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 덫에 걸리다
그로부터 2시간 뒤, 파티장에 있던 손님이 거의 다 빠져나갔다.
행사장에 있던 관계자도 빠져나가자 남아있던 여성 연주자가 오늘 있을 대회를 위해 악기를 손질했다.
핸드폰에서 익숙한 곡이 울려 퍼졌다.
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
È che sospiri la libertà! ♫
여성 연주자가 대회 곡인 오페라 가수의 곡에 맞춰 연주를 시작했다.
È che sospiri È che sospiri la libertà!
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
È che sospiri la libertà! ♫
그때 음악에 홀린 듯 어떤 이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연주자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행복해 보였다.
음악에 맞춰 흐느적거리는 그의 부드러운 몸짓이 조화롭달까?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È che sospiri È che sospiri la libertà! ♫
기다란 손가락으로 오페라 가수의 노래에 맞게 지휘하는 손이 예술가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연주자의 손길로 더해지는 음악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가. 오페라 가수의 음성과 연주가 조화를 이뤄 귀 호강이 따로 없었다.
연주에 너무 심취했을까?
그녀에게 다가오는 격정의 검은 그림자를 연주자는 느끼지 못했다.
“아악!”
파티장에선 옅은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으나 파티장 밖에 있던 이들은 전혀 몰랐다.
*
2012년 3월 17일 토요일 정오를 지나던 때였다.
이제 막 학교에서 나오던 소율은 반갑지 않은 전화를 받았다.
-소율아! 이제 학교 끝났어?
“어, 이제 막.”
-그럼, 잘됐네. 빨리 집에 가서 아빠 여권 좀 갖다 드려.
“여권은 왜!?”
여권이란 말에 소율은 괜히 짜증이 났다.
이제 겨우 학교가 끝나 쉬겠거니 했는데, 심부름하게 생겼다.
-아빠가 오늘 행사 끝나면 곧장 미국으로 출장 가야 하는데, 여권을 안 가져갔다네.
“아, 진짜! 아빠는 회사 일은 그렇게 잘하시면서 이런 건 꼭 안 챙기더라.”
아빠의 이런 행동이 상습이었나 보다.
-그러게. 어쨌든, 빨리 로얄 호텔로 가라. 오후 3시쯤 행사가 끝난대.
“알았어요. 엄마! 오늘 집에 일찍 올 거죠?”
-그건 왜?
“아니, 아빠도 없는데 집에 혼자 있기 그래서. 아니면 내가 엄마 직장으로 갈까?”
-그러던지. 우리 딸 오면, 오늘 빨리 가겠네. 딸이 마감하는 거 도와줘서. 우리 딸, 일도 잘하던데.
“아, 아니. 안 갈래. 생각 바뀌었어. 엄마는 나만 보면 부려 먹으려 하더라.”
엄마의 장난스러운 말에 딸은 혹시나 또 일하게 될까 두려워 정색했다.
-내가 언제?
“좀 전에도 그랬으면서. 칫! 엄마! 올 때 거기 빵 좀 가져와요.”
-공짜로?
“아, 알았어! 오늘 집 청소해 두면 되지?”
-그래, 그 정도면 뭐. 손해 보는 건 없네. 맛있는 빵 가져갈게.
전화를 끊은 엄마 얼굴에 미소가 가득 머물렀으나, 딸의 얼굴엔 한껏 그늘졌다.
‘아, 또 당했다. 그놈의 빵 때문에. 맨날 나만 손해 봐.’
어쩔 수 없이 하겠다곤 했지만. 맨날 가사 일을 도맡아 하던 터라 소율은 이제 지겨웠다.
지하철을 타고 급히 호텔로 간 소율은 호텔 입구에 있던 사람을 보곤 주눅 들었다.
다들 얼마나 빼입었는지.
빨리 오느라 교복 차림으로 온 그녀는 호텔 로비 근처에서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 호텔에 왔어요.”
-어, 그래. 소율아! 아빠가 지금 바빠서 못 내려가니까 조금만 기다릴래? 끝나면 아빠가 소율이 용돈 줄게. 맛있는 것도 챙겨주고.
