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8. 껴안은 거 당신이지? 이소율 검사님!
‘헉!’
“……!”
시선이 맞닿은 순간 소율은 무거운 공기에 짓눌린 듯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지은 죄도 없건만, 소율은 너무 놀라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경하도 둘 사이 거리가 너무 가까워 당황했으나 애써 괜찮은 척 표정을 감췄다.
1, 2, 3초…….
둘 사이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경하였다.
경하가 급히 소율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어지러운 건 좀 어떻습니까! 목 아픈 건?”
“이제 좀, 나아요. 저… 쥐가 나서 움직이지 못해서 그러는데, 물 좀….”
“어딥니까? 쥐가 난 곳이.”
“잘못 누워 있었는지 오른쪽 팔과 다리가…….”
그녀 말에 경하의 손이 급히 소율의 다리를 서슴없이 주무른다?
천만에.
“김 간호사, 김 간호사님!”
갑작스러운 경하의 부름에 달려온 김 간호사는 뭘 하다 왔는지 숨까지 헐떡였다.
“네, 서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음, 죄송하지만, 환자분 좀 주물러 주시죠. 쥐가 났다는데 제가 주무르면, 좀 그럴 것 같아서.”
“아…, 예.”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온 김 간호사는 조금 황당했다.
그간 보아온 경하라면 당연히 그가 그녀를 주물렀을 터였다.
헌데, 갑자기 저러니. 그녀 입장에선 기분이 묘했다.
“아, 아니요. 제가 하면, 되요.”
소율은 김 간호사 눈치를 보곤 얼른 그녀를 말리는데.
“그냥, 좀. 가만히 있죠! 자꾸 몸을 뒤로 빼면 김 간호사가 더 힘듭니다.”
소율은 날카롭게 꽂히는 말에 그녀도 모르게 주눅 들었다.
‘원장님께 많이 혼났나? 소율 씨에게도 저러게. 엄청 까칠하게 구네.’
김 간호사는 다리를 주무르며 수시로 경하 눈치를 살폈다.
대체 왜 저러나 하고.
아직 복수하려는 건가 생각하던 그녀는 소율에게 대하는 걸 보곤 그건 아니라 여겼다.
한편, 소율은 이 상황이 몹시도 불편했다.
근육이 빨리 풀려 움직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를 열심히 주무르는 김 간호사도, 의자에 앉아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경하도 소율은 다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팔짱을 낀 채 무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저 인간은 어찌 저리 잘 생긴 건지.
하필 이 꼴로 쥐가 나서 마주 앉아 있는 그자를 보자니 여간 곤혹이 아니었다.
“으으윽! 이제, 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소율은 아직 불편한 몸으로 살며시 방향을 틀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신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명에 가까운 신음에 의자 깊숙이 등을 대고 있던 경하의 등이 살짝 떨어졌다.
그러다 소율과 눈을 마주치려던 찰나에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시 등을 의자 깊숙이 기댄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어나 김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소율을 등 뒤에 두고, 두 사람은 나직이 말하곤 김 간호사가 병실을 나갔다.
병실을 나간 김 간호사의 얼굴이 다소 편안해졌다.
‘크큭! 난 또, 왜 그러나 했네. 그런 거였어? 하하, 아, 이걸 어쩐대? 입이 간질간질해서.’
대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
두 사람이 얘기를 다 하고 뒤돌아설 때까지도 소율은 여전히 쥐가 난 팔을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저기요. 서 선생님, 죄송하지만…. 물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이제 막 뒤돌아서는 경하에게 조심스레 부탁했다.
그러자 소율을 빤히 보던 경하가 예상 밖의 말을 내뱉었다.
“미안한 건 압니까? 의사가 언제부터 물 셔틀 하는 사람인지 묻고 싶군요.”
“……! 저, 아직 팔이 쥐가 나서….”
“아직도 다리를 움직일 수 없습니까!?”
“아뇨, 다리는, 이제 괜찮아요.”
“한쪽 팔도 멀쩡한 거 같고. 걸어가서 직접 마시죠. 냉장고는 저쪽에 있습니다.”
뭐지? 소율이 알던 경하가 맞나?
여자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던 그를 떠올리자 소율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잠시 멍했던 그녀는 다리가 아직 불편해 조금씩 절었다.
소율은 물통을 여전히 불편한 한쪽 팔에 끼고 뚜껑을 열었다.
어느 정도 물을 마셨을까?
“물을 다 마시면, 서류 빨리 작성하시죠.”
물을 머금고 있던 소율이 순간 푹, 물을 뿜었다.
“아, 죄송….”
당황한 소율이 휴지를 뜯어 바닥을 닦으려 하자
“그건, 청소하시는 분에게 맡기면 됩니다. 이거나 빨리.”
그의 다그침에 소율은 마시던 물을 들고 다리를 약간씩 절며 침대로 돌아왔다.
그녀를 안 보는 척 보던 경하는 소율이 조금씩 인상을 쓸 때마다, 그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탁!
침대에 있던 간이 테이블에 물통을 내려두던 소율은 시선을 서류 쪽으로 돌렸다.
