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4. 베일에 싸인 환자
한편 미경과 전화를 끊은 누군가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소율이었어. 그럼,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똑같이 생길 수가 없지. 눈동자도 생김새도. 향기도. 아, 지금은 향기가 안 나는데. 그건, 왜지?’
소율이 누워 있는 병실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았다.
경하는 그가 데려온 이가 소율인지 확실치 않을 땐 어느 정도 거리를 뒀는데.
소율이란 걸 안 뒤, 침대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아 그녀를 정성껏 살폈다.
탐스러운 흑발에 하얀 피부, 예쁘게 빚어낸 듯한 오똑한 코.
거기다 오목조목 예술적으로 배치된 작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얼마나 작은지 그 안에 눈, 코, 입이 다 들어간 게 신기하달까.
이 얼굴을 얼마 전에 봤더랬다.
경호원에게 쫓겼던 할머니를 보호한답시고 그가 나섰을 때, 갑자기 젊은 아가씨로 변했던 그 얼굴.
근데, 그녀가 검사란다.
그래서였나? 이경의 주변을 맴돌았던 게.
뭔가 잘못되었다.
언제부터 검사가 직접 수사에 나섰단 말인가.
검사들은 보통 수사한 서류만 보고 판단하던 이들이 아니었나?
자료가 부족하면 수사관에게 시키면 될 터였다.
일반적인 검사의 모습과 너무 틀어진 모습에 경하 머리에 물음표가 하나 생겼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런 위험한 일을 하지? 그것도 검사가…….’
병실을 나온 경하는 차트를 들여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환자 성명란에 뭐라 채울지.
원래 이름대로 소율이라 써도 될까?
이경과 소율의 병실이 너무 가까운 탓에 쉬이 이름을 작성하기 힘들었다.
그 고민은 어젯밤 이경의 병실을 다녀온 뒤부터 계속되었다.
‘이경아! 너를 참고인 조사한다며 부른 검사가 누구라 했지?’
‘그건 왜!?’
검사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이 나는지, 이경이 입매를 비틀었다.
‘아,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실없기는. 형사 4부 이. 소. 율. 검사란다. 신입이라는데 아주 맹랑해!’
‘너, 혹시 그 검사 얼굴은 아냐?’
‘내가 그. 딴. 얼굴 알아서 뭐하게!? TV만 틀면 예쁜 애들 천진데. 야, 재수 없다. 그 검사 얘긴 하지도 마. 밥맛 떨어지니까.’
이경에게 다녀오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아무 고민도 없이 성명란에 이소율이라 적을 뻔했다.
그럼, 오다가다 간호사 입으로 소율의 이름을 듣고 이경이 펄쩍 뛸 수도 있으니.
소율이 잠입 조사까지 해가며 열을 올리는 걸 보면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있을 거였다.
‘이름을 뭐라 하지? 이소율, 이소율. 이율? 아, 아냐. 너무 남자 같아. 소율? 그래, 그게 좋겠다. 소 씨도 있으니. 이름은 율이다. 그럼, 완전 거짓말도 아니니까. 차트엔 그리 쓰고, 소율 씨가 퇴원하면 다시 바꿔 두면 되겠다. 이경이 있을 때까지만.’
성명란을 채우는 경하의 눈이 웃고 있다.
안 하던 짓도 해보니 꽤 재밌나 보다.
하긴 그가 이런 일을 할 일이 그동안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경하가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소율을 돌본지 벌써 사흘째.
시간 날 때마다 병실에 들러 열을 체크하던 경하는 걱정이 많았다.
지금쯤이면 열이 내리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 열을 잡았다 싶으면 다시 오르고 내리길 반복했다.
혹여라도 그가 놓친 게 있나 싶어 검사해도 나오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단순히 독감을 앓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경하는 괜스레 불안했다.
경하는 알지 못했다.
그가 소율에게 신경 쓰느라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찌 보는지.
오후 3시, 한참 진료에 전념할 시각.
그는 외래 환자를 돌보다가도 한 번씩 떠오른 그녀 걱정에 시계를 보곤 했다.
마치 애인과의 데이트 약속에 늦은 것처럼, 초조해하는 그의 안색에 김 간호사가 눈치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외래 진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쯤, 궁금함에 입이 간질간질하던 김 간호사는 지나가듯 물었다.
“서 선생님! 오늘 약속 있나 봐요.”
