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삼을 먹은 뒤로 진운은 내공수련을 할 때면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운기를 했다. 음기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 몸속에 남은 양기를 녹여내기 위함이었다.
가을이 다 지나도록 물속에 몸을 담궈 봤지만 몸속에 자리한 인형삼의 내단을 녹이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윽고 눈이 내리고 계곡이 얼자 진운의 몸도 안정을 되찾았다. 내공을 끌어올려 무공을 시전해도 몸에서 열이 나지 않았다.
그제야 무평은 진운에게 새로운 무공을 가르쳤다.
“이게 제 사식 파공이다.”
무평은 말과 동시에 시범을 보였다. 오른팔에 스멀스멀 모이는 위험한 기운.
진운이 눈을 빛냈다.
‘이거다!’
사부가 여차하면 꺼내는 절초. 비무 때마다 저 기운에 목이 날아갈 뻔했다. 그렇게 알려달라고 떼써도 가르쳐주지 않던 비기. 그것이 바로 파공이었다.
이윽고 무평의 검이 움직이자 폭발할 것 같은 기운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파앙!
허공을 찌르는 데도 소리가 난다. 공기를 찢는 소리다.
흩날리는 눈발마저 무평이 찌른 공간을 비껴 내렸다.
처음 저 초식을 보던 날, 강물을 가를 때처럼 공간 자체를 무(無)로 돌리는 것 같았다.
“후우......”
무평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척 봐도 내력소모가 심한 기술이었다. 호흡을 고르며 내공을 안정시킨 무평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중양심법으로 뇌명검 후반부 삼식을 끌어내는데 이 사부의 반평생을 바쳤다. 그만큼 중양심법의 순후한 기운과는 맞지 않는다는 소리야.”
무평은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제 사식 파공의 기본적인 운용은 내력을 강하게 압축했다가 검 끝으로 발출해 내는 것이다. 전반부 삼식의 내력운용은 이것을 위한 발판이라 생각하면 된다.”
진운은 잠시 생각하다 허탈한 듯 말했다.
“...... 그러면 삼식 환우(喚雨). 그게 원래 그런 초식입니까?”
진운이 생각하는 환우(喚雨)는 아무 위력도 특색도 없으면서 무겁기만 한 초식이었다. 여름부터 시작해 한참을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던 못써먹을 무공이었다.
진운의 물음에 대한 무평의 대답은 간결했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내가 몇 달을 고민했는데!”
“끝까지 들어라 이 눔아. 흠흠. 모아둔 내기가 치고 나갈 수 있게 통로를 열어두면 검이 그 길을 따라 알아서 움직인다. 즉 통로의 방향이 검 끝의 방향. 기수식이나 투로에 관계없이 어디서든 찌르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 허나 그런 식으로 검을 움직이기 위해선 그만큼 광포한 기운이 필요하다.”
무평은 잠시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끊임없이 멈추지 않는 기운. 오행기 중에서는 아마 화기나 수기가 비슷할 게다. 하지만 중양심법으로는 만들 수 없는 기운이지. 때문에 반쯤 주화입마에 빠져 내력을 들끓는 상태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게 바로 이 심법이다.”
무평은 말과 동시에 품안에서 책자하나를 꺼냈다.
책에 적힌 글자는 풍운심법. 뇌명검을 익히기에 알맞은 심법이라는 풍운심법이었다.
잠자코 듣던 진운이 의아한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근데 그건 중양심공을 익힌 사람은 못 배우는 거라면서요.”
“그래서 반쯤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이지. 그것조차도 내가 변형시킨 것이다. 이 심법 그대로 따라하다간 큰일 나느니라. 맨 뒷장에 내가 적어놓은 게 있으니 그것만 익혀야 할 게다.”
무평은 경고 섞인 말을 하며 진운에게 책자를 던졌다. 갑자기 날아온 책을 얼떨결에 받아든 진운은 사부를 한번 쳐다보고는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책에는 몸 전체를 단전화 하는 방법과 내기를 받아들이는 호흡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진운이 맨 뒷장까지 넘기자 무평은 말을 이었다.
“허나 그 심법은 양날의 검이다. 순간적으로 파공의 초식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대신 내공의 균형이 흐트러져. 자주 쓸수록 일원검법 또한 강맹하고 날카로워 지겠지만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잃게 되겠지.”
무평의 말이 끝나자 진운은 깨달음을 얻은 듯 소리쳤다.
“아하! 어쩐지 일원검법도 사부는 요상하게 날카롭더라니.”
“커흠. 그 뒷장에 적어놓은 심법부터 천천히 알려주겠다. 파공의 초식을 익히면 내 너를 하산시켜주마.”