아빠 말에 시간을 확인한 소율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후 2시 30분.
아빠가 3시쯤 끝난다고 했으니까 아빠를 기다리려면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소율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빠, 대신, 용돈 많이 주기다.”
-그래, 엄마에겐 비밀!
“콜!”
딸과의 통화를 끝낸 이 과장은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이 과장님, 이 과장님!”
“네, 지금 갑니다.”
핸드폰에 있는 딸 사진을 들여다보던 이 과장은 급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의 전화를 끊은 소율은 30분을 어찌 보낼지 고민이었다.
저렇게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만 들어가는 호텔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밖에서 서성이자니 괜히 초라하게 느껴졌다.
호텔 밖에서 서성이길 얼마나 되었을까? 10분, 20분?
누구라도 있으면 덜할 텐데. 혼자서 기다리려니 여간 심심한 게 아니었다.
지루한 마음에 괜히 바닥을 보며 건물 주변을 따라 걷는데.
코너를 돌기 직전, 커다란 벽에 부딪혔다.
쾅!
벽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코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아, 씨! 아, 왜 이딴 게, 여기 있는 거야!?”
부딪힌 충격에 소율은 코를 부여잡고 욕설을 날렸다.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찔끔 흐르는 와중에 제게로 날아드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소율은 움찔했다.
“학생! 괜찮아? 많이 다쳤어?”
너무 놀라 제게 말한 상대를 쳐다보느라 소율은 빨개진 코를 그대로 노출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소율은 잠시 멍했다가 말을 쏘아 붙었다.
“아니, 키도 그렇게 크면서, 앞은 안 보고 다녀요!? 사람이 오면 피해야지. 왜 그냥 있는데! 아, 코가 부러지는 줄 알았네. 내 코 잘못되었으면, 그쪽이 책임지나?”
“코가 부러졌다면, 당연히 치료비 줘야지. 어디 부러졌니? 어디 보자. 괜찮은지.”
엄살이 너무 심했을까?
어느새 다가온 그의 얼굴이 소율과 너무 가까웠다.
‘악! 깜짝이야. 뭐야, 저 인간! 왜, 얼굴을 들이대?’
소율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오똑한 코로 손을 뻗자 소율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남의 코를?”
입술을 바르르 떨던 그녀는 놀란 눈으로 따져 물었다.
“아니, 다쳤다고 해서, 어떤지 보려고.”
사내는 소율의 과민 반응에 목덜미를 문질렀다.
“다쳤는데 왜, 그쪽이 봐요! 의사가 봐야지. 별 미친놈이 다 있네.”
“……!!”
사내는 소율의 말에 잠시 충격받았다.
아니, 대체 그가 뭘 했다고! 저리 난리란 말인가.
하도 아파하길래 어떤 상태지 보려 했더니. 그녀는 저리 발발 뛰고 난리였다.
게다가 조금 전 그 일은 사실 좀 억울했다.
그는 소율과 부딪혔을 때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저 천천히 걸어왔을 뿐.
정작 부딪혀 온 건 그녀였건만, 저리 화내니 말문이 막혔다.
사실 이런 경우는 쌍방과실 아닌가.
화가 나도 참아야 했다.
그는 그녀와 부딪혀 작은 생채기도 없었으나 그녀는 코까지 빨개졌으니.
사내는 성난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려,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이 넣었다.
“어쨌든 오해했다면 미안하고. 그래, 지금이라도 병원에 갈까?”
“아, 됐어요! 바빠 죽겠는데 병원 갈 시간이 어딨어. 아, 짜증 나! 앞으로 길 다닐 때 조심해요. 키 작은 사람 부딪히지 말고! 알았어요?”
사나운 눈빛으로 사내를 째려보던 소율은 로얄 호텔에서 나오는 몇몇 사람들을 보곤 뒤돌아 달려갔다.
로비로 이제 막 들어설 때쯤, 반가운 얼굴이 소율에게 다가왔다.
“이소율! 많이 기다렸어?”
“아니, 이제 끝났어요?”
“그래, 이제 하나 끝났다. 빨리 뒷정리 끝내고, 공항으로 가야지. 여권은 가져…….”
