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곳에 온 지 오일쯤 된 거 같다. 남은 건 이틀쯤? 아마도. 자꾸 두루뭉술하게 예상하는 건 실제로 이곳에 온 뒤로 시간이 흐른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감각해진 거 같다. 마치 외딴섬 마냥 동떨어져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기이한 느낌도 들고 시간이 멈춰버린 것도 같고. 서울에서는 1분 1초가 아깝다는 듯 하루에도 수십 번 시계를 쳐다보고 손이던 발이던 바쁘게 움직이고 항상 시간에 쫓기는 기분으로 지내온 거 같은데 말이다. 그에 비해 불과 오일쯤 지난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천천히 잔잔하게 굴러갔다. 시계를 보는 일도 뜸해졌다. 아침이면 아, 아침이네. 지민 씨는 벌써 학교 갔겠다. 저녁이면 아, 저녁이구나. 할머니랑 같이 읍내에서 장을 볼까. 하는 생각들이 어느새 내 하루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 만에 꺼내든 핸드폰에 찍혀있는 부재중에도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는 걸까. 핸드폰 화면 상단에 드리운 문자 알림이 나를 현실로 일깨워주고 있는 거 같았다. 답을 하면 무언가 깨져버릴 것 같은 이 기분. 별것도 아닌데 망설이고 있다.
“…나중에 하자.”
가만히 엄마와 은기에게서 온 부재중 표시를 내려다보다가 핸드폰 화면을 눌러 껐다. 걱정 끼치고 있는 건 알지만 어차피 며칠 있으면 돌아갈 거니까. 적어도 지금은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어쩌면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우회적인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좀 늦네 올 때가 됐는데.”
오늘은 지민 씨와 아빠를 보러 가기로 했다. 지민 씨의 학교가 끝나는 대로 골목 부근에서 보기로 했는데 좀 늦는지 아직 지민 씨가 오지 않았다. 종례가 늦어지나. 집에 가는 버스가 별로 없어 자기는 야자도 안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냥 종례도 안 듣고 바로 튀어올까요?!'
'무슨, 종례까지 듣고 와요.'
'알았어요….'
단호한 내 말에 시무룩해져선 조용히 고갤 끄덕이던 지민 씨의 모습이 두둥실 떠오른다. 전날 한가롭던 일요일 저녁, 불쑥 내일 납골당에 같이 가지 않겠냐 말을 꺼냈다. 사실 첫날 이후로 나는 납골당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가볼까 싶다가도 종국엔 말았던 거 같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랬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친 나를 쉬게 하고자 하는 부분이 컸던 모양이다. 어찌 됐든 납골당이란 장소가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는 없는 곳 아닌가. 입구부터 절로 무거워지는 속내를 숨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늘 혼자 아빠를 보러 갔다. 어쩌다 은기와 함께 가는 날이 있어도 아빠 앞에 서는 건 항상 나 혼자였다. 그랬던 내가 지민 씨에게 먼저 같이 가지 않겠냐 청한 것이다.
'나는 괜찮은데…. 진짜 내가 가도 돼요?'
'괜찮으니까 같이 가줘요. 아빠한테 지민 씨 소개하고 싶어서 그래.'
지민 씨는 내가 미소 짓는 모습에 안심을 했던 건지 뭔지 뒤이어 달리 말이 없었다. 그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푹 숙인 고개에 언뜻 귀 끝이 붉었던 것도 같다. 지민 씨와는 보통 인연이 아니니까 아빠에게 소개하고 싶단 말은 진심이었다. 비록 같이 가 달랬던 건 내가 용기가 없었을 뿐. 손에 들린 작은 종이상자를 고쳐잡았다. 이걸 아빠에게 줄 때쯤엔 나도 모르게 왈칵 울어버릴 거 같아서다. 누군가 옆에 있어주면 좀 덜할 거 같다. 무거워진 속내를 숨길 순 없겠지만 옆에 누군가 있어준다면 무게 때문에 위태롭게 쌓인 둑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다짐하듯 상자를 쥔 손에 땀이 축축이 배어들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노란 하늘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골목 벽에 기대어 지민 씨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아 전화도 걸어보았지만 어째 받질 않는다.
“하는 수 없지…. 혼자 갈까.”