“……?”
김 간호사의 뜬금없는 말에 책상을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진료 중에 계속 시계 보시던데. 모르셨어요?”
“……제가 시계를? 그것도 진료 중에 말입니까?”
“네.”
“……!”
경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뭔가 말하려던 뇌는 그와 함께 입까지 얼린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김 간호사는 더 묻지 못하고, 조용히 진료실을 나갔다.
‘뭐야, 전혀 몰랐다는 저 표정! 진짜, 몰랐나? 바보같이! 진료만 끝나면, 소율 씨 병실로 가기 바쁜 사람이. 풋! 모른 척할 걸 괜히 말했네.’
진료실 문을 닫던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이내 괜히 짓궂은 장난 한 것 같아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편 진료 중에 딴짓했다는 사실에 경하는 충격받았다.
항상 인턴이나 전공의에게 진료 중엔 딴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랬던 그가 진료 중에 그랬다니 믿기지 않았다.
‘……아냐, 내가 그렇게까지 했을 리가 없어. 분명 김 간호사가 장난쳤을 거야! 가…가만, 김 간호사가 이런 장난 칠 사람이 아닌데…. 정말 내가 그랬나? 아… 아니, 아니야.’
그놈의 아니라는 말을 얼마나 하는지.
경하는 진료실을 왔다 갔다 하며 그가 들은 말을 부정하기 바빴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남자는 제 안에 꿈틀대는 연애감정이 낯설어 애써 외면했다.
아니 솔직히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율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슬픔과 상황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음을.
그래서 이유도 없이 괜히 호텔에서 그녀 곁을 지켰고.
쓰러진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던 거였다.
당시엔 경황이 없어, 그런 제 감정을 돌아볼 상황이 아니라 모르고 지나갔었다.
만약 그가 연애 경험이 있었고, 상황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었다면.
어쩌면 지금쯤 경하는 소율과 어찌, 어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경하에겐 불행히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돌고 돌아 이제 소율에게 향하는 마음을 확인했지만.
그의 마음 한 편에는 아리에 대한 미안함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게 더 다가오려던 그녀를 경하의 깊은 내면이 그도 모르게 밀어냈던 탓이리라.
*
한편 경하가 어떤 여자를 데려와 VIP 병실에 입원시켰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졌다.
특히 VIP 병실을 전담 마크하는 간호사들 사이에서 소율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특종이었다.
아리가 죽은 뒤, 여자라곤 업무 외엔 눈길도 주지 않던 경하가 백마 탄 왕자처럼 여자를 안고 왔으니.
뭇 여성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김 간호사님! 510호 그 환자 대체 누구래요?”
“……. 몰라.”
“모르긴 뭘 몰라요? 아이, 참! 김 간호사님, 누구냐니까?”
“모른다니까. 정 궁금하면 이 간호사가 서 선생님에게 물어보든가.”
“아, 제가 그걸 어떻게 물어봐요? 김 간호사님은 그래도 자주 그 병실에 들어가잖아요.”
“아, 몰라, 몰라. 그만 물어! 귀찮아 죽겠네. 진짜. 왜 다들, 나한테 물어!?”
김 간호사는 이 간호사의 계속된 추궁에 귀찮은지,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자 뒤쫓기를 포기한 이 간호사가 궁금함에 구시렁거렸다.
“아, 대체 누구지? 누군데, 간호사실에도 환자 이름을 안 밝혀? 김 간호사만 병실에 들어가게 하고.”
이 간호사의 얘기를 다른 간호사가 듣고. 또 다른 이가 들어 소문은 끝없이 퍼져 나갔다.
VVIP 병실의 510호,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진료실 안, 휴식 공간에 있던 경하는 우연히 들은 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냥 응급실로 데려가면 될걸. 왜 여기까지 데려왔데? 미쳤다, 미쳤어.’
바로 코앞에 응급실을 두고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그것도 이리 비싼 병실에 입원시켜 놓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데, 소문이 안 날 리가 있나.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과했음을 깨달은 경하는 이 상황이 기가 차,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곤 연신 마른세수했다.
분명 이건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곤 해도.
*
소문은 약간의 진실과 과장이 붙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갔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단 한 사람만 빼고.
그중 한 명은 지금 들어온 어떤 이를 다소 불쾌한 시선으로 쳐다보다 이내 표정을 풀었다.
