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2. 제발 빨리 퇴원해라. 내가 자꾸 누가
‘아, 그래서.’
“아… 아닙니다. 저희가 할 일인데요.”
노트북을 줍는 경호원을 쳐다보던 차가운 시선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경호실장님께 말씀드려 노트북을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귀찮게 해서.”
“아… 아닙니다.”
‘사람이 정말 괜찮네.’
경호원은 묵례하며 웃는 낯으로 병실을 나왔다.
경호원이 다 부서진 노트북을 들고나오자 지석이 못마땅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또? 하-!’
*
이경의 병실을 나오는 경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경아! 제발 빨리 퇴원해라. 내가 자꾸 누가…. 후!’
지금까지 경하가 기억하는 여자는 단, 둘.
아니, 소율까지 포함하면 셋이었다.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떠난 엄마.
첫인상이 강렬했던 만큼, 왠지 모르게 안타까워 어깨를 빌려주고 싶던 소율.
그리고 엄마에게 받은 상처를 잠시나마 위로해 주던 아리.
아리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여자였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6년이나 아리와 사귀었지만, 연인이라기보단 편안한 친구 같았다.
힘들거나 외로울 때 위로가 되고, 기분 좋아지는 친구.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경하는 이런 감정 또한 연애와 같으리라 여겼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다들 친구에서 시작해 연인이 되고, 아내가 된다고.
근데, 그녀의 장례식에서 깨달았다.
‘뭐지, 분명 마음이 아프고 슬픈데…. 나는 왜, 저들처럼 저렇게까지 눈물이 안 나올까? 저들은 저리 괴로워, 가슴을 쥐어뜯는데.’
가족과 애인을 잃은 이들의 통곡을 보면서 경하는 아리에게 미안해졌다.
‘이아리! 나만, 이런 걸까? 너는 내가 너처럼 먼저 떠났다면, 저들처럼 울어줬을까? 하-!’
모르겠다, 그녀가 저들처럼 울었을지.
감정이 메말라도 이리 마를 수가.
아리를 땅에 묻고 온 날, 경하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만 해도 감정이 무뎌 그런 거라 치부했건만.
며칠 전, 소율의 도플갱어를 본 순간, 경하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외모뿐 아니라 소율과 같은 향을 풍긴 탓일까?
그는 순간 울컥했다.
‘지금, 내가, 왜…?’
아리가 죽었을 때도 이유 없이 이랬던 적이 없었건만.
그저 닮은 사람을 봤다고 이러는 게 기막혔다.
그와 소율이 대체 무슨 사이였다고.
겨우 말만 몇 번 섞었을 뿐인데.
갑자기 왜 이리, 그녀 이름을 부르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 경하는 오늘따라 아리가 더 보고 싶었다.
‘이아리, 하-!’
그로부터 며칠 동안 경하는 정말 미친 듯이 일만 했다.
흉부외과라는 곳이 돌아서면 수술이 있던 터라.
일부러 일을 만들지 않아도 환자들이 몰려 정신없었다.
많이 피곤해서일까?
아니면 직업 탓일까?
경하는 일할 때만큼은 실수를 용서하지 않았다.
환자들에겐 그리 다정하면서.
의료진에겐 냉정하다 못해 비수를 꽂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김 선생! 지금 장난쳐! 내가 김수경 환자 수술 들어가야 한다며 환자 상태 체크하고, 보호자에게 주의 사항 알리라고 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그런데, 수. 술. 하. 는. 날. 에 식. 사. 하고 오게 하면 어. 떻. 게. 어, 어떻게 수술하는데!! 김 선생은 그런 특. 별. 한. 재주가 있나!?”
중저음의 목소리가 독기를 품은 듯 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김 선생은 그도 모르게 몸이 쭈그러들었다.
수술이 한시가 급한 환자라 평소보다 더 말에 살기가 품어 나왔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 다른 이들조차 숨쉬기 힘들었다.
분위기를 바꾸려 누군가 말을 걸다가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눈치만 봤다.
그는 눈빛 하나로 여럿 죽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로 설명했는데, 깜빡하셨나 봅니다.”
