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5. 저 미친 게 어디서 저딴 짓을!
“무슨 말씀이신지?”
“언제부터 소율 씨와 사귀었냐니까?”
“사귄 적 없습니다. 솔직히, 이 환자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저 이름만 알지.”
경하는 소율과 아무 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버지께 말하려니 무안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온 동네방네 소문이란 소문은 다 낼 행동을 했으니 오죽할까.
해서 목소리가 여상스럽지 않게 다소 기어들어 갔다.
“뭐!? 근데, 뭘 이렇게 유별을 떨어!? 병원 질서도 무시하고 네 마음대로 진료하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왜 VVIP 병실에 입원시키는데!? 그것도 네놈을 보호자로 만들면서까지.”
“……!”
경하는 순간 끙 소릴 낼 뻔했다.
“그러다 환자에게 소송 들어오면 어쩌려고!!
내심 기대했건만.
아무 사이 아니라는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인석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 그건, 죄송해요.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알았다. 앞으로 이 환자에 대한 오더는 내가 내린다. 너는 혹시 의심스런 증상이 있으면 지금 말해. 내가 검토해 보겠다. 내가 보기엔 독감 같은데, 너는?”
“저도 같아요.”
“그래, 알았다. 그럼, 내일 보자.”
“예. 아버지! 저, 소율 씨가 여기 있는 거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 다른 사람에게도.”
“……그건, 왜?”
인석은 비밀로 할 것도 없는 걸 비밀로 하라는 말에 다소 의아했다.
“소율 씨가 조사하는 사람이 VIP 병실에 입원해 있습니다. 그쪽에 소율 씨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될 거 같아요.”
‘이경이구나. 그래, 얼마 전에 뉴스에서 꽤 시끄러웠지.’
“소율 씨가 경찰이냐? 보기엔 그리 안 보이는데.”
“아뇨, 검사입니다.”
“그건, 또 어찌 알았느냐?”
“검찰청에서 소율 씨 핸드폰으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사실, 환자 이름이 이소율입니다.”
“……! 그건 또, 왜…!? 아, 아니다. 알겠다. 그러고 보니, 너는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아리도 그렇고, 소율 씨도 그런 걸 보면.”
‘……. 내가!?’
인석은 ‘아리’란 이름을 언급하곤 얼른 아들 눈치를 봤다.
예전처럼 이름에 심각하게 반응할까 싶어 신경 쓰던 그는 경하의 무반응에 머쓱했다.
병실을 나온 인석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멍청한 녀석! 사랑도 해본 녀석이 제 감정을 그리 몰라? 저리 유별 떨면서. 병실도 못 떠나는 녀석이. 쯧쯧! 내가 소율 씨에게 고맙다 할 판이네. 아리 이름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해줬으니.’
감정에 둔한가?
인석은 보자마자 알겠는데 그만 모른다니 기가 막혔다.
병실을 나온 인석은 아들을 자극해서 빨리 아리를 잊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인석은 ‘아리’ 얘기에 가만있긴 했어도 아직 경하가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으리라 여겼다.
찰나였으나 경하의 표정에서 어딘가 불편해 보인 까닭이었다.
사실 경하는 그와 상관없이 자기가 그랬었나 생각하기 바빴지만.
*
오늘 누가 오나?
병원 안에 있던 경호원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다들 긴장하도록! 지금부터 보는 것, 듣는 것들은 모두 잊는다. 물론 어디 가서 말해도 안 되고. 알겠습니까?”
“네.”
지석의 말에 경호원들이 긴장감에 몸을 좀 더 곧추세웠다.
바짝 군기 든 모습에 지나가던 이들이 한 번씩 쳐다봤다.
잠시 뒤, 이경의 병실 쪽으로 두 명의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 여자는 이십 대 후반, 또 다른 여자는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오는 게.
딱 봐도 모녀지간으로 보였다.
게다가 뒤따라 오는 오십 대 여성은 아이까지 안고 있어 더 그랬다.
분명 엄마가 딸을 대신해 아기를 돌보는 거라 여기는 그들이었다.
이제 갓 SG 그룹 경호원이 된 이들은 저들 모녀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십 대라 그럴까?
앞서 걷던 딸은 한껏 치장한 모습이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매치한 그녀는 살랑살랑 걸어서 이경의 병실 앞에 멈췄다.
미인이 병실 앞에 오자 경호원들은 좀 더 늠름해 보이려 애쓰는 듯했다.
그때 눈웃음을 장전한 그녀가 뒤따라오는 엄마를 불렀다.
“형님~! 빨리 오세요. 이경이 기다리겠어요.”
애교를 부리는 듯한 비음 섞인 소리에 경호원이 웃었다.
그러다 이내 그녀가 뱉어낸 말을 곱씹어 보곤 놀라 눈이 커졌다.
‘……! 형님? 맙소사! 저 여자가 작은 사모님이야?’