어서 작성하라는 경하의 손짓에 소율은 미간을 좁혔다.
“저, 바쁩니다. 원래, 입원하기 전에 작성해야 하는걸. 그동안 의식이 없어 미뤄뒀던 겁니다. 빨리 작성하시죠!”
서류를 작성하던 소율은 연필로 대충 긁적인 성명란에 의아했다.
이름만 적힌 성명란이라니.
“왜 이름이 소율이죠? 제 이름은 이소율인데.”
“몰라서 묻습니까! 아니면 알면서 확인하려는 겁니까?”
“……그게 무슨?”
“제 추측이 틀렸나 봅니다. 그럼, 507호에 가서 얘기하죠. 이거 끝나면.”
‘김이경에게는 왜?’
서류를 작성하던 소율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 작성한 서류를 건네지 못하는 작은 손을 본 경하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사라졌다.
“저, 507호에… 정말, 얘기할 건가요?”
“507호에 누가 있는지 아나 봅니다.”
끙, 소리가 나는 걸 힘겹게 삼킨 소율이 경하를 쳐다봤다.
“내가 507호에 갈지 말지는 그쪽이 답하기에 달렸죠.”
“무슨?”
“지금부터 질문을 딱 세 개 하죠.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한숨과 함께 나온 소율의 고갯짓이 약하게 끄덕였다.
“이경이 사건 조사 중이죠?”
끄덕.
“변장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요? 그럼, 507호로.”
“자, 잠시만요. 다음 질문하세요.”
“그럼, 그때 내 궁둥이 두드리고, 껴안은 거 당신이지? 이소율 검사님!”
컵이 손에 있었다면 그녀는 떨어뜨렸을 거였다.
파리한 낯빛으로 변한 소율이 비명 안 지른 게 다행이었다.
“그, 그건. 내가 아니에요. 아니, 어느 미친 검사가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그런 미친 검사가 있더군요. 거기, 그쪽 말입니다. 더 대화는 안 되겠군요.”
소율의 불성실한 대화에 경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자, 잠시만요. 아, 눈이 너무 따가워서.”
소율은 눈이 아픈 척 거의 실눈으로 화장실로 갔다.
사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뭔가 확인해야 했다.
눈이 따갑다는 말에 얼른 불어주려던 경하는 머쓱해서 화장실로 가는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역시 서클렌즈를 안 했어. 그렇다면, 빠져나갈 수 있어.’
따가운 눈을 겨우 뜨는 것처럼 거울을 들여다본 소율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거울은 왜? 설마….’
‘왜 저렇게 쳐다봐?’
“아, 속눈썹이 눈을 찔렀네. 그러니 아팠지.”
다행이라 여긴 그녀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혼잣말하며 속눈썹을 빼는 척했다.
수상한 눈빛이 계속 따랐으나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자리로 돌아온 소율은 한결 차분해진 투로 물었다.
“제가 그랬다고 하는데 언제 그랬죠”
“10일 전 오전 8시 30분에서 9시 30분 사이. 여기 있었지 않습니까.”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한 경하는 ‘빼박’이라 여겨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래도 빠져나가 하는 느낌으로.
“검사가 근무 시간에 법원도 아니고, 검찰청도 아닌 이곳에 있었다구요? 저 그 시간에 여기 있으면 잘려요. 어디서 나와 비슷한 사람보곤 나라고 우겨요!”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 그쪽 맞습니다. 확실히!”
“자세히 봐요! 눈, 코, 입, 얼굴, 머리 스타일까지. 그날 그쪽이 본 사람과 같아요? 똑바로 봐요, 대충 보지 말고!”
‘같을 리가 있나! 그때 난, 서클렌즈를 꼈는데.’
소율은 비웃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승자의 눈빛을 날렸다.
“…….”
‘지금 눈동자 색이 다르다고 저러는 건가? 하! 그때 그 사람은, 당신이야!’
경하는 그녀 눈빛에서 확신이 들었다.
“왜요, 그래도 못 믿겠어요? 내가 검찰청에 있었다는 CCTV도 있는데. 그거 필요해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소율 씨! 얼마 전에 아주 완벽하게 변장하는 할머니를 봤죠. 가면 벗은 얼굴 잠깐 봤는데, 당신 얼굴이더군요. 근데, 말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변장할 수 있다면 CCTV가 문제겠습니까? 들어갈 땐 검사인 당신이었다가 나올 땐 할머니로 나오면 누가 알겠습니까? 가까이 있던 나도 속았는데.”
둘의 팽팽한 의견이 서로를 겨냥한 순간 경하는 깨달았다.
이 여자가 실제로 변장할 수 있다면 검찰청 CCTV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그러자 이번엔 경하가 졌다는 표정으로 말꼬리를 돌렸다.
“이제 마지막 질문.”
“이미, 질문 세 가지 했잖아요.”
“고향이 어딥니까? 혹시, 목동에 있는 진*여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8년 전에 소율 씨와 같은 이름의 그녀도 푸른 눈이었는데.”
“……!”
소율은 그녀도 모르게 소릴 지를 뻔했다.
