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반쯤 감긴 눈으로 따라갔다. 수증기 너머 불투명한 창문으로는 아마도 지금쯤 밝았을 해가 비쳤다. 습한 물기가 가득한 목욕탕에 들어오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어려워지곤 한다. 목욕탕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한 시간은 됐나. 그러고 보니 목욕탕 온 것도 엄청 오랜만이네. 어릴 땐 엄마랑 자주 갔었는데. 새벽이라 사람도 거의 없다. 내쉬는 숨마다 습한 온기가 가득했다. 따뜻한 탕에 들어가 앉아 있다 보니 점점 풀리는 피로에 노곤노곤 졸음이 쏟아진다. 진짜 온탕에 들어오면 얼마나 나가기 싫은지 모르겠다. 아으으. 좋다. 끼익, 같이 탕에 들어가 있던 할머니가 온수로 틀어놨던 수도꼭지를 잠갔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이나 세월이 묻어나는 얼굴에 비해 참 정정하신 편이다.
'목욕탕에 때나 밀러 가자. 빨리 인나그라. 새벽에 가야 물이 맑다.'
'…지금요? 아직 5시밖에 안 됐는데 더 안 주무셔도 괜찮으세요?'
'원래 늙으면 아침잠이 없는기라.'
토요일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신 할머니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던 지민 씨와 나를 깨워 목욕탕에 데리고 왔다. 삐죽 까치집을 진 머리를 하고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간 지민 씨는 누가 봐도 자다가 떠밀려 나온 모양새였다. 황금 같은 주말에 목욕탕은 무슨 목욕탕이냐며 툴툴거리던 지민 씨는 내가 웃는 걸 보더니 입을 합 다물었다. 민망했나 보다. 동시에 붕붕 뜬 머리를 자각하고 애써 손으로 눌러보지만 삐죽, 머리카락은 제 주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그렇게 해가 뜨기도 전 동네 목욕탕에 도착한 우리. 지민 씨는 2층 남탕으로 할머니와 나는 1층 여탕에서 갈라섰다.
“할머니, 목욕탕 자주 오세요?”
“암 자주 오지. 한동안 이놈의 허리땜시 목욕을 못 왔더마 몸이 근질거려 죽겄다.”
“저도 오랜만이에요! 어릴 땐 엄마 따라서 자주 왔었는데 참.”
“와, 지금은 안 가나?”
“네…. 지금은 엄마랑 따로 살아서 혼자 가기도 뭐하고 시간 내서 갈 일이 없더라구요.”
그것도 10년도 더 지난 아주 어릴 때 얘기다. 사춘기가 오자 엄마가 같이 가자고 해도 부끄럽다며 요리조리 내빼곤 했으니까. 웅웅. 타일에 부딪힌 목소리가 울린다. 탕에 담갔던 손을 들어 팔뚝에 물을 끼얹었다. 상체는 물에서 나와있으니 오소소 소름이 끼친다.
“전엔 경황이 없어서 바로 말씀 못 드렸는데 저희 아빠 대신 편지 받아주신 거 감사합니다. 꼭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뭘 그런 걸 갖고 고맙다하노 주소만 쪼매 바꿨을 뿐인데. 이웃끼리 돕고 그러는 거제.”
“아니에요. 귀찮으셨을 텐데―. 할머니가 저랑 아빠랑 편하게 편지 주고받을 수 있게 도와주신 거잖아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아빠가 그렇게 제 편지를 기다렸다는 것도 모르고 가끔 그게 귀찮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할머니가 아니었어도 아빠는 내 편지를 받을 수야 있었을 거다. 받는 과정이 길어졌을 뿐 언젠가는 받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빠는 하루빨리 내가 쓴 편지를 받고파 할머니께 대신 받아달란 부탁을 했던 거라고. 그 사실을 안 지는 정말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시큰시큰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목까지 물에 담갔다. 따뜻한 물에 답답한 숨을 내쉬자 가슴의 통증이 무뎌졌다.
“애비되는 사람이 것도 못하겠나. 직접 만날 수야 없음께 당연히 안부라도 재깍재깍 알려야제. 아가 니는 잘못한 거 없다.”
“할머니….”
“아야 됐고, 그러다 불어터진 오뎅 될라 그만 퍼뜩 나온나.”
