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8. 드디어… 만났네요.
거의 통보식으로 내뱉는 경하의 말에 경호원은 입매를 비틀며 그를 저지했다.
“안 됩니다! 이 할머니는 어제 VIP 병실에 침입한 사람입니다. 해서, 저희 쪽에서 조사할 겁니다.”
‘VIP 병실? 그럼, 그것 때문에 거기 있었던 건가?’
경하는 이제야 이해가 된 할머니 행동에 힘주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경호원들이 그의 보호 속에 있던 할머니를 급히 데려갔다.
“총각,… 총각!
“…….”
“총각!!”
할머니의 다급한 소리에 정신을 차린 경하가 급히 그들을 불러 세웠다.
“사람이 VIP 병실을 지나쳐 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근무하는 직원들도 다 조사해야지.”
“그런 게 아닙니다. 이 할머니는 어제 중요한 얘기를 하는 걸 귀가 안 들리는 척하고 엿들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엿들으려고 했던 게 아닐 겁니다. 다리가 아파서 그렇게 있었을 뿐이지.”
“그건 또,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이렇게 잘 걸으시는데. 귀도 잘 들리시고.”
경호원과 경하의 시선이 그들 얘기에 집중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쏟아졌다.
그러자 당황한 할머니가 경기하듯 말을 쏟아냈다.
“내… 내가 언제 귀가 안 들린다고 했는데!? 나, 귀 잘 들려! 다리가 아파서 그렇지. 그래도 다리를 절 정도는 아냐. 무엇보다 나는, 어제 병원에 온 적도 없다니까.”
“할머니, 여기 증거가 있는데도 발뺌하실 겁니까?”
옆에 있던 경호원이 폰에 있는 사진을 보여 주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사진을 본 할머니는 저도 모르게 놀라 입을 가렸다.
경하는 경호원이 건넨 핸드폰에 있던 사진을 짐작한 탓에 표정 변화가 없었다.
“증거! 이제 됐습니까? 할머니는 저희가 모셔갑니다.”
경하라는 방해꾼을 걷어낸 경호원들은 속이 후련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데려갔다.
“총각, 총각! 아냐, 나 아니라고. 총각!!”
“……!”
어제 변장한 얼굴의 할머니가 낯빛이 하얘져선 그를 애타게 불렀다.
건장한 사내에게 끌려가는 할머니의 연약한 몸이 축 처져선 세상을 다 잃은 듯했다.
경하의 눈이 할머니에게 닿은 순간, 그는 다시 경호원의 발목을 잡았다.
“잠깐, 그 사진은 증거가 안 돼.”
뒤돌아보던 경호원은 그의 말 같지 않은 소리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많습니다. 할머니 외모는 다들 비슷해서 옷에 따라 달라질 뿐이지. 내가 보기에 사진 속의 인물은 지금 그 할머니와 닮았지만, 말투가 완전히 달라! 아닌가?”
“말투가 다르다니!”
“내가 알기론 사진 속의 할머니는 사투리를 썼던 거 같은데. 아닙니까!?”
경하가 던진 질문에 경호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내 말이 믿기 힘들면, VIP 병실에서 그녀를 상대했던 이에게 물어보죠. 아마 내 말이 맞을 겁니다.”
경호원들이 무전기로 할머니에 대해 알아보기 바쁠 때였다.
그들에게 끌려가던 할머니는 머리에서 어떤 신기한 소리가 들렸다.
딸랑딸랑! 아, 이거 아닌가?
댕~ 댕 댕! 어디선가 들리는 종소리!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을 때나 울릴 법한 그런 소리가 할머니 귀에 들린 순간이었다.
한 여자만을 위한 잘생긴 수호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났으니.
구원받기 일보 직전이라.
어제 변장한 얼굴의 할머니가 그를 쳐다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한없이 휘어진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이미 현생의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곧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목소리는 또 어쩜 저리 부드러운지.
그녀에게 다가온 손길은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두려웠던 마음을 사르르, 녹여 버렸다.
할머니는 그의 얼굴에 취하고, 목소리에 녹아들고, 다정한 말에 빠져들었다.