‘뭐, 뭐야? 날 기억하고 있었어? 헉, 어떻게, 어떻게? 얼굴이 같고, 이름이 같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얼굴이 같은 사람이야 있을 수 있다지만. 이름까지 같기는. 아, 미치겠다.’
찰나의 순간, 소율이 얼마나 입이 바짝 타들어 갔는지.
입술 안쪽을 말아 넣은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아…뇨, 전, 인천에서 학교 다녔어요.”
“인천?”
“네, 고향이 거기에요.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아버님은 뭐하십니까?”
“너무 실례 아닌가요? 무슨 호구조사도 아니고. 아버진 이미, 돌아가셨어요. 됐나요?”
경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할 리가 없으니.
더는 캐묻기 그랬다.
‘내가 아는 그 소율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그녀는 어딨지?’
경하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너무 충격받은 경하는 뇌가 작동을 멈춘 듯 잠시 침묵했다.
그는 소율을 본 순간 예전에 만난 그녀라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거 때문인가? 나를 여기 입원시킨 게.’
“혹시, 저와 닮았다는 사람, 좋아…?”
“……! 그럴 리가. 그냥 닮아서. 그녀가 아닌가 하고 물었습니다. 정말 고향이 인천입니까? 아버님도 돌아가셨고?”
“……네.”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아빠, 미안! 이 일이 해결되면 그때…. 아, 아냐. 이 사람에게 사과하긴 이미 늦었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던 소율은 양심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했다.
*
이경은 병원 생활이 맞지 않아 곤혹이었다.
병원 직원들이 신경 써 줘도 그곳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
귀찮은 조사를 피하려 입원했건만. 어떻게든 2주는 버티려 했는데.
겨우 일주일 남짓 지나자 온몸이 뒤틀렸다.
병실 안에 있던 그가 누군가를 추적하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설 때쯤.
꽤 세련된 애가 병실로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 선생님을 대신해서, 검사를 도와드릴 레지던트 2년 차 이세은입니다.”
‘허, 얘 봐라. 지금 작업 거나? 어디서 또 SG 그룹에 대해 알아봤나 보지. 검사는 무슨? 검사를 끝낸 게 언젠데! 얘는 무슨 뒷북을 이렇게 쳐?’
밝게 미소 짓던 세은은 병원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문가의 손길을 받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쳐다도 보지 않을 스타일의 여자.
세은은 검은 속내를 풀풀 풍기는 그런 여자였다.
화려한 시궁창과 같은 그런 여자를 며칠 전에도 봤었지.
돈만 주면 뭐든 할 여자. 아, 그 이상이었나?
돈으론 부족해서 그 집 아들에게 추파를 던지던 여자.
그래, 어머니와 함께 온 그 더러운 여자와 닮았다.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세은을 보니 욕지기가 절로 나오는 걸 꾹 참았다.
‘한번 놀아줘?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세은은 이경이 심심했던 걸 기뻐해야 할 거였다.
심심하던 차에.
이경은 놀아준다는 차원에서 그녀가 하자는 대로 다 했더랬다.
사실 그녀는 그에게 찾아올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의 담당 의사는 ‘서경하’니까.
그냥 간단한 건강 검진만 받으면 되는데. 굳이 나서서 돕겠다니 가증스러웠다.
‘이 병원 레지던트 2년 차는 그렇게 할 일이 없나?’
그녀와 놀아주는 것도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병실로 찾아온 세은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붙어 귀찮게 했다.
*
아침 식사를 마친 이경은 세은이 올 시간이라 밖으로 나왔다.
링거를 뺀 그는 온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동안 달고 다닌 귀찮은 줄을 하나 뺐다고 이렇게 시원할 수가.
‘하-! 나도 참! 소박하다. 이걸로 기분 좋아지게.’
병실에서 그가 나오자 경호원들이 따라붙었다.
“여기 근처 산책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여기 있어요.”
“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버튼 누르십시오.”
“그렇게 하죠.”
그가 너무 다정하게 말했나?
경호원들이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주인도 없는 병실을 뭘 지켜!
따라올 것 없다고 병실 앞에 있는 붙박이들!
‘하, 멍청한 건가, 아니면 똑똑한 건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가?’
지석이었으면 한소리 했겠지만. 저들에겐 참아야겠지.
화난 걸 참으려니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여기까진 평소와 같았다.
그는 VIP 전용으로 마련된 야외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막 510호 앞을 걸어가고 있을 때 병실 문을 열고 어떤 여자가 나왔다.
머리는 얼마나 안 빗었는지 잔뜩 엉킨 산발이었다.
처음이었다, 저런 몰골의 여자는.
아무리 병자라 해도 저리 엉망일 수가.
여자라면 밖으로 나올 때 적어도 긴 머리 정도는 묶지 않나?
밖으로 나온 여자는 비틀비틀, 몇 발짝 걸어가더니 쓰러지려 했다.
이경은 깜짝 놀라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그녀가 거의 안기다시피 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라벤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
‘허-억!’
라벤더 향의 그녀는 이경을 한번 올려다보곤 자지러지듯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