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사라진 할머니
잠시 뒤, 경하가 병실에서 나오자 할머니가 힘겹게 일어났다.
“어 구구! 에고, 허리야.”
할머니는 허리에 통증이 있는지 신음과 함께 허리를 짚었다.
육십에서 칠십 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어쩐 일인지 경하와 일정 거리를 두고 다리를 절며 뒤따랐다.
그때 누군가 뒤쪽에서 그녀를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여기 계시면 안 돼요! 할머니는….”
할머니는 간호사의 말에 잠시 미간을 좁혔다.
“어? 뭐라꼬?… 나 여 있으면… 안 되나?”
“예, 할머니 병실은 9층에 있잖아요. 여긴 VIP 전용층이에요!”
“뭐? 그게… 뭐꼬?”
생전 이런 말을 처음들은 듯 그녀의 얼굴에 주름이 늘었다.
거기다 안 들리는 귀로 간호사의 말을 들으려니 더 그랬다.
“VIP 병실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뭐? 여가 특별하다꼬? 그라믄 내 여 있는 거 맞네.”
“예?”
“맞다, 아이가. 내 특별하거든.”
앞서 걸어가던 경하가 그들 대화에 잠시 걸음을 멈추곤 뒤돌아왔다.
“하하하! 할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특별하죠! 안 그래요, 김 간호사님?”
“아,……네.”
경하의 윙크에 김 간호사가 마지못해 장단을 맞췄다.
“김 간호사님! 이분 병실 어딥니까?”
“그분 9층에 있는 치매 환자 병동에서 봤어요. 거기 제 친구가 근무하거든요.”
“아, 그렇군요. 제가 모셔다드리죠.”
“거는 싫다. 여가 넓어서 좋다, 아이가.”
다정한 눈빛을 장전한 경하가 그녀 말에 장단을 맞추며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예, 좋지요. 그런데 여기는 할머니께서 치료를 제대로 못 받습니다! 그러니 9층으로 가시죠.”
할머니는 9층으로 가란 말에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그가 이끄는 손을 굳이 밀어내진 않았다.
“그라믄 니가 내 거기 데려다줄 기가?”
“왜요? 저와 가고 싶으세요?”
다정한 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어두침침한 눈으로 경하를 올려다본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얼마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뒤쫓아오는 이들을 할머니가 슬쩍 보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할머니는 경호원의 당황한 표정을 보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좁은 공간 안엔 경하와 할머니 단둘뿐이었다.
잠시 침묵 속에 있던 할머니가 경하를 슬며시 쳐다봤다.
할머니의 시선을 느꼈을까?
시선을 돌리려던 할머니와 다정하게 미소짓는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경하의 따뜻한 손이 할머니 손에 닿은 순간, 그녀 어깨가 꿈틀거렸다.
“할머니! 장갑은 왜 끼셨어요?”
“어? 으, 너무 추버서.”
“예? 추워요!?”
“응, 춥다, 아이가.”
‘뭐야? 지금 봄인데. 날씨 감각이 둔해지신 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경하가 할머니 손을 커다란 두 손으로 포근히 감쌌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제 체온을 나눠 주려는 듯 포근히 감싼 손에 할머니는 넋이 나갔다.
손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점점 위로 올라와 얼굴에서 멈췄다.
천천히 휘어지는 주름진 눈이 한눈에 보기에도 반한 듯했다.
아! 안 돼. 할머니! 이성을 찾으셔야죠! 손자뻘에 그렇게 침 흘리시면. 으, 남사스럽게!
어디선가 들릴 법한 이런 소리에도 그녀는 상관없어 보였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꽤 생겼네. 아, 아니다. 아주 잘 생겼지. 친절하고. 여자 꽤나 후리겠다.’
경하를 대체 어디서 봤을까?
그녀 얼굴에 흐뭇함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그를 보는 듯 얼굴 가득 씁쓸함이 묻어났더랬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경하는 할머니가 다칠세라 손에 힘주어 그녀를 보호했다.