네에. 할머니의 말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잠시 금세 탕을 나와 목욕 바구니를 든 채 손짓하는 할머니를 따라 탕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긴 좀 오래 있긴 했네. 지민 씨는 벌써 다 씻고 나왔으려나. 남자들은 엄청 빨리 씻고 나온다던데. 그래도 오랜만에 온 목욕탕이니 발꿈치까지 깨끗하게 씻었다. 아직 허리가 약한 할머니도 도와드리고 옷을 껴입은 뒤 대강 머리를 말렸다. 나머지는 알아서 마르겠지 싶어 머리칼이 젖은 상태로 밖으로 나오자 아니나 다를까 벌써 목욕을 마친 지민 씨가 목욕탕 내부 의자에 앉아있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게 무료했던지 작은 노트 위로 뭉툭한 4B연필을 쥐고선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가만 보면 지민 씨는 항상 뭔가를 그리고 있는 때가 많은 거 같다. 도구도 다양하다. 노트나 스케치북, A4용지 그리고 4B연필, 볼펜, 색연필이 시시때때로 바뀌면서 뭔가를 그리고 있다. 뭘 그리는 걸까. 흘끗 곁눈질해 노트를 훔쳐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대강 한 명의 인물을 그리는 거 같았다. 할머니는 그새 막 목욕탕으로 들어오던 아주머니 분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오래 기다렸죠? 자, 이거 마셔요.”
“아, 다 씻었어요?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수지 씨 있어서 빨리 나온 편이에요. 할머니는 씻는데 엄청 오래 걸려서 내가 같이 목욕탕엔 안 오려고 한다니까―.”
지민 씨는 앉은 채로 연필을 노트에 끼운 후 내가 건네는 단지 모양 바나나우유를 고맙다며 받아들었다. 목욕탕 안에 파는 수많은 우유 중에 두 개를 고른 후 미리 빨대까지 꽂아 건넨 것이다. 지민 씨는 내가 건넨 우유를 한 모금 쭉 마시더니 크으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역시 목욕 후엔 차가운 우유죠? 묻는 내 말에 폭풍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엄지를 치켜들기에 소리 없이 웃었다.
“할매! 안 갈 거야?”
“너그들 먼저 가라. 할미는 이바구 좀 떨다 갈란다.”
소리 높여 자신을 부르는 지민 씨의 목소리에 할머니는 손을 휘휘 저어 먼저 가라고 일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지민 씨가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그렇다는데, 먼저 갈까요?
나란히 손에 빨대 꽂은 우유를 들고 목욕탕을 나오자 어느새 동이 튼 하늘이 검푸른 밤의 색을 머금은 채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한낮의 하늘과는 다른 의미로 푸르게 변한다.
“새벽에 목욕탕 오는 것도 괜찮네요. 조용하고 깨끗하고.”
“우유도 맛있고.”
내 말에 우유를 든 손을 살짝 흔든 지민 씨는 크크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릴 때 엄마랑 나는 저녁에 목욕탕을 오곤 했었다. 이른 아침에는 내가 단잠에 자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엄마도 아침잠이 워낙 많아 새벽에 깨어 목욕탕에 가는 건 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할머니처럼 새벽에 물이 깨끗하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저녁에 가는 목욕탕이 좋았다. 이른 오후쯤에 들어가 씻고 나오면 때마침 노을이 지고 있는 저녁의 공기라던가. 여름이면 덜 마른 머리를 하고서 차가운 우유를 마시거나 겨울이면 엄마와 목욕탕 앞 간소한 포차 리어카에 팔던 어묵을 먹던 게. 아침보다 저녁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른한 느낌이라 저녁에만 느낄 수 있던 그 모든 것들이 참, 좋았다. 근데 이렇게 새벽에 와보니 조금 졸리긴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괜찮은 거 같다. 새벽은, 그래 신선한 느낌이다.
지민 씨와 나는 한적한 도로 옆길을 걸었다. 오른쪽으로는 차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는 텅 빈 도로가 있고 왼쪽으로는 색색깔의 코스모스가 산들거리는 풀밭이 있었다. 집까진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어…? 머리 다 안 말리고 나왔어요?”
“아 이거요? 지민 씨 기다릴 거 같아서.”
“까짓 거 기다려도 괜찮은데 말리고 나오지. 이제 새벽엔 추워요.”
“알아서 마르겠죠 괜찮아요―”
그새 내 덜마른 머리를 발견했나보다. 나는 아직은 축축한 머리칼을 쥐다 멋쩍게 웃어 보였다. '잠깐만 이거 좀 들어줄래요?' 그리 말하며 먹다 만 우유를 내밀기에 얼떨결에 그걸 받아주자 지민 씨는 제가 걸치고 있던 남방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두 손 다 우유를 쥐고 있어서 말릴 새도 없었다.
