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라니. 그러자 끔찍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으로 쳐들어왔다. 나를 돼지라고 부르는 반 아이들의 괴롭힘. 나의 성격을 폄하하는 그 모든 언어폭력들. 말로 나를 괴롭히는 것을 넘어서는 심지어 내 몸을 꼬집는 반 친구들의 폭행. 그렇게 지우고만 싶은 과거의 나의 상처들이 다시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끔찍한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괴롭히는 과거가 나를 더욱 어둡게 만들기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 폰을 내려놓은 채로 딱딱하기만 한 바닥에 엎드려서는 괴롭게도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끔찍한 과거가 내 발목을 붙잡지 않기를 바랬다. 싫다. 싫었다. 잊고만 싶은 과거였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 모든 끔찍한 폭력 속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내 팔로 끊임없이 들이치는 기억들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강하게 감았다. 어두웠다. 어둡기만 했다. 그러자 그 어두움을 배경으로 나의 괴로운 과거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내 눈앞에 새겨졌다. 나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반 아이들의 표정. 그리고 들려오는 수군댐. 싫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끔찍한 눈빛들이. 나를 낮잡아 보는 그 눈빛들이 싫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시선 속에서 어떠한 외침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나약하기만 했다. 그저 책상으로 고개를 내려서 그들의 시선을 피할 뿐. 나는 너무나도 약하고 찌질했다. 그러자 숙여진 내 머리를 뒤에서 내리치는 누군가의 손지검. 아팠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 고개는 그저 더욱 더 깊숙하게 책상으로 숙여질 뿐이었다. 벗어나고 싶다. 이 끔찍함 속에서. 그러나 어떻게 해야지 벗어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흘러나가는 눈물을 그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 눈물을. 내 슬픔을. 내 나약함을. 고개를 숙이는 것이 그들이 나를 더욱 만만하게 보게 만드는 것일 텐데.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서웠다. 고개를 들고 그들의 차가운 눈빛들을 마주하는 것이. 나의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의 약함을 숨길 수도 없었기에 그렇게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눈을 감자, 끔찍한 기억이 나를 붙잡고 내 내면의 깊은 상처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어둡기만 한 그 곳에서 나는 시야를 먹혀버렸다. 그리고 나를 비하하고 낮추는 그 말들에게 먹혀버렸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세뇌되었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그 아이들의 말에. 돼지라는 그 아이들의 말에. 그 어떠한 말도 반박하지 못한 채로 그저 그런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나를 그렇게 부를수록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말의 위력은 너무나도 강해서 나조차 나 자신을 그런 인간으로 취급해버리게 만들고 말았다. 그렇게 나조차 나를 무시했고 폄하하고 깎아내렸다. 나의 가치를. 나라는 사람의 모습을.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되는데. 라는 마음은 계속되는 세뇌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과거는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으로 불려 와서는 현재가 되어 나의 발목을 붙잡는 그 끔찍한 존재들. 너무 싫었다. 끔찍했다.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나는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나 좀 꺼내주세요. 나는 어두움으로 가득찬 곳에서 홀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머물 뿐 이었다. 그 누구도 들을 수 없겠지. 나의 슬픔을. 나의 비명을.
그렇게 우울함이 나를 둘러쌌다. 나는 왜 죽고 싶은 걸까. 사실 나는 어렴풋하게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나를 비난하는 그 수많은 말들. 그리고 나에게 가해졌던 폭력들. 두려운 사람들의 눈빛들. 그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모르는 척을 하였으나 사실 내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죽고 싶다는 말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가해졌던 그 모든 폭력적인 말들에 이미 세뇌가 되어버렸다. 필요 없는 인간이라는. 쓸모없는 자식이라는. 그런 말들에 이미 나 자신을 버려버리고 말았다. 죽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끊임없이 들려오고 재생되는 그 모든 상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내 손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아이의 동영상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아이가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내 자신에 대한 질문을 그 아이에게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죽고 싶은 걸까?’
그 아이의 영상에 댓글을 남겼다. 그 아이가 나의 우울함에 답해주기를 바라면서. 복잡한 여러 마음들이 담겨져 있었으나, 그 많은 마음 중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죽지 말라고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져 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댓글을 남기고는 스마트 폰을 껐다. 그렇게 다시 스마트 폰이 어둠으로 들어찼다.
그 아이가 내 질문에 답을 해줄까.