으차.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시간은 어느새 6시다. 납골당은 7시까지 출입이 가능해서 더 기다릴 수도 없었다. 아쉽긴 했지만 그러려니 한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 두절될 사람도 아니고 사정이 있겠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든 것도 없는 상자가 무겁게 느껴진다. 덩달아 울적한 기분도 든다. 골목을 벗어나 조금 걷다 보니 은행나무가 줄지은 좁은 도로가 나타났다. 은행나무는 아직 완전히 물들 시기가 아닌지 드문드문 이파리가 노랗다. 곧이어 최근에 새로 색을 칠해 어쩐지 이질적이게 보이는 아주 작은 납골당이 눈에 들어왔다. 망설이다 납골당 주위를 감싸고 있는 까만색의 낮은 철창을 지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좀 전 누군가 왔다 갔는지 높은 자리를 위해 마련된 사다리가 빈 벽면에 세워져있었다.
“……아빠 나 또 왔어요. 저번에 봤어도 되게 반갑죠?”
아빠가 안치된 자리에 서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인적 없는 납골당 내부에 내 목소리가 대리석 벽을 타고 낮게 울린다. 작다만 한 유리문엔 전에 내가 붙여두고 갔던 조촐한 꽃묶음이 다 시든 채 쪼그라들어있었다.
“아, 꽃이 없다.”
그제야 상자밖에 들고 있지 않은 빈손이 허전해졌다. 아빠 내가 요즘 이래요. 정신을 어디다 빼두고 다니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 이해해 줄 거죠? 웃음 비스무레한 것이 섞였다. 그건 한숨 같기도 감탄사 같기도 했다. 대신에 이거, 이거 가져왔어요. 종이박스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엔 수많은 소라색 편지가 밀봉된 채로 채워져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삼 개월의 공백. 그때 써놓고 차마 부치지 못했던 편지들이다. 그 사람이 없어 슬픈 나의 얘기로만 무겁게 채워져있던 편지들. 보내봤자 나는 당신이 없어 이렇게 슬프다는 것밖에 보여줄 수 없어서 차마 보내지 못했던 얘기들.
“안 궁금해도 어쩔 수 없어요. 안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보여줄게요. 나, 이번엔 다 털어내려 온 거니까.”
그래도 대충 훑어만 보세요. 자세히 읽는 건 좀… 그렇다….
아마도 오늘 이후로 자주 못 올 거 같아서 항상 내 방 책상에 놓여있던 이 편지들을 보내기 위해 들고 왔다. 진짜 후련하게 보내자. 그러려고 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떨렸다. 아아, 이래서 지민 씨랑 같이 오려고 한 건데.
“……미안해요.”
상자 속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러고 있는 내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전부 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 아니야? 그런 의심이 불쑥 치솟아 머리를 어지러이 헤집는다. 이런다고 아빠가 알까. 이미 아빠는 여기 없는데. 상자의 뚜껑을 도로 덮으려는데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타악.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상자가 큰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쏟아진 편지. 와르르 무너진 둑.
“미안해요. 미안, 해요…. 내가 미안해 아빠….”
투둑 툭, 소라색 편지 위로 그것보다 짙은 원형의 점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무엇을 위한 사과인지 나도 모른다. 그저 한없는 미안함이 넘쳐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당신이 원하는 거, 바라는 거, 보고 싶은 거, 듣고 싶은 거, 그 무엇이라도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는데, 이제 더는 그럴 수 없어 미치도록 미안한 감정.
편지를 주울 생각도 않고 나는 그 위로 무너졌다. 어찌할 새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마자 지난 기억 하나가 머리를 꽉 채웠다.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아빠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기점부터 편지 말미에는 꼭 미안하다는 말이 쓰여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눈가를 살풋 찡그리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던 거 같다. 가족인데 미안할 게 뭐 그렇게 많냐고 그러지 말라고 답장을 쓰곤 했다. 아빠의 사과는 대략 이런 말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나 학예회에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둥 중학교 수학여행 갈 때 용돈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둥 고등학교 졸업식에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둥. 그 외에도 숱하게 아버지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자신을 항상 미안해했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다는 말이 싫었다. 불편해지는 공기와 갈 곳 잃어 헤매고 마는 용서가 난감했다. 한마디로 미안할 건 또 뭐야 싶었다. 어쩔 수 없는 건 나도 알고, 엄마도 아는데 말이다.
「 항상 우리 딸 사진 보고 힘내고 일한다. 아빠가 딱히 해줄 건 없고 등록금 보태라고 엄마 편으로 더 보냈어. 새 신발도 하나 사 신고 그래.