회장님께 첩이 있다는 건 신입 경호원들도 들었다.
하지만 저리 어린 여자가 육십이 넘은 남자의 첩이라니.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 힘들어 젊은 여자와 나이든 여자를 번갈아 봤다.
아니, 아닐 거야.
저리 젊고 예쁜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다 늙어 빠진 남자의 첩으로 산단 말인가.
저 외모면 젊은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아무리 돈이 좋아도 저럴 수가.
차라리 돈이 그렇게 좋으면 젊은 재벌 3세를 노리던가.
경호원들은 부자에 인물 좋고, 인품까지 두루 갖춘 남자를 찾으면 될 걸 저리 인생을 망친 그녀가 답답해 보였다.
조금만 둘러봐도 완벽한 신랑감이 둘이나 있는데.
대체 저 여자는 왜! 늙은이를 남편으로 뒀는지 그들은 묻고 싶었다.
방금 전만 해도 모녀 같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던 눈빛이 뒤따라오는 여자를 안쓰럽게 보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사모님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저런 딸 같은 여자 뒤치다꺼리를 한단 말인가.
불쌍하기도 하지.
남편이 바람 핀 건만 해도 속이 문드러질 텐데,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를 저리 돌보다니.
그녀 팔자도 참, 대단하다.
나이든 여자가 속태울 게 뻔한데도 젊은 여자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형님~, 빨리! 아이, 참! 그래서 내가 나이 들수록 운동하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맨날 딴 여자에게 밀리지.”
“……!!”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웃음이 뒤따르는 여자에 대한 비소였다는 사실에 경호원은 씁쓸했다.
그들의 변화에도 젊은 여자는 무에 그리 좋은지 눈웃음치며 병실로 들어갔다.
그 짧은 순간, 이경의 얼굴이 흙빛이었다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이경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내가 너 입원했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데. 세상에! 이럴 줄 알았으면 네 동생을 형님에게 맡기고, 내가 널 간호하는 건데. 왜 연락 안 했어?”
나이도 이경보다 어린 여자가 그를 아들 대하듯 하는 모양새가 보기 싫었다.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곤 제 얼굴을 부비부비하는 게 꼴불견이랄까.
음욕을 채우려는 추한 몸짓에 이경은 더러운 벌레 보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기분 나쁜 시선에도 떨어지지 않던 손이 이경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녀의 손을 쳐내는 손길이 거칠었다.
탁!
“아!”
순간 젊은 여자는 제 손을 감싸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경은 그녀와 눈도 맞추지 않은 채 뒤따라온 나이든 여자에게 시선을 줬다.
“어머니, 여긴 뭣 하러 오셨어요? 그것도 저 여자랑!! 곧 퇴원할 텐데.”
“작은엄마가 병원에 가보자고 하더구나. 그래서 겸사겸사 아들 볼 겸 왔지.”
“다신, 오지 마세요. 퇴원하면 찾아갈 테니.”
“그래, 그러마.”
“그리고 그 애는 저 여자에게 주세요. 어머니께서 왜 걔를 돌봅니까!? 저 여자가 돌봐야지. 애도 자기가 안 볼 거면서, 대체 왜 낳았답니까!?”
말은 어머니에게 하면서 누구를 겨냥한 말에 젊은 여자가 인상을 팍 구겼다.
잠시 이경을 쳐다본 젊은 여자가 아기를 이경의 엄마에게서 신경질적으로 뺏어 품에 안았다.
그녀의 거친 손길에 잠자고 있던 아기가 경기하듯 자지러졌다.
“으 ~응애응애!”
우는 아기를 본 두 여자의 행동이 참으로 달랐다.
나이든 여자는 아기용품 가방에서 얼른 분유를 태우느라 바빴고, 젊은 여자는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이경은 그들의 행동에 젊은 여자를 못마땅한 낯으로 계속 쳐다봤다.
그러자 젊은 여자가 이경의 침대 맞은편에 앉아 서슴없이 단추를 풀어 툭, 거칠게 젖을 물렸다.
그리곤 아기가 아니라 맞은 편에 앉은 사내를 응시하고 있다.
“……!!”
순간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무람없는 행동에 이경은 얼른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젊은 여자는 그의 반응을 즐기는 듯 옅은 미소와 함께 그만 바라봤다.
이경이 아들이라곤 하나 엄연히 다 큰 사내 앞에서 저러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아기완 눈도 맞추지 않은 채 그만 바라보는 눈빛이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그것과 닮았달까.
쪽쪽쪽
있는 힘껏 빨아도 나오지 않는 빈 젖에 아기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에게 젖이 나올 리가.
몸매 망가진다며 분유 먹여놓고.
이제 와 젖을 주면 그게 나오나.
누굴 놀리려는 게지. 그것도 제 자식을.
못 땠다. 정말 못 땠다.
