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들었는가? 그때 치함포에 와서 행패부리고 간 일본 놈 있잖아, 그 놈 집에 괴한이 들어서 칼을 들이대고 돈을 훔쳐 달아났다는 얘기?
-들었지. 아주 난리도 아니던걸. 그놈이 지금 죽을똥말똥 한다면서.
-켁, 죽어뿌렸으면 좋겠네.
-누가 들을라, 조심혀. 지금 일본 순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싸돌아 다니니께. 조선 사람을 사방에 첩자로 풀었다는구만.
-첩자?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을 도와주는 거 말입니까?
-그러니께 어떤 놈이 첩자인지 알 수가 없으니 조심하란 말이여.
-그 일본 놈이랑 그날 밤에 조선 여자가 같이 있었다는데 그것이 순사한테 불려가서 아주 죽도록 맞은 모양이여. 그 집에 들어온 괴한이랑 한 패라고 의심을 샀다는구만.
-그럴 만도 하겠네. 그 일본 놈 사는 집에 방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데 지들이 쳐 자는 방을 괴한이 어찌 알았을까 말이여.
-치함포 박가도 불려가서 몇 대 얻어맞고 왔는가본디.
-박가가 그 괴한이랑 짜고 그랬다는 건가?
-아이고, 그 일본 놈한테 원한 있는 조선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말이여.
-혹시 그 사람들 아닐까?
-누구?
-왜 저번에 북촌에 이운성 대감 집을 털어갔다는 도둑 있지 않소. 그리고 그 전에 일본 나리, 그 뭣이야 이름이, 아무튼 거기도 누가 와서 훑어갔다는 소문이 있었잖이. 또 저기 어물전 박 뭐시기 집도 그렇고... 그 사람들 아닐까.
-아, 맞다, 맞다. 보니까 다들 배때기 기름칠로 악명 높은 족속들 집들이 털리고 있네 그려. 그 도둑놈들 잡는다고 관아에서 사람들을 엄청시리 풀었는데도 꼬리 하나 못 건졌다고... 그 사람들인갑소. 담을 새처럼 날아다닌다 하는 그 양반들. 진짜 홍길동이 나온 게 아닌가 몰러.
-홍길동이라... 그럼 의적이 나타난건감? 의적이?
-쉿, 말 조심하라니께. 첩자를 풀었다잖여.
-지는 아닌데요.
-첩자가 내가 첩자다, 라고 말하는 사람 있을라고?
-아이고, 형님은 우리 중에 꼭 누가 첩자가 있기라도 한 듯 말씀을 하시네요. 설마 여기에 있을라고요.
-우리는 그럴 주제들도 못되니까 조심하라고 말하는 거여. 우리끼리니께.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시선을 돌리는 사내들, 평생을 알고 지내온 사람들이다. 마누라 속곳이 몇 장이 있는지 까지 속속들이 아는 오랜 이웃이다. 아닐 것이다, 아닐 것이다 하다가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꺼림직함이 있다. 뭔가 텁텁한 느낌이 든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에 와서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며 숨을 몰아쉬는 한교.
-어떤 작자들인지 배포가 커도 디럽게 크네요. 얼굴이나 한 번 봤으면 좋겄네.
-아이고, 깜짝이야,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야지, 훅 들어와서 간 떨어질뻔했다.
-여기저기 그 도둑들 얘기로 난리도 아니네요. 시장통이 온통 그치들 때문에 시끄럽구만요.
-남의 집 곳간 털린 얘기보다 재미있는 게 있을라구. 그것도 왜놈 집 털린 얘기니 다들 속이 시원한 모양이지.
-그나저나 도둑들이랑 한 패로 몰려서 죽도록 얻어맞은 계집애만 불쌍하네 그려.
한교의 얼굴에 쨍 하고 열꽃이 스쳐지나간다. 그 역시 알고 있다. 그날 밤 일본 사내 옆에서 함께 재갈을 물린 조선 여자,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치함포 주인한테 빼앗긴 돈을 돌려주겠다는 일념에서 감행한 일이었다. 억울한 조선인을 구하려다 또 억울한 조선인을 하나 더 만든 것이다. 피할 수 없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해보지만 가슴에 돌이 얹히고 쓰린 것은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은 또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잡초를 뜯어낼 때 씨앗을 건드리지 않는 길이 있을까.