이번에 물 들어온 뱃일 끝나고 나면 조만간 올라가마. 아빠 없이도 잘 큰 너 보고 아빠가 항상 고맙고 미안한 거 알지? 」
그게 아빠의 마지막 편지였다. 조만간 올라온다던 아빠는 끝내 올 수 없었다. 아빠는 마지막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편지를 몇 번이고 닳도록 읽으면서 마지막 문장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뜻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던 그 마음을 알 듯했다.
“미안해요….”
사랑하는 만큼 후회가 남고
사랑하는 만큼 미련이 남고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미안한 거겠지.
***
지민 ver.
시간이 너무 빠른 거 같다. 일주일이 한 달같이 느껴지던 무료하던 일상이 하루아침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근래 들어 버릇처럼 한 손으로 조심스레 뺨을 툭툭 두들기곤 하는데 멍하니 있던 정신을 깨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얼타고 있다가 또 하루가 지나가 버리면 어떡해. 어서 깨어있는 동안이라도 시간을 붙잡아둬야지 지민아 안 그래? 그냥 자기 최면이다. 1분 1초가 아깝다고. 물론 수지 씨와 있는 시간엔 자꾸 멍 정신을 놓곤 해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지만. 벌써 오일이나 지났다. 이제 이틀이면 수지 씨도 돌아갈 텐데. 벌써부터 아쉬운 기분에 입맛을 쩝 다시다가 할머니 방 안 나전칠기 서랍 위에 얹어둔 스케치북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굴러가던 머릿속에 전구가 하나 팟 켜진다. 이틀 전부터 가볍게 스케치하던 그림.
'좋았어―.'
아직 이틀이 남았지만 겨우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미완성인 그림이라 지금부터라도 빨리 속도를 내야 했다. 가볍게 뭉퉁그렸던 선을 또렷이 덧댔고 윤곽을 선명히 잡아나갔다.
일주일을 머문다고 했지만 언제 수지 씨가 돌아갈지 몰라서 마음이 급해졌다. 손이 까맣게 물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할머니가 안 자고 뭐 하냐고 타박을 해도 꿋꿋이 그렸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마무리는 학교에서…. 잠도 학교… 그래….'
시계 초침은 어느새 학교 갈 아침을 가리키고 동이 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때서야 연필을 놓을 수 있었다. 퀭한 눈을 하고서 푹 꺼진 눈꺼풀을 비비며 거의 막바지인 그림을 떼내 조심스레 돌돌 말아 챙겼다. 졸리고 지친 정신이었지만 발걸음은 왠지 날듯이 가볍기만 했다. 사실 말이 좋아서지 등교를 하자마자 자투리 남는 시간엔 죄다 그림을 손본다고 잠시도 쉬질 못했다.
'오올―, 꽤 정성 들였는데? 누구야?'
어깨너머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훔쳐보고선 깐족거리는 정호원에도 그저 미미한 웃음을 띤 채 대꾸를 하지 않자 저 혼자 내가 낯설다며 기겁을 하고 멀리 떨어지는 녀석이었다. 아무래도 좋다. 점심시간에는 5분 만에 마시듯 급식을 해치우고 그리던 그림을 끝냈다. 다행히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졸음을 끌고 보건실로 향했다. 아직 선생님들도 식사 중이신지 보건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구석탱이 침대에 누워 천근만근인 눈을 붙였다. 나는 후로 까무룩 잠에 들었고 종이 치면 알아서 깨겠지 싶었는데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나 보다.
“얘, 언제부터 자고 있었니? 수업 끝났어.”
“느에, 예…?”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손짓에 비몽사몽 눈꺼풀을 밀어올렸다가 얼굴을 반쯤 가린 얇은 이불보가 보였고 화들짝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뭐지, 점심시간 끝났나? 혼자 중얼거리며 고갤 돌리니 침대맡에 보건 선생님이 서계셨다. 작게 하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제야 선생님의 황당한 얼굴이 보이더라.
“지금 6시야. 이제 야자 하는 애들만 남았지.”
“…학교 끝났어요?!”
아예 수업이 전부 끝나있을 줄이야. 어, 아 안녕히 계세요! 멍했던 정신이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 마냥 또렷해져 황급히 보건실을 뛰쳐나와야 했다. 한 번에 두세 계단씩 뛰어 올라가 교실에서 가방과 그림을 챙겨 나왔고 또 거의 미끄러지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으아어, 수지 씨 많이 기다릴 텐데―!”
급하게 정류장까지 내달리는 동안 폰을 꺼내 수지 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불통이었다.