그랬던 그녀가 제게 다가온 귓속말을 듣곤 꿈에서 확 깨버렸다.
“할머니, 어젠 어떻게 된 겁니까?”
‘……?’
“에이, 할머니,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자꾸 연기하실 겁니까? 자꾸 이러시면 저들에게 일러줄 겁니다.”
“……! 뭘?”
“할머님이 저들이 찾는 사람이라고.”
‘……! 뭐야? 저 녀석이, 이제껏 그랬던 게 다른 할망구 때문이었어? 이런 남사스럽게시리.’
몇몇 경호원이 VIP 병실 앞에서의 일을 다른 경호원에게 듣는 동안 이들은 작게 속삭였다.
사실 이들 대화의 끝이 한쪽의 일방적인 실망으로 끝났지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할머니가 그를 불편하게 바라봤다.
그녀의 급달라진 태도에 경하는 잠시 얼떨떨했다.
‘뭐지, 이 느낌? 똑같은 얼굴에 체격도 비슷한데, 왜 다른 사람 같을까? 말투야 원래 사투리도 쓰고, 표준어도 썼다지만. 이상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유심히 보던 경하는 그녀가 너무 낯설어 혼란스러웠다.
‘와, 내가 그리 좋나? 어이그, 보는 눈은 또 있어 가꼬. 내가 좋으면, 좋다 말해라. 찝쩍대지 말고.’
‘맞지… 나 좋아하는 거… 으~응 응?’
‘니, 그래서 내, 배웅 나왔나. 으, 내, 그리 말렸는데도.’
어제 일을 떠올린 경하는 저를 부르는 호칭이 ‘니’에서 ‘총각’으로 바뀐 것에 놀랐다.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꾸미지 않은 노인이 향수를 쓰지 않았을 텐데, 그녀에겐 특별한 향이 났다. 소율이처럼. 그런데, 이 할머니는 이렇게 차려입었는데도, 그 향이 안 나.’
그녀를 의심하던 경호원이 있어도 농담까지 건네며 여유 부리던 모습이 그의 눈에 선했다.
그녀 고유의 흐드러진 눈웃음도.
‘이 할머니는 어제 그 할머니가 아냐. 경호원을 대하는 태도에 전혀 여유도 없고. 뭐지, 그냥 닮은 사람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경하는 손으로 목을 감싼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무전을 끝내고 온 경호원이 그에게 뭐라 하는 걸 못들을 정도로.
“음, 제가 알아보니, 사투리 쓴 건 맞습니다. 하지만 사투리 정도야, 고향이 그쪽이라면 얼마든지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 있으니. 어쨌든, 이분을 모셔가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
경호원은 말하면서도 혹여라도 경하가 또 토 달까 싶어 그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그들 예상을 깨고 그가 반응이 없자 그들은 반색하며 할머니를 데려갔다.
또다시 거친 사내에게 잡힌 할머니는 사색이 되어 바르르 떨었다.
*
허리 굽은 할머니는 로비 앞에서의 소동을 본 뒤,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졌더랬다.
그로부터 몇 분 뒤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로비 앞에서의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요, 그 일을 해결할 유일한 사람.
어제 VIP 병실 앞에서 본 복장 그대로의 그녀였다.
2층 난간에서 양팔을 짚고 있던 할머니는 경호원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하! 뭐야? 아직도 저러고 있어?’
“니들, 거 뭐하노? 내, 여 있는데. 거는 아이다. 딱 보면 모르겄나. 빙시 아이가!”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몸짓과 표정에서 비아냥거림이 잔뜩 묻어났다.
그들 자존심을 박박 긁는 말투에 경호원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야, 빨리 쫓아!!”
그들을 자극한 그녀의 말 때문일까?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경호원들은 일제히 그녀를 향해 내달렸다,
다다다 다다
한편 소리 나는 쪽으로 올려다본 경하는 괜히 그녀가 반가웠다.
‘어? 저 목소리다.’
그때 경하는 할머니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어디론가 급히 가는 걸 봤다.
‘음, 아냐, 분명 연기일 거야. 저래 놓고 또 갑자기 사라지지.’