“뭐? 경하가 어떤 여자를 데려와서 VIP 병실에 입원시켰다 했습니까? 그래서 지금 직원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藉藉)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죽은 여자를 잊지 못해 여자라곤 돌처럼 여기는 녀석이, 무슨 여자를 데려와!?’
과장의 말에 풀었던 표정이 다시 긴장될 뻔했다.
“예, 아무래도 원장님께서 서 선생을 만나 얘기하셔야겠습니다. 직장에서 추문이 나면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추문이랄게 뭐가 있습니까? 서 선생이 유부남도 아니고. 총각이 여자를 데려올 수도 있지. 다른 곳도 아니고 병원인데, 뭐가 문젭니까!? 여자와 호텔에 간 것도 아닌데, 이 과장이 너무 꼰대처럼 구네.”
“……! 그건 그렇다고 쳐도. 서 선생이 자기 전문 분야도 아닌데 자기가 직접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이거면서 괜히 말 돌리기는.’
“증상이 대체 어떻기에…….”
“독감이랍니다. 흉부외과가 내과에서 할 진료를 해서 부서 간에 마찰이 생길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과장이 원장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말했다.
“…….”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린 원장이 침묵한 채 과장을 바라봤다.
“마찰이 생긴다…. 이 과장! 경하가 데려온 환자는 내가 치료하죠. 그러면 되겠습니까?”
“……예, 원장님께서 치료하신다면야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원래 그쪽 전문이시니.”
‘뭐야, 아무도 토 달지 말란 뜻인가? 그래도 제 새끼라고 감싸기는.’
원장실을 나가던 과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젊은 녀석이 남들보다 2년이나 일찍 전문의가 돼서 한번 꽉 밟아주려 했더니. 원장님이 또 그걸 막네. 흉부외과에 버젓이 과장이 있는데도 수술 좀 한다고 설치는 게 꼴사나워 죽겠다!’
사실 이 과장은 오늘, 날을 잡았더랬다.
서 선생 잡는 날로. 오늘 그는 누구도 반박 못 할 명분이 있었다.
흉부외과에서 내과 진료를 하다니.
헌데도 그의 뜻은 원장에게 묵살됐다.
과장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오늘 아주 물고기가 사막에서 물을 만났지. 간만에 경하 꼬투리 잡을 게 생겨서. 저 인간은 언제쯤 철이 들는지. 하여튼 후배가 치고 올라오는 꼴을 못 보니. 누가 저를 따를까? 감기 정도야 아무나 치료하면 어때서.’
과장이 나가고 잠시 생각에 빠진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5층에 갔다.
의사 간의 기 싸움은 빨리 해결하는 게 낫다.
어차피 원인 제공자도 서 선생이니, 그를 족치는 게 빠른 해결책이리라.
서로의 분야에 대해선 건드리지 않는 게 원칙.
종합 병원에 분야별 전문의가 왜 따로 있겠는가.
그건, 보다 전문적인 치료를 위한 것일 터.
의사들의 관행을 너무 잘 아는 원장은 빠른 걸음으로 간호사 대기실로 갔다.
사실 그는 궁금했다.
평소 냉정을 유지하던 녀석이 관례를 깨고, 직접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대체 어떤 환자길래 이 난리야. 내가 보고 아니다 싶으면 이 녀석을 그냥! 확 패대기를 쳐야 정신 차리지.’
속으론 이리 생각해도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뒤 병실에 온 원장은 눈 감고 있는 환자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소율의 건강을 체크하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차트를 봤다.
“김 간호사! 앞으로 이 환자는 제 환잡니다. 지금부터 모든 오더는 저를 통해 내리세요. 경하는 빠지게 하고.”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에게 필요한 오더를 내린 뒤, 병실에 있던 원장은 경하가 왜 그랬는지 알 거 같았다.
‘눈을 떠봐야 알겠지만, 그 아이와 느낌이 비슷하네. 그래서 그런가?’
병실로 들어오던 경하는 원장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아버지! 여긴 어떻게?”
“아버지!? 여긴 병원이다. 지금은 근무 시간이고. 너는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해!?”
“…….”
과장에게 욱한 심정을 아들에게 뱉어낸 인석이 감정을 억누르며 아들을 살폈다.
“언제부터냐?”
“……?”
질문에 당황한 경하가 말없이 머릿속에 의문을 띄웠다.
“언제부터냐니까. 왜 대답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