'그럼 내일 지민 씨 학교 마치는 대로 골목 입구에서 봐요. 납골당이 7시까지라 늦으면 안 돼요―.'
'당연하죠. 6시 전에는 도착할 거예요!'
아버지를 같이 뵈러 가자고 먼저 말을 꺼냈던 그녀이기에 얼떨떨한 한편 기쁘게 수락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그림을 완성시키려 애썼던 거다. 늦으면 안 되니까 어서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괜히 나보고 빈말처럼 같이 가자고 한 게 아닐 텐데 이런 식으로 쉽게 엇갈리면 어쩌잔 건지. 근처 소박한 꽃가게에서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털어 작은 꽃묶음을 구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몇 송이 되지 않아 퍽 초라해 보여 나는 나를 한심하게 여기며 버스가 아닌 택시를 잡아탔다. 버스로는 40분이나 걸려서 빨리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택시에서 내려 골목까지 뛰어갔을 적엔 이미 수지 씨는 없었다. 어느새 시간은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납골당은 7시까지랬기에 당연한 건가 싶었다. 나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대신 반대로 뛰기 시작했다. 숨 가쁘게 뜀박질을 한끝에 은행나무가 줄지은 도로가 보이고 그 옆에 낮은 철장에 감싸여 흰 외벽으로 지어진 작은 집채만 한 건물이 보였다. 언제 한번 오다가다 본 적은 있어도 가까이 들여다볼 일은 없던 장소다.
“헉, 허억.”
다행히 20분 정도는 남았다. 뛰어오느라 손에 들린 꽃이 망가지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재빨리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다지 넓지 않은 내부에 듬성듬성 유골함이 안치된 칸막이들이 보였다. 그속을 연신 두리번 거린 끝에 벽면에 기대진 사다리에 반쯤 가려 보이지 않았던 수지 씨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숙해야 할 분위기에 가쁜 숨이 어울리지 않아 숨을 고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아서 결국 포기했다.
“하아, 내가 좀, 늦었죠…? 진짜 미안, 해요. 흐읍! 하, 힘들어.”
저벅저벅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수지 씨의 곁에 다가가 불쑥 작다 못해 소박하기 그지없는 꽃묶음을 내밀었다. 그러다 수지 씨에게 건넬 건 이게 아니란 걸 깨닫고 허둥지둥 반대쪽 손에 들려 있던 종이말이로 바꿔 내밀었다. 아 씨 방금 되게 바보 같았는데. 무릎에 한 손을 짚고 반쯤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고르며 속으로 나를 마구 자책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제야 정신없던 눈이 수지 씨의 발치에 엎어진 상자와 종이 더미들을 발견했다.
“수지 씨? 이게 뭐…,”
나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쏟아진 종이가 익숙한 소라색의 편지라는 걸 인지할 즘엔 눈길이 잘게 떨고 있는 수지 씨의 어깨로 향했고 뒤이어 눈물로 축축이 젖은 그녀의 속눈썹으로 향했다. 수지 씨는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바닥을 보며 꾹 다문 입과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만큼 굳게 두 손을 말아 쥐고 있었다. 나는 잠시 입을 열었다 닫았다 주춤거리다 이내 고개를 떨궜다. 이윽고 간신히 할 말을 찾았다.
“…미안해요. 혼자 둬서.”
“…….”
별안간 말아 쥐고 있던 두 손이 내 허리 사이를 파고들었고 잘게 떨리던 어깨가 팔뚝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축축이 젖은 속눈썹이 눈앞을 스쳤고 툭 어깨에 그녀의 이마가 기대어왔다. 더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수지 씨가 내게 안기다시피 기대와 놀란 나는 엉거주춤 한 손엔 초라한 꽃묶음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종이말이를 들고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짧은 침묵 뒤로 꽉 막혀 파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사과하지 마요. 미안하다는 말 싫으니까. 앞으로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거나… 아무튼, 뭐든 간에 다른 말로 대체해요.”
“…….”
“있죠, 아빠가 미안하다는 말 얼마나 자주 했는지 알아요? 근데 그랬던 아빠 마음, 이제 알 거 같아.”
그건 사랑한다는 말이었어요….
찰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는 듯 웃는 얼굴이 엉망일 게 뻔하니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지 씨가 이렇게 우는 거 같아 가슴이 쓰렸다. 천천히 조금씩 어정쩡히 들고 있던 팔을 움직였다. 떨고 있는 그 등에 살포시 손을 올린다. 사랑한다는 말, 난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수지 씨가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