그는 이미 그녀에게 한번 속았다.
한번 속아봤기에 두 번 다신 당하고 싶지 않았다.
해서 무시하려 했다. 무시하고 싶었다.
마음은 분명 그럴진대.
그의 눈이 계속 그녀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할머니 한 사람 잡겠다고, 저렇게 많이 쫓아가? 이건 너무 하잖아!’
그의 마음이 급해졌다.
경하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3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그답지 않게 닫힘 버튼을 계속 누르는데.
오늘따라 문은 왜 이리 늦게 닫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나온 그는 비상구 문을 거칠게 벌컥, 열었다.
3층 정도면 할머니와 만나기 딱 적당한 곳이라 여겼건만. 이곳이 아니었다.
병원에 있는 비상구만 해도 총 아홉 군데.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분명 이쪽 비상구로 가는 걸 봤는데, 이곳이 아니면 저쪽인가.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걷던 경하는 어느 순간 뛰기 시작했다.
다다다!
얼마나 그렇게 뛰었을까?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라라라라 라라라 ♫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경하는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냈다.
- 서 선생님!
“네, 서경하입니다.”
- 어디세요?
“병원입니다. 급한 환자… 있나요?”
- 1시간 뒤에 수술 예정이라,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후,… 아, 그렇군요. 수술에 필요한… 검사부터, 해 주세요. 후-! 수술 시간 전에… 허, 도착할, 겁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경하의 거친 호흡에 간호사는 덩달아 호흡이 가빠지는 듯했다.
-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후-! 헉헉!”
- 그런데, 선생님! 지금, 다 죽어가요!
‘……!’
경하는 저도 모르게 끙 소릴 냈다.
“아, 지금… 뛰어가고, 있어서. 있다, 뵙죠.”
뚝!
다 죽어가는 호흡을 마지막으로 들은 간호사는 저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었다.
“음, 하하하하!”
요란한 웃음에, 옆에 있던 간호사가 의아한 듯 쳐다봤다.
그녀는 얼른 입술을 꾹 다물곤 웃음을 참았다.
그녀의 노력에도 조금씩 삐져나오는 웃음을 다 막기엔 불가항력이었다.
‘으흐흐, 그 완벽주의자가 좀 뛰었다고, 그렇게 숨을 헐떡이네. 누가 보면 오해하게. 흐흐흐!’
전화를 끊은 경하는 숨을 헐떡이는 저 자신을 원망했다.
‘후! 바빠서 운동 안 했더니, 겨우 이 정도로… 힘들어하네. 내가 이런데, 할머니는……?’
불안했다.
그가 왜 이리 불안한진 모르겠으나 무작정 뛰었다.
뛰고 또 뛰고, 미친놈처럼 비상구 계단을 헤매고 다녔다.
한동안 아무것에도 관심도 없던 그가 어제 나타난 할머니 때문에 달렸다.
잠잘 시간도 부족한 경하가 맹목적으로 그녀를 찾아 헤맸다.
누가 보면 진짜 할머니를 좋아하는 것처럼.
아무리 약한 이를 돕고 싶은 마음이라 해도. 지금 그의 행동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
다다다!
경호원들의 빠른 발놀림에 할머니는 괜히 나섰다고 생각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병원에 오자마자 볼일은 시작도 못 하고, 이리 뜀박질하게 생겼다.
비상계단을 달리는 할머니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아, 진짜 미치겠다. 내가 왜, 거기서 나서는데!?’
계단을 달리던 그녀는 위·아래에서 좁혀오는 포위망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사전에 병원 구조를 미리 파악해 두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지금 어찌 되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다다다 다다
위쪽으로 달려오는 경호원들의 우렁찬 발소리가 밀폐된 공간에서 점점 크게 들렸다.
어느덧 그들과 그녀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나도 뜀박질 좀… 해야겠다. 다리가 저들보다 짧아서 그런가?’
위쪽으로 올라가던 할머니는 위에서 내려오는 여러 명의 구둣발 소리에 방향을 틀었다.
할머니가 급히 문에 손을 댄 순간, 벌컥!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휴-! 허, 허… 드디어… 만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