“할머니! 다 왔어요. 조심, 조심하세요.”
엘리베이터 문을 한 손으로 잡고 할머니를 이끄는 손이 참으로 친절했다.
그의 부드러운 이끌림에 약간 더운 거 같았으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게 처음으로 느낀 설렘이라는걸.
할머니는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근데, 할머니에게 왜 저렇게 눈웃음을 쳐? 꿀 떨어지겠네. 어? 잠깐, 혹시 지금…. 이상해!’
그의 지나친 꿀 떨어지는 눈빛에 할머니는 괜히 불안했다.
그녀는 급히 시선을 돌려 주변에 있는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뭐지? 변장한 얼굴은 그대론데. 할머니에게 왜 이렇게까지 친절해? 계속 실실 웃어 대고. 설마, 이 사람, 할머니만 보면 이상한 짓 하는 변탠가?’
일순간 그를 쳐다보던 할머니의 눈빛이 냉기가 철철 흐를 정도로 차가워졌다.
할머니는 눈앞에 있는 사내의 과잉친절을 곡해했다.
그녀의 오해가 다정히 부축하는 사내의 손길을 무심하게 걷어내는데.
‘왜 저러시지? 좀 전까진 내게 거의 안기다시피 기대시더니. 혹시, 그거… 때문인가?’
경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치매 때문이라 여겼다.
해서 애써 나오지 않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살벌한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했다.
그의 노력에도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라라라 라랄라라 ♬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경하가 급히 전화 받았다.
“네, 서경하입니다.”
- 서 선생님! 응급 환자예요. 빨리요. 빨리!
“알겠습니다. 빨리 갈게요.”
통화를 들은 할머니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잘됐다. 이제 떼어 낼 수 있겠네.’
“아, 어여 가. 내 병실 찾아가꾸마. 어여 가라.”
“괜찮겠어요?”
‘할머니께서 귀는 밝으시네.’
“그래, 내 개않다. 어여 가.”
‘빨리 가라 좀. 그래야, 내가 일하지.’
그녀는 얼른 떼어내고 싶은 걸 숨기곤 그를 위하는 척 말했다.
경하는 할머니를 이리 두고 가기 불안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던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님! 이분 좀, 병실에 모셔다드리세요.”
얼떨결에 할머니를 맡게 된 간호사는 처음 보는 환자라 당황했다.
“할머니! 여기 병동 환자분이세요?”
“아니,… 아이다. 내는 이제 퇴원할 기다.”
“퇴원 수속은 하셨어요?”
“응, 아들이 했다 아이가. 내 여 옷 갈아입으러 왔다. 저에 내 짐이 있거든.”
할머니가 세탁물 보관소 근처를 가리키자 간호사는 그쪽을 쳐다봤다.
“어디요? 어디 말이에요? 저기는, 세탁물 두는 곳인데요.”
‘어, 할머니 어디 가셨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까만 해도 옆에 있던 할머니가 사라졌으니.
보호자 없이 치매 환자를 그냥 보냈다간 뉴스에 날 일 아닌가.
치매 병동에서 할머니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간호사의 낯빛이 흙빛이 되었다.
할머니를 찾아 헤매는 간호사의 발걸음이 몹시도 빨라졌다.
*
엘리베이터 입구에 멈춰선 무리가 낭패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야! 놓쳤어?
VIP 병실 앞에 있던 경호원이 초조한 마음에 무전기를 고쳐잡았다.
“어, 금방 따라왔는데. 그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졌어.”
-야, 더 찾아봐. 다리를 절던 노인이 그 몸으로 어딜 가. 근처에 있을 거야.
“알았다. 바쁘니까 무전은 나중에 하자. 오버.”
무전을 하면서도 지나가는 이들을 훑는 시선이 예리했다.