“김 선생! 환자에게 말로 설명하면 환자나 보호자가 그걸 다 기억해!? 프린트해서 일일이 별표 해가며 주의 사항을 설명해야 할 거 아냐!?”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경하는 감정이 실려 더욱 사나워졌다.
“……죄송합니다. 서 선생님!”
미안한 마음에 바닥만 내려다보는 김 선생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게 지금 미안하다면 끝날 일이야!? 끝날 일이냐고!!”
“…….”
“사과는 나한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환자분에게 가서 해. 수술 미뤄지면 환자분 고통만 가중되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미치겠다. 내가 왜, 그런 실수를?’
김 선생은 수술 전, 후 주의 사항 전달을 너무 안일하게 했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웠다.
그 중요한 걸 잊다니. 김 선생은 어제의 그를 찾아가 죽여버리고 싶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현실.
김 선생은 자괴감에 허우적댔다.
“김 선생! 앞으로 내 눈앞에 뛰지 마!”
“……! 서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김 선생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급히 무릎을 꿇은 김 선생은 바지 끄덩이에 매달리듯 통사정했다.
“시끄러! 거기, 정 선생! 뭐합니까? 당장 김 선생 끌어내! 꼴도 보기 싫으니까.”
경하의 말에 정 선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들 눈치 보기 바빴다.
“서 선생님!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어! 환자 수술 일정 잡히면 환자분에게 계속 주의 사항 전달하라 했잖아! 만약 오늘 일로 수술이 늦어져서, 환자가 잘못되면, 네가 책임지나? 그 책임은 환자와 내가 지는 거야. 알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서 선생님!”
김 선생의 사정에도 서릿발 같은 말은 끊이지 않았다.
실수를 꾸짖는 살벌한 말이 그에게 박힐 때마다, 김 선생의 자세는 바닥으로 치달았다.
사과하던 김 선생의 목소리도 점점 기어들어 갔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김 선생의 실수가 워낙 커서,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김 선생! 지금 당장 김수경 환자에게 수술이 늦어졌다고 설명하고, 환자와 보호자께 사과해.”
“……예.”
“뭐해!? 빨리 가!”
“아, 예.”
다 죽어 가는 낯으로 의국을 나가는 김 선생의 뒷모습이 짠했다.
경하는 그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선생! 김수경 환자, 네가 담당해. 앞으로 김 선생은 내 수술팀에 넣지 마.”
“……네, 알겠습니다.”
“이 선생! 지금 당장 김수경 환자 수술 날짜, 최대한 일찍 잡아. 환자에게 수술 전, 후 주의 사항 확실하게 인지시켜드려. 10번이든 100번이든.”
“네.”
한바탕 폭풍우가 휘몰아친 의국 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넋 놓고 있는 사내에게 뭐라 위로할지 막막해 쳐다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계속된 무거운 분위기에 하나, 둘, 일하러 가고, 이제 남은 의사는 둘이었다.
“김 선생! 기운 내.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예.”
영혼이 빠져나간 기운 없는 대답에 동료가 불쌍하게 쳐다봤다.
“김 선생, 서 선생 말이 다 맞아. 수술 못 해서 환자가 잘못되면 그 죄책감이 얼마나 크겠어.”
서 선생 말에 하나라도 틀린 게 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이렇게 비참하지나 않지.
옳은 말만 하니 뭐라 반박할까.
게다가 이 모든 게 저로 인한 잘못이라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젊은 나이에 어려운 수술을 몇 번이나 성공한 유명한 의사, ‘서경하’
그의 손기술과 뛰어난 상황 판단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수술팀에 들어오기 위해 밤잠을 설쳤건만, 그 노력이 터무니없는 실수로 허사가 되었다.
‘등신, 등신!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해. 바보 멍청이! 멍청이! 아-!’
김 선생은 답답함에 제 가슴을 퍽퍽, 때렸다.
그 뒤로도 서 선생은 가장 기초적인 실수를 한 인턴에게 절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병원 인턴들은 그런 서 선생을 ‘독사’라 불렀다.