배고픔과 서러움에 아기가 울먹여도 아기 엄마는 전혀 상관없는 듯했다.
그저 옆에 있는 나이든 여자만 안절부절못할 뿐.
누가 보면 나이든 여자가 친모인 줄 알겠다.
나이든 여자가 우유병을 건네도 젊은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무시했다.
병실 안엔 아기의 빈 젖 빠는 소리만 들렸다.
쪽쪽쪽
아기와 엄마의 아름다워야 할 장면이 이경에겐 지옥이었다.
‘저 미친 게 어디서 저딴 짓을! 그것도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도 부족해서 나한테까지 저 짓거리야.’
이경의 눈빛이 찰나에 살기를 뛰었다 사라졌다.
*
병실에 앉아 딱히 할 일도 없건만, 경하는 오늘도 그녀 옆에서 간호했다.
어제도 밤새도록 앓았는데, 오늘도 소율은 끙끙 앓고 있다.
수건을 적셔 연신 그녀 이마에 올려주는 손이 다정했다.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데.
‘얼마나 무리했으면 이렇게….’
소율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 갑자기 변신한 순간을 떠올린 경하는 아직도 온몸이 저릿했다.
맑고 투명한 눈에 검은 머릿결이 어찌나 윤이 나는지.
당시 그녀를 도플갱어라 생각하면서도 그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는 걸 힘겹게 눌렀다.
이때도 느꼈지만, 소율은 꾸미지 않아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때가 처음이었지.
소율에 대한 그의 마음을 깨달았던 게.
이런 일이 없었다면 영영 모를 뻔했다.
그리고 얼마 전, 눈앞에 있는 이가 이소율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뻤는지.
소율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조금씩 흐드러졌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언제쯤 깨어날까? 이만큼 앓았으면 나을 때도 됐는데.’
퇴근 후 식사를 거른 채 소율을 간호하던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경하는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무심코 차트를 들여다봤다.
그동안 검사했던 자료 중에 혹시 놓친 건 없는지.
열심히 차트를 넘겨보던 눈이 날짜를 본 뒤, 심하게 흔들렸다.
3월 20일, 그날이 어떤 날이던가?
“내가 지금 뭘… 잊은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리 기일을 잊었다니. 맙소사!”
경하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곤 이내 표정이 굳었다.
그리곤 어금니가 비틀어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뿌드득!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턱이 욱신거렸으나 깨닫지 못했다.
소율 옆에 있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하늘 정원에 온 경하는 2동에 있는 구조헬기 착륙장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
긴 한숨을 연거푸 쉰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여기밖에 올 곳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와 약혼할 뻔한 그녀였건만. 그리 떠나고 기억해줄 이 하나 없는 불쌍한 신세라니.
늘 그에게 물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경하 씨! 이제 한 번쯤은 들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이제 곧 약혼할 건데.’
‘뭘?’
‘사랑한다고. 경하 씬, 나 사랑 안 해?’
‘…….’
‘뭐야, 왜 말을 안 해? 한 번 해봐.’
‘……. 이게, 사랑인진 잘 모르겠어. 좋아해. 너와 있으면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하거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달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면…. 그게, 사랑이지, 뭐야? 다른 사람하고 있으면 안 그렇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럼, 맞네. 사랑하는 거. 자기는 너무 감정에 무딘 게 문제야.’
‘…….’
‘됐어. 이제 그만, 얼굴 풀어. 뭘 죄인처럼 얼굴을 찡그려. 난 자기 찡그리는 거 싫더라. 오늘은 내가 그 정도로 만족할게. 대신, 매일 좋아한다 말하기. 자동응답기처럼.’
‘그건, 좀…….’
‘뭐, 그것도 못해? 내가 이렇게 다 양보했는데. 좋아한다고 해봐.’
‘……이미, 했잖아.’
‘안 해? 나, 안 볼 거야? 빨리!’
‘……좋아해.’
‘또, 또 해봐. 어서!’
‘좋아해.’
‘또, 어서.’
‘그만!’
‘으~응, 자꾸 좋아한다고 해야 사랑한다는 말도 나올 거 아냐. 빨리!’
‘아-! 좋아해.’
한숨과 함께 튀어나온 말을 아리는 못 들은 척 또다시 경하를 재촉했다.
‘또.’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됐냐?’
경하는 성화에 못 이겨 좋아한다, 연거푸 말하곤, 도망치듯 달아났다.
뒤따라오던 아리는 거친 호흡으로 그의 소매 끝을 잡았다.
‘아, 좀, 천천히… 가. 어휴, 숨 차. 자기, 화났어? 장난했는데, 화난 거야?’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던 아리가 계속 좋아한다고 말하라던 때가 떠올라 괴로웠다.
경하는 귀찮아서 건성으로 답했던 그때의 그가 미웠다.
그녀를 생각하던 그의 눈에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서렸다.
‘보고 싶다. 이아리!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