아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율은 급히 여권을 건넸다.
“아빠, 나 빨리 가야 해. 용돈은?”
“이 녀석, 순전히 용돈 때문에 남았구나.”
“당연하지 아빠! 내가 아빠가 뭐가 좋아서 있었을까.”
피식피식 웃으며 농담 섞인 말을 내뱉는 소율의 눈꼬리가 살짝 휘었다.
아빠는 그런 딸이 귀여운지 손을 뻗어 그녀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딸 용돈 많이 줘야겠네.”
재킷 안에 있던 주머니 속을 주섬주섬 뒤지던 이 과장이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런! 어쩐다? 아빠가 지갑을 8층에 두고 왔네. 잠깐 여기서 기다려. 빨리 가서 지갑 가져올게.”
“아빠! 으, 깜빡이!”
“미안, 조금만 기다려.”
미안한 마음에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이 과장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때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아빠를 불렀다.
“이 과장님!”
그 목소리에 뒤돌아보던 아빠의 표정이 밝아졌다.
‘설마…… 아니겠지.’
소율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혹시나, 조금 전 그 사람일까 싶어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아닙니다. 원장님께서 이 과장님께 꼭 챙겨 드리라 했습니다. 식사 거르지 말라는 말도 전해 달라고 하셨구요. 이건,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거라 필요할 거라고.”
사내는 다정한 손길로 구급상자를 이 과장에게 건넸다.
이들 대화를 듣던 소율은 괜히 불안해졌다.
‘젠장, 옷이 같잖아. 신발도 그렇고! 아, 망했다.’
소율은 시선을 피하다 그의 옷을 봐버렸다.
검은색 슬랙스와 흰색 남방이 그자와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막말이라도 하지 말걸. 홧김에 성질대로 해버린 게 후회되었다.
소율은 차마 그를 올려다보지 못했다.
소율의 표정을 본 이 과장이 얼른 사내를 소개해 줬다.
“아, 내가 깜빡했네. 얘는 내 딸, 이소율. 소율아, 인사해라. 아빠가 다니는 병원 원장님 아들이시다.”
그의 말에 두 사람은 어색하게 처음 본 사람처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이소율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서경하입니다.”
인사를 나누는 둘의 눈빛이 참으로 불편해 보였다.
통성명을 끝낸 두 사람은 그 뒤로 아무 말이 없었다.
딸의 답지 않은 행동에 잠시 의아했던 이 과장은 뭔가를 말하려다 급히 8층으로 갔다.
그가 사라진 뒤, 소율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근데, 제 볼일을 끝낸 경하는 이상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지갑을 가져오고도 한참, 지났을 시간인데.
아빠는 내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끝에 소율은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때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급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고 있었다.
소율이 엘리베이터를 먼저 타고 또 다른 사람들이 올라탔다.
그들 중 몇몇은 뭔가 당황한 낯빛으로 작게 속삭였다.
그들 대화를 경찰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소율이 경찰을 이리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사고가 났나? 왜 이렇게 경찰이 많이 와?’
사람들이 다 타는 걸 확인한 뒤, 소율은 8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탔는데, 다른 층을 누르는 이가 없었다.
드디어 8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이때만 해도 소율은 그 일이 저와 무관하리라 여겼더랬다.
천천히 아빠가 있을 법한 곳을 둘러보던 소율은 무리가 이동하는 쪽으로 따라 가봤다.
그저 호기심 반, 아빠를 찾겠다는 마음 반인 심정으로 걸었다.
소율의 발걸음은 그새 노란띠를 두른 폴리스라인 밖에서 우뚝 멈췄다.
‘언제 이렇게 경찰들이 왔대?’
이미 그곳은 다른 경찰들과 이곳에서 근무할 법한 직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다른 쪽에도 파티장이 있나? 그나저나 아빠는 대체 어딨을까?
여기서 사고가 났다면 시간상으로 아빠도 경찰들에게 질문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래서 아빠는 내려오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쯤 소율은 파티장 안쪽에 있는 어떤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내는 뭣 때문인지 눈에 초점이 하나도 없는 눈으로 손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