병실 문을 연 엄마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엄마의 얼굴은 눈물로 부어있었다. 엄마의 부어버린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더욱 아려왔다. 친구들이 나를 찾아오자 엄마는 밝은 얼굴로 병실로 들어왔는데 내가 너무 단정적으로 싫다고 말해버린 게 아닐까. 어두운 마음이 다시 내 속을 스쳐갔다. 엄마께도 죄송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슬픔을 숨기고 애써 밝은 얼굴로 나를 찾아온 친구들을 반겼으면 엄마의 얼굴이 슬픔에 젖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엄마의 부은 눈이 나를 울렸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은 이미 과거가 되어 후회로 남았다. 그렇게 이미 지나버린 후회가 나를 붙잡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이미 눈물에 부어버린 눈은 웃음을 지을 줄을 몰랐다. 그렇게 슬픔에 젖은 엄마의 얼굴이 나를 더욱 울렸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엄마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이 화장실을 간다고 하며 병실을 나섰다. 서글펐다. 엄마의 그런 모습이.
엄마가 나가고, 나는 배게 아래에 감췄던 스마트 폰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전원을 켜서 스마트 폰을 켜버렸다. 그러자 환하게 밝아지는 스마트 폰의 화면. 내가 찍은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는 표시가 스마트 폰 화면에 담겨 있었다. 나는 내 채널을 다시 ‘새로 고침' 해보았다. 그러자 며칠 전에 올렸던 내 영상에 댓글이 달린 것이 보였다. 댓글이 달리다니. 순간 약간은 두려움이 스쳤다.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이 본 것은 아니겠지.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내가 죽기 전에 나의 흔적을 보는 것은 괜찮았으나, 나를 아는 사람이 보는 것은 왠지 모르게 싫었다. 그 반응을 알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는 내 첫 번째 영상에 달린 댓글을 확인하였다. 그곳에 달린 댓글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왜 살고 싶은 거야?’
라는 질문.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살고 싶냐니....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데. 내 영상을 보고는 ‘왜 살고 싶냐’ 고 묻다니.... 순간 화가 났다. 아프면 죽으라는 건가? 내가 아프고 곧 죽는 다고 표현하니까 살고 싶다는 말 하지 말고 죽으라는 건가? 하고 화가 났다. 그러나 순간 내 눈에 들어온 댓글을 남긴 사람의 계정 이름. 그 사람의 계정 이름 칸에는 ‘죽고 싶다’ 라고 적혀있었다. 자신이 정할 수 있는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이름과도 같은 계정 이름을 ‘죽고 싶다’ 라고 정해놓다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글귀로 계정 이름을 설정하고 ’왜 살고 싶냐’ 는 댓글을 달다니....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왜인지 모르게 내 영상에 그렇게 댓글을 단 사람이 어느 정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내가 올린 영상에 애처로이 달려있는 그 외로운 댓글과 그 댓글을 남긴 사람의 계정 이름이 왜인지 모르게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는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기록에서 나와 같은 슬픔을 보았다. 그 누구에게도 아픔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고만 있을. 그 아픔이. 그 사람의 댓글에서.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의 계정 이름에서 보였다. 어쩌면 그 사람이 나를 향해서 ‘왜 살고 싶냐’ 고 한 질문은 ‘왜 죽고 싶냐’ 고 자신을 향해 질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죽고 싶냐’ 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물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정말 죽을 지도 모르기에. 나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생명은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말이 안 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나는 한참을 고민하였다. ‘왜 살고 싶냐’ 는 질문을 한 그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의 질문 앞에서. 답이 없었다. 나조차도 왜 살고 싶은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살고 싶었다.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죽기 싫을 뿐. 그리고 그와 똑같이. 그저 살고 싶을 뿐. 복잡한 이유도 없었고 장대하다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저 살고 싶다고 그 사람의 댓글에 또 다른 댓글을 남겼다. 그것이 다였다. 내가 살고 싶은 이유는 살고 싶어서였다.
‘살고 싶으니까.’
그렇게 나는 죽고 싶다는 사람의 댓글에 살고 싶다는 댓글을 남겼다. 댓글을 남기고는 그 사람이 빨리 내 댓글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언가 또 댓글을 남겨주기를 바랬다. 왜인지 그 사람의 계정 이름이 신경이 쓰였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어찌된 이유에선지 내가 찍어 올린 동영상을 보았고, 그 동영상에 댓글을 남겼기에. 어떠한 인연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죽기 전에 이어져야만 하는 마지막 남은 인연일까 싶었다. 그렇게 나는 순간 내 삶에 들어온 그 댓글을 바라보았다.
나는 다음 영상을 확인했다. 그런데 내가 두 번째로 올린 동영상에도 그 사람이 남긴 댓글이 있었다.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겨진 댓글은 전 영상에 달린 댓글보다 더 어두웠다.
‘나는 왜 죽고 싶은 걸까?’ 라고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