경호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눈에 불을 켜고 할머니를 찾아다녔다.
한편 이경의 병실에서 나오던 지석이 경호원들의 부산함에 그들을 살폈다.
“젠장! 전무님 아시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경호원의 푸념에 가까운 말에 지석이 다가왔다.
“뭐야, 뭐가 큰일 나?”
“……! 그렇게 큰일 날 것까진 아닌데. 좀 이상한 게 있어서….”
혼잣말하던 경호원은 갑자기 다가온 지석에 깜짝 놀라 말끝을 흐렸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어떤 할머니가 병실 주변에 왔다 갔다 하셔서 딴 곳으로 가시라고 했더니 귀가 안 들린다며 계속 있었습니다. 근데, 간호사와 얘기할 땐, 조금 들리는 거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그거야 뭐 상관없지 않나? 경호하면서 수다 떠는 것도 아니고.”
“……!”
무심히 툭 던진 지석의 말에 경호원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경호원은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그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실장님, 아무래도 저희가 실수한 거 같습니다.”
“……?”
“할머니가 못 듣는 거 같아서 저희끼리 회사 얘기를 잠깐 했었습니다.”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옆에 사람이 있는데, 그런 말을 왜 하는데!?”
“죄송합니다. 단지 연락 두절인 쇼호스트가 이상하다고만. 그게 답니다. 실장님!”
“정말, 그것뿐이지?”
“예.”
“그럼, 됐어. 그건 우리 탓도 아니니까.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할머니가 그걸 들었어도, 큰일 날 일도 아니고. 그냥 넘어갑시다.”
지석이 너무 피곤했을까?
그답지 않게 대충 넘어가려 했다.
피곤함에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지석이 시선을 돌리려던 그때, 경호원이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실장님! 한가지 이상한 게, 여기 있을 때만 해도 다리가 아파서 절던 할머니가, 어떻게 순식간에 이곳을 빠져나갔을까요?”
지석은 순간 머리를 뭔가에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표정이 차갑게 바뀐 지석이 경호원의 멱살을 쥐고 언성을 높였다.
“뭐,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하는데!!”
지석은 원치 않은 정보가 노출되었다는 생각에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사진은 찍어뒀어!?”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호원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전송했다.
할머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지석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전 경호원들은 들어라! 지금부터 사진에 있는 할머니를 추적한다. 환자복을 입고 있으나 옷을 갈아입었을 수도 있다. 또한, 연기도 가능하니 속지 말도록!”
*
경호원에게 수상한 인물이 다녀갔음을 들은 지석은 급히 병실로 갔다.
병실 밖 사정을 설명하는 지석의 낯빛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경찰이나 기자가 왔다간 거 같습니다.”
“뭐, 앞에 있는 애들은 뭘 하셨을까? 그런 사람들 왔다가도 모르게. 너는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십니까?”
그의 말에 이경이 서늘하게 웃으며 지석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그의 목덜미를 툭툭 치며 차갑게 말한다.
“내가 너, 이런 일 처리하시라고 월급 많이 주잖아요. 이런 일도 처리 못 하시면, 때려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님 말고도 이런 일 할 사람 많은데, 아닙니까?”
이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지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눈과 입이 따로 노니 그야말로 기괴한 인상을 풍겼다.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과격하지 않음에도 상대를 괜히 주눅 들게 했다.
상대 목덜미를 툭툭 치는 나쁜 손에 지석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꼭, 찾아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지금처럼 네가, 그렇게 원하는 돈을 받습니다. 알겠습니까?”
지석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이경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지석의 어깨가 움찔움찔했다.
지석 어깨에 얹혀 있던 이경의 팔에 예전에 없던 굵은 힘줄이 불뚝 솟아있었다.
아, 그래서 지석이 그렇게 힘들어했나 보다.
지석이 나간 뒤, 품에 있던 십자가를 꺼내 만지작거리던 이경이 이제야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