“조심해! 독사에게 찍히면 네 인생 끝이야. 끝! 두 번 다시 기회 없어.”
흉부외과 주변엔 경하를 배회하는 인턴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그래서일까?
서 선생 밑에 있던 인턴, 레지던트들은 그가 인상을 구기면 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뭐지? 내가 또 실수했나?’
그들은 언젠가부터 서 선생의 기분에 따라 울고 웃는 그런 날이 많아졌다.
*
온종일 환자들과 너무 씨름했을까?
파김치가 된 경하가 의자에 털썩 등을 붙여 앉았다.
긴 다리를 꼰 그는 머리를 젖혀 두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답답했는지 와이셔츠 단추 두 개를 풀었다.
잠시 뒤, 여자 인턴들이 필요한 서류를 가져가려다 눈 감고 있는 그를 쳐다봤다.
반듯한 이마에 흘러내리듯 흐트러진 머리에 그들 시선이 머물렀다.
눈을 감아서일까?
시원스럽게 뻗은 그늘진 눈매가 무언가 사연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
날카로운 턱선과 높이 솟은 콧날은 섬세하게 빚은 예술품과도 같았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그의 굵고 긴 목에 자리 잡은 목젖.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언뜻 보이는 반듯한 쇄골.
탄탄한 근육에 시선이 멈추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 순간 볼이 발그레해진 그들은 얼른 의국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빨개진 서로의 얼굴을 보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생님도, 그렇… 죠?”
“……예, 저도.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두고 누가 상상 안 하겠어요?”
“후, 서 선생님은 관심도 없는데. 저는 왜 이렇게 선생님만 보면 떨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녀 말에 자기는 아니라 할 수 없던 그들은 헛웃음만 나왔다.
환자에겐 그렇게 다정하게 웃어주던 그는 한 번도 여자 동료에겐 웃지 않았다.
그저 업무에 대한 지시만 내릴 뿐.
쌀쌀맞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그의 냉정한 말에 인상 써지다가도 그녀들은 그의 외모에 모든 걸 잊어버렸다.
뭇 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며 그가 뱉어내는 날 선 말이 분명 아파야 하는데, 그것조차 달았다.
그녀들은 생각했다.
환자들에게 주는 다정한 눈빛을 그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
화장실에 도청기를 설치한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 수사관님! 저 이소율이에요.”
- 아, 검사님!
“어때요? 도청은 잘 돼요?”
- 네.
“다행이네요. 특별한 정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저는 잠시만 쉬었다 그리로 갈게요.”
- 검사님! 오늘은 제가 여기 있겠습니다. 검사님도 좀 쉬셔야죠.
“저는 괜찮아요. 세 시간 뒤에 교대하러 갈게요.”
-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규진은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이고, 저러다 쓰러지지. 벌써 며칠째야?”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규진은 도청되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소율은 씻으러 들어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내가 너무 변장을 많이 했나? 이젠 내 모습이 더 어색해.”
맑고 투명한 피부를 가진 그녀는 눈에 낀 서클렌즈를 빼고 작은 욕조 안에 들어갔다.
그동안의 피로가 너무 쌓였는지.
잠시 눈 감고 있다는 게 그만 잠들어 버렸다.
뚜두두 뚜두두 ♪
어디선가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의식을 차린 소율.
타월을 걸친 채 비틀거리며 욕실을 나온 그녀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얼마 뒤,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다시 울렸으나 기계음 끄는 손이 없었다.
침대에 쓰러지듯 곯아떨어진 소율은 어느 순간, 끙끙 앓았다.
따르릉따르릉!
“여보…세요.”
목이 잠겨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그녀.
- 여보세요. 이 검사님!! 무슨 일 있어요!? 출근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수화기 너머로 중년 여자 목소리가 자랑자랑하게 들렸다.
목소리 톤이 어찌나 높은지. 그녀가 말하는 동한 소율은 수화기를 멀리 두었다.
수화기를 그리 멀리 두어도 그녀 목소리는 정확하게 토시 하나 안 빼고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소율은 자기 말할 차례가 되자 힘들게 수화기를 귀에 가까이 댔다.
“죄송해요. 에에… 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