증거가 없다. 일본 고리업자는 복면을 쓰고 들어온 도둑의 인상착의를 가늠할 수 없었다. 키가 몇 척이고 몸은 퉁퉁했다, 한 놈은 호리호리했다,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놈이 있었다, 팔 힘이 엄청 쌨다, 혼자서 장롱을 밀 정도로, 이 정도밖에는 들이밀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그것도 공포에 질린 어둠 속에서 그의 추적은 오리무중이었다. 눈 먼 장님더러 그림을 그려보라는 격인 것이다.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일본 순사 하나가 그의 상관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무엇인가? 묘안이라도?
-이놈들이 결국 같은 놈들일 겁니다. 지난해부터 발생하는 도적들이 동일한 놈들이라는 거죠. 설령 같은 일파가 아니더라도 한 놈만 잡아서 줄줄이 엮어버리면 그만인 거죠. 현상금을 걸어도 누구 하나 봤다는 사람이 없을 때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뭐냔 말이다!
-그자들끼리 분열하게 만드는 겁니다. 분명 한 놈이 아닐 테니까요.
-어떻게?
상관이 그 부하에게 몸을 단단히 들이밀며 묻는다. 제대로 된 답이 아니면 머리통을 박살내버리겠다는 듯이.
-범인을 잡았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한 놈이 와서 다 불고 현상금을 받아갔다고 말하는 거죠. 누가 불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우리는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와서 자수를 하면 죄를 묻지 않고 보상도 해주겠다. 만약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다.
상관은 부하가 하는 말이 썩 끌리지 않는다. 어딘가 허술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말한다.
-우리가 그놈들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서 그것들을 왜 당장 잡아들이지 않는지를 어떻게 설명하겠나? 의심할 게 뻔하지.
-아... 그렇군요. 제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일본 순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스스로 너무 멍청한 생각을 한 것을 탓하고 있다. 급류에 밀려가듯 무언가에 빠져 골몰하고 있는 그의 상관.
-아니다,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서... 서로를 의심하게 하는 고리가 될 수는 있겠어. 그것들이 제 아무리 똘똘 뭉쳐있다고 해도 바늘구멍 하나는 새어나가기 마련이니까. 처음에는 바늘구멍이지만 그게 결국 둑을 무너뜨리는 법 아니겠나. 약을 치면 개미 한 마리라도 기어 나올 터.
상관이 부하를 향해 크고 호탕하게 웃으며 퍽이나 대견하다는 듯 쳐다본다.
-법사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거기 앉아라.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방석에 앉으면서 한교가 말한다.
-갑자기 네 낯짝이 보고 싶어 불렀다. 곧 저 세상 사람이 될 면상, 마지막으로 한 번 봐둘라고.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 세상 사람이 될 면상이라는 게.
뜨악하는 표정으로 성 법사를 쳐다보는 한교의 얼굴, 역시 성 법사구나 하고 생각한다. 저 귀신을 속일 수가 없다고 절감하면서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린다.
-도망칠 곳은 있느냐?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무슨 재주로 알아냈겠느냐, 네가 내게 들킨 거지. 내게 들켰다는 건 곧 다른 누구에게도 들키고 말 거라는 신호이기도 하고.
-제가 도망을 처야 하는 건가요? 이건 왜놈이 올가미를 씌우려고 덫을 놓고 있는 것 뿐인데요. 저희들 중 누구도 발설한 사람이 없습니다.
-네 말이 맞다. 왜놈들이 부러 그런다는 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디선가 구멍이 생기게 마련. 그게 너일 수도 있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가상하나 사람이라는 게 생각보다 약하다. 더군다나 우리는 약한 조선의 백성이다. 약한 나라의 백성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다. 약한 나라의 백성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것. 온 장안에 경계가 삼엄해. 언젠가는 제 풀에 지치게 될 것이다. 어디로든 몸을 숨겨야 한다.
-법사님,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희들은 맹세를 했습니다.
-어디에 맹세를 했단 말이냐! 맹세가 지푸라기 같은 시절인데. 너는 기어이 불구덩이로 들어가려는구나.
