 뺨을 쳐."
" 왜?"
" 그들을 깨워야 하니까. 거기서 내려야 하니까."
" 말도 안 돼."
" 그러니까. 너에게는 말도 안되는 게 나에게 보이는 세상이야."
" 너랑 안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이런 것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 그러니까 죄는 짓 지마. 다 보고 있으니까."
" 그러게 왠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야 너 우리 군대 있을 때 기억나?"
"갑자기 무슨 군대냐.
20년도 더 지난 얘기를 왜 꺼내는 거야?"
귀남과 동일은 20년 전 동반 입대를 했고
강원도로 자대 배치를 받았었다.
" 너 사고 치니까 우리 신병이었을 때
생각이 난다.
그때도 너 지금처럼 사고 쳐 가지고
진짜 너 때문에 선임들 빡 쳐서 난리 났었는데
너 군장 매고 반나절을 연병장 돌았잖아."
"아이고 별걸 다 기억한다."
" 그때 진짜 대박이었는데."
" 근데 내가 어떤 걸로 사고 쳤었지?"
귀남도 새삼 궁금해졌다.
20년도 지난 일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 하도 사고 친 것이 많아서."
" 너 진짜 기억 안나?
그 이름 뭐냐?
키 겁나 커 가지고 얼굴 시커멓고
우리 자대 배치 받고 10일 뒤에
자기 전역한다고 우리 겁나 놀리던
갑자기 이름이 기억이 안나.
아 맞다.
홍 진호 병장!
너 걔랑 첫 근무 나갔다가
홍 진호 그 새끼 복귀하자마자 땀 벅벅 되가지고
그때 진짜 웃겼는데."
"홍 진호
기억이 난다 기억나.
그 홍 병장 마포에서 고기 집하잖아.
돈 겁나 잘 벌어.
다음에 같이 한번 가자. "
"야 됐어.
쓸데없는 정보를 주고 난리야."
됐고 그때 얘기 좀 해봐라.
역시 남자는 군대 얘기가 제일 재밌지."
" 무슨 마흔이 넘어서 군대 얘기를 하고 자빠졌냐."
" 야 해봐. 무슨 일 있었지 그때?"
"그때 진짜 대박 이긴 했지……."
귀남은 20년 전 일을 떠올렸다.
" 이야 벌써 20년 전 이구나.
스물한 살.
대학교 1학년 마치고 갔네.
그 어린 나이에."
" 야 너 입대할 때 진경이 와서 울고불고
했던 거 기억난다.
진짜 눈물 콧물 다 뺐는데."
"야. 갑자기 진경이가 왜 나와?"
"첫사랑 아니냐.
그래도 진경이가 진짜 예쁘긴 했어.
성격이 좀 지랄 맞아서 그렇지."
귀남은 그 시절이 떠올랐다.
푸르고 밝았던 스물한 살.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참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때로 다시 데려다 준다면
지금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야 진경이 생각해?"
" 참나 생각은 무슨.
일병 때 조교랑 바람나서
내가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알면서 그러냐?"
"그때 미안했다.
내가 진짜 많이 놀렸는데."
"됐다."
" 근데 우리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홍 병장"
"아 맞다. 그때 어떻게 된 거야?"
"우리 훈련소 나와서 자대 배치 받고
네가 1분대 내가 3분대에 배정 받았잖아."
" 어 그랬나?
별걸 다 기억하네."
" 그때 선임들이 너 겁나 못생겼다고 받기 싫어했는데
그때 1분대 분대장이 짬밥에서 밀려 가지고
너 받은 거 기억 나냐?"
" 갑자기 그 말이 왜 튀어 나와?
불쾌 하네 이거."
" 선임들이 난 키도 크고 얼굴도
반반하다고 겁나 좋아했잖아."
"자랑 질은. 아무 소용도 없는 거.
결국은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못하는데."
" 그냥 좀 들어봐"
" 알았어. 계속해 봐."
" 그날 내가 첫 근무였고 사수가 홍 병장이었어.
처음 나가는 야간 근무라서 엄청 떨렸지.
소초 앞에서 탄이랑 수류탄 받고 어리바리 까고
있었는데 홍 병장이 내 방탄모 딱 잡더니 이러는 거야.
오늘 정신 안 차리면 다 죽는 거라고
간첩 내려와서 내 목 따 갈 수 있다고 말이야.
내가 근무 못서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는 거라고.
졸면 죽는다고."
" 쫄았겠네?"
" 쫄기는 무슨. 그냥 쫄은 척 해줬지."
" 그래서?"
" 어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철책 점검 하면서 가고 있는데
이 새끼가 무서운 얘기를 하는 거야."
" 무서운 얘기?"
" 어. 3년 전에 누가 목을 매달았네.
2년 전엔 총기 사고로 5번 초소에서
두 명이 죽었네.
계속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 그 얘길 왜 하는 거야?"
" 그냥 놀리는 거지. 신병이니까."
" 아씨 그걸 믿는 놈이 어디 있다고."
" 너 벌써 무섭냐?"
" 무섭긴 참나. 그딴 얘길 누가 믿어?"
" 그래서 내가 벌벌 떨려면
홍 진호 병장님 무섭습니다.
이러니까 엄청 좋아 하는 거야.
내가 리액션이 좋잖아."
" 참나.
귀신 보이는 놈한테
귀신 얘기를 하다니"
" 암튼 초소까지
가. 1KM 정도 됐던 것 같은데
그때까지 어디서 들은 얘기를 계속하는 거야.
근데 너 기억 나냐? 우리 섹터 안에 있던 폐가?"
"폐가? 폐가가 있었나?"
" 거기 5초소 가기 전에 무너지기 직전인 폐가 기억 안나?"
" 아 그 폐가? 맞다. 거기 생뚱맞게 폐가가 있었어.
거긴 주민들도 안사는 곳인데."
" 거기를 지나고 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 거야.
누가 어깨 위에 올라타서 누르는 것처럼.
한 발짝도 못 떼고 가만히 있었어."
"왜? 갑자기?"
" 나도 몰라.
가위 눌린 것처럼 굳어 버렸어."
" 입은 살았고?"
" 그래 다행히 입은 살았지.
근데 소리 칠 수가 없었어.
그들이 내 입을 막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