진운은 하산이라는 말에 반색하며 말했다.
“하산이요!?”
“그래 하산이다.”
진운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드디어 산을 내려간다는 생각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더구나 사부가 강물을 가를 때 보았던, 그 무공도 배울 수 있다니.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생길 지경이었다.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던 진운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니 근데, 후반부도 삼식이라면서요. 나머지 두 개는 왜 안 가르쳐 줘요?”
“흠흠. 나도 거기까지밖에 못 익혔거든.”
“......”
생겨나던 존경심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 * *
“흐읍”
숨을 삼키고 온몸의 내력을 오른팔에 집중한다.
중양심공의 구결을 비틀어 풍운심결에 접목시키자 오른팔에 모인 기운이 날뛰기 시작한다. 혈도를 치달리는 내력이 광포함을 더해가고.
검 끝으로 그 통로를 열어둔 순간.
파앙!
물밀 듯이 빠져나간 내력이 공간을 갈랐다.
진운은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후우우우......”
그가 겨우내 익힌 파공이다. 과연 위력적인 만큼 내공소모가 막심했다. 힘 조절조차 쉽지 않았다.
자기 의지로 검을 찌르는게 아니라 허공으로 검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쓸 만 했다. 사부가 강물을 가를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이젠 파공도 익혔겠다 하산할 날만 기다리는 진운이었다.
헌데 무평은 봄이 되자마자 마을로 내려가더니 사흘째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진운은 사부 몰래 산을 내려갈까도 싶었지만 괜시리 꺼림칙했다.
‘그래도 사부인데, 인사도 안하고 갈 수는......’
이전에 일곱 번이나 도망치려했던 과거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칠종칠금 끝에 마음으로 감복한다더니, 진운이 딱 그 짝이었다.
아무튼 사부를 기다리며 수련에 몰두하기 나흘째 되는 날, 무평은 봇짐을 한 아름 메고 나타났다.
조그만 몸으로 산더미 같은 보따리를 맨 꼴을 본 진운이 은근히 비꼬며 말했다.
“어디 장사하러 가시게요?”
헌데 평소 같았으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역정을 냈을 무평이 대답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봇짐을 초옥 앞으로 옮겨놓더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라이, 배은망덕한 놈.”
의아해진 진운은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이게 다 뭐에요?”
“다 네것이다.”
무평은 한마디를 툭 내뱉더니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운은 얼른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엔 상아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도복 두 벌과 가죽신, 그리고 건량과 육포가 가득했다.
먼 길을 떠날 때 필요한 것들이었다.
하산의 때가 온 것이다.
“사부......”
진운의 눈이 초옥으로 들어간 사부를 쫓았다.
방안에서 무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풍의는 네가 가져온 것이 있으니 될 테고......”
주섬주섬 무언가 챙기는 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방문이 덜컥 열리며 무평이 나왔다.
“여기.”
무평은 방문 앞에 서서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따리 위로 던졌다.
툭
오래된 가죽 검집에 투박한 옥장식의 손잡이.
무평의 검 녹옥이었다.
“이것도 이젠 네 것이다.”
진운은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사부를 쳐다봤다.
“사부님......!”
그러나 무평은 무심한 표정으로 가타부타 말도 없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진운은 그저 조용히 닫힌 문을 바라봤다. 초옥 내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 틈 사이로 무평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버럭 무평의 호통이 들렸다.
“아 이눔아! 안 갈꺼야!?”
진운은 정신을 차리고 그 자리에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비단 도복에 머리를 묶어 올리고 한쪽 허리엔 녹옥을 맸다.
허물 벗듯 벗어버린 헌 회색도복은 잘 개어 문 앞에 놨다.
그러고 나서 진운은 무평이 있는 방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무림인이 사부를 맞을 때 한다는 구배지례.
연거푸 아홉 번의 절을 마친 진운은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두툼한 행낭이, 허리춤의 녹옥이 무겁게 느껴졌다.
초옥안의 무평은 착잡한 마음으로 목울대를 움직여 침을 삼켰다.
그는 제자와의 이별이 이리도 씁쓸한 기분일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뇌명검 후반부 삼식을 익힐 때 까지 붙잡아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제 사식 파공, 거기까지였다.
십 수 년을 연구해도 제 오식 벽력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모르는 무공을 어찌 가르칠 것인가.
진운의 재능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만족할 재능이 아니었다.
세상으로. 강호로 보내야 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제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물려받은, 그리고 그가 피우지 못한 꽃을 틔워낼 그의 분신이.
그의 품을 떠나고 있었다.
* * *
덜그덕 덜그덕
마차가 숲길을 내달린다.