성 법사의 깊은 한숨이 방안에 무겁게 깔린다. 한교는 웃음까지 지어보이며 제 굳은 신념이 바위보다 무거움을 주장하고 있다.
그로부터 열흘 후 어둠이 내려앉아 사위는 고즈넉하다. 호롱을 켠 집들이 희미하게 시야를 터주는데 어디선가 휘몰아치는 일군의 발자국 소리. 저 쪽이다!를 외치며 다급히 뛰어나가는 병사들.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한 민가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더욱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근다. 한 남자가 성 법사의 집 담을 넘어 툇마루에 올라 소리죽여 방문을 두드린다. 한교다.
-법사님. 접니다.
-들어와라.
신도 벗지 않고 후다닥 성 법사의 방 안으로 들어오는 한교.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할딱거리고 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두 눈은 발갛게 충혈 되어 있다.
-살려... 주...십시오.
토를 하듯 말을 뱉어내는 한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한교를 바라보는 성 법사의 시선이 노려보는 듯 스산하다. 그때 법사의 집 대문을 무너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
성 법사는 제단을 덮은 천을 들어 올리더니 바닥에 깔린 돗자리를 들추고는 한교에게 이리 들어오라는 눈짓을 한다. 돗자리 밑에 사람 하나 간신히 들어갈 구멍으로 한교는 숨어 들어간다. 밑으로 내려가니 두어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밀실이 있다. 언제부터 여기 이런 곳이 있었지? 돗자리를 덮자 대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마당으로 우르르 들어서는 소리가 들린다. 성 법사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조선 병사와 일본 군인이 섞여 있다.
-무슨 일이신데 병사들이 내 집을 찾아 온 것이오.
-방금 이집에 누가 들어오지 않았소?
-아무도 안 들어왔는데 무슨 일인가?
-지금 도둑을 찾고 있는데 이집 담을 넘었소.
-내 집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단 말인가? 나한테 훔쳐갈 것이 무엇이 있다고.
-숨어들었소. 찾아라!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집안의 곳곳을 뒤지기 시작한다. 강노인과 부엌에서 일을 하는 찬모 둘이 마당에 서서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병사 두 명이 성 법사의 방문을 열었다.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건드리는 건가? 신을 모시고 기도를 하는 곳이네. 잘못 만졌다가는 신의 노여움을 산다는 것쯤은 너희들도 잘 알겠지. 그 나라에도 신당이 있으니.
성 법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귀기어린 위엄에 순간 걸음을 멈추는 병사. 그들의 상관이 성 법사에게 일순간 고개를 숙이며 찔러보듯 말한다.
-설마 법사님이 모시는 신이 죄인을 숨겨주시진 않았겠지요?
-내가 누구인지는 아시는가?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왕이 아주 극진히 대하는 분이시라는 것쯤은.
-그런데 내가 왜 도둑을 숨겨주겠는가?
-법사님께서 그 도둑을 잘 알고 계시지요.
-내가 아는 사람이 도둑이라고? 그게 누구지?
-정 한교.
-한교? 한교라고? 한교가 무슨 재주로 그리한단 말이지? 그 녀석이 남의 집 담을 넘어서 물건을 훔친다고? 그 칠칠맞은 놈이?
-어쨌든 그자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뒤져 보시게. 샅샅이 뒤지라고. 대신 신령님 제단에 손을 댈 때에는 조심해주시오. 화를 피하고 싶다면.
법사의 엄포에 위엄이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조심스럽게 바닥을 살피고 제단의 천을 열어보다 내린다. 감히 바닥에 깔린 돗자리를 들추어볼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서. 법사의 집을 나서면서 무리의 우두머리 되는 일본 사내가 한교가 이집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듯 큰 목소리로 말한다. 그의 말을 통변이 똑같이 큰 목소리로 전한다.
-정 한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나머지 네 놈이 그 자식의 몫까지 벌을 받게 될 것이오. 그 네 놈의 목숨이 정 한교에게 달려있지요. 진정 제 동료를 생각한다면 제 발로 찾아오라고 전해주십시오. 혹, 만나시게 되거든.
쩌렁쩌렁 울리는 조선인 통변의 소리는 한교가 숨어있는 밀실까지는 닿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