말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는 비좁은 숲길을 달리기엔 제법 컸다. 마차의 위엔 마부를 포함해서 세 사람이 타 있었는데 모두가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 중 어려보이는 소녀가 맞은편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당숙! 이 길 맞아요?”
중년인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흐음... 글쎄다. 나도 호북은 오랜만이라 잘 모르겠는데.”
석연찮은 대답을 들은 소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아이, 정말! 노숙은 싫단 말이에요.”
“방현을 지난지도 한참이니,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양양이 보일게다.”
“조금 더 가면 된다고 해도, 지금 당장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구요!”
소녀의 말 대로였다. 그들의 뒤편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해는 고개 너머로 모습을 감추기 직전이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곧이어 다가올 어둠에 먹혀버릴 듯 희미했다.
녹색옷의 소녀는 마부석을 향해서도 소릴 질렀다.
“오빠! 앞에 객잔은 안보여?”
마부노릇을 하는 젊은 청년은 그녀의 오라비가 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기는 한건 지 아무 말도 없이 마차를 그저 마차를 몰 뿐이었다.
소녀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답답한 마음에 다시 그녀의 오라비를 불렀다.
“오빠?”
하지만 청년의 대답은 소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숙부,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앙!”
마부석에서 들려오는 ‘노숙’이라는 말에 소녀는 어깨를 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어지간히도 노숙이 싫은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당가타에 있을껄!”
당가타. 강호 4대세가중 하나인 사천당문을 이름이다.
그들은 당문 일행이었다. 당문은 양양에 머무르고 있는 호북 포정사사의 초청을 받았다.
몇 해 전부터 지독한 지병을 앓아온 포정사가 이런저런 의원을 불러도 아무런 차도가 없자 독으로 생명을 살린다는 당가독의 당충선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물론 당문에서도 거저 해주는 일은 아니었다. 무당파가 꽉 틀어지고 있는 호북, 그것도 양양 땅에 분타를 세우고 그곳에 대한 지원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헌데 당충선이 가는 길에 혹이 하나 붙어버렸다.
당가일화 당희지가 그 혹이었다.
대대로 손이 귀한 당가였지만 이번 대에는 특히 여아가 없었다. 그 중에 딱 하나있는 여자아이가 바로 당희지였다.
금이야 옥이야 공을 들여 키웠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저런 고집불통이 되어 있었다.
당충선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당희지를 타일렀다.
“하하. 원래 강호행이라는 게 다 이런 법이다. 풍찬노숙 쯤은 거뜬히 해야 강호의 여협이라 할 수 있지.”
“이게 몇 번째냐구요! 이번 유람은 망했어!”
그녀는 아예 이 일행의 목적을 유람으로 잡은 모양이다.
당충선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와중에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달그락 달그락
말이 걷는 속도까지 늦춰지자 마부석의 청년이 말했다.
당희지의 오빠 당석호였다.
“당숙, 오늘은 이쯤에서 노숙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건량은 넉넉하니 누울 자리나 찾아봐.”
“흥!”
마부석을 향해 명령을 내리던 당충선은 콧방귀를 뀌는 당희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희지야. 오늘만 버티면 양양이다. 조금만 참아라.”
“몰라요!”
단단히 삐진 듯 했다. 당충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번엔 석 달은 가겠군.’
당석호는 마차를 몰고 방향을 틀었다. 마차가 덜컹덜컹 흔들리며 나무사이를 지났다.
당충선은 오랜 시간 마차를 타느라 지친 어깨를 어루만졌다. 온 몸이 찌뿌듯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마차는 맞지 않는 듯 했다.
‘저 혹을 달고 오지 않았다면 말을 탔을 터인데.’
차라리 경공으로 오는 것이 편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였다.
당석호가 그를 불렀다. 적당한 자리를 물색한 모양이었다.
“당숙.”
“그래, 찾았더냐?”
“네, 당숙. 근데......”
당석호가 말끝을 흐리자 당충선이 재촉했다.
“근데?”
“선객이 있습니다.”
당석호가 찾아낸 자리는 제법 괜찮았다. 굵직한 나무 주변으로 평평한 땅에 수풀도 무성하지 않아 자리를 깔고 눕기엔 최적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당석호의 말대로 선객이 있었다.
두꺼운 피풍의를 깔고 육포를 뜯고 있는 청년. 어찌나 오래 노숙생활을 했는지 상아색 도복엔 온갖 풀때로 얼룩졌고 머리와 얼굴엔 개기름이 줄줄 흘렀다.
질 좋은 비단옷에 눈코입이 또렷한 것이 분명 멀쩡하게 생긴 놈인데 행색은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진운. 전진파의 마지막 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