“감기 걸리면 안돼요. 여기까지 왔는데 아픈 채로 있으면 더 힘들잖아요.”
“……고마워요.”
약하게 웃다가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동시에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가 품고 있던 온기가 어깨를 따스히 데웠다. 둘 다 아무 말없이 걷고 있는데 별로 침묵이 어색하지가 않았다. 신기한 일이지.
“…아아, 드디어 생각 났다!”
“뭐가요?”
“그때 수지 씨가 만든 김치찌개, 맛있었다구요. 정신이 없어서 말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
“겨우 그 말하려고….”
“왜요, 이건 엄청 중대한 말이라고요. 예전에 수지 씨 편지에 김치찌개를 만들었단 얘기가 있었는데 사실 무지 궁금했었거든요!”
“그냥 김치찌갠데요 뭘. 그래도 맛있었다니까 나중에 또 만들어줄게요. …실은 그거 말곤 잘 못하지만.”
우유를 말끔히 다 마시고 나자 자연스레 지민 씨가 손을 내밀어 빈 병을 달라 했다. 어리둥절한 채로 그걸 내밀자 길 가다 나온 버스 정류장 옆 쓰레기통에 제 몫의 병까지 모아 버린다. 그리곤 또 뭐가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낸다. 한참 뜸 들이다 핸드폰을 불쑥 내밀기에 아까처럼 어리둥절한 얼굴을 미처 지우지 못했다.
“……번호 줄 수 있어요?”
두 눈을 깜빡였다. 지민 씨를 올려다보자 핸드폰을 내민 채 붉어진 귀를 하고서 시선을 땅에 두고 있다. 슬그머니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왠지 놀리고 싶어진다.
“왜요?”
“네? 아, 그게…. 전에 학교 마치고 오다가 수지 씨한테 저녁으로 만두는 어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번호를 모르더라구요 그래서….”
“지민 씨는, 별거 아닌 것 같은 일도 크게 만드네요.”
“…….”
횡설수설 당황했는지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던 지민 씨는 웃음을 참는 내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썩 쌀쌀맞게 느껴질 법한 내 말에 눈에 띄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시무룩해했다. 그에 나도 모르게 푸흡 웃음이 터졌다. 방금 되게 솜이 같았다. 웃음소리에 뭐냐는 얼굴로 고개만 살짝 든 지민 씨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내며 말했다.
“칭찬이니까 어깨 펴요. 그냥 쉽게 지나갈 일도 잊지 못하게 만든다는 소리였어요.”
언제까지나 기억에 또렷이 남을 추억으로 만든다고요.
고작 김치찌개가 맛있었다는 말로,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겉옷을 벗어주는 배려담긴 행동으로, 번호 하나 물어보는 서툰 모습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지민 씨는. 내 번호를 입력해 그에게 돌려주자 시무룩했던 얼굴이 그새 활짝 폈다. 그러고 보니 오늘로 며칠 째지. 사 일째인가. 저렇게 말갛게 웃는 지민 씨를 볼 날도,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질 날도. 머지않았구나.
***
지민 ver.
핸드폰을 한 번 수지 씨를 한 번 그렇게 번갈아 보길 세 번째다. 핸드폰 화면에 찍힌 낯선 번호가 신기하기 그지없다. 와, 편지만 주고받던 상대와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10개도 채 되지 않는 전화번호부에 수지 씨의 번호가 자리 잡았다. 삼일 뒤면 수지 씨는 서울로 올라가겠지만 지금 이 순간 수지 씨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에 슬며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뭐라고 저장할까 하다가 그냥 '수지 씨'라고 저장했다. 그게 또 신기하고 그래서 괜히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봤다. 번호도 곱씹어 보고.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용기내 물었는데 다행히 수지 씨는 거절하지 않았다. 장난친답시고 왜냐고 물었을 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어쨌든 결과는 성공이다.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에 입을 손등으로 가렸다.
“…지민 씨?”
“네, 네?! 왜, 왜요?”
“응? 왜 그렇게 놀라요? 지금 뭐 그리고 있냐고 묻던 중이었어요.”
“아…,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하하….”
화들짝. 날 부르는 수지 씨 목소리에 멍하니 빠졌던 정신을 겨우 되돌려놓았다. 맞아, 지금 그림 그리는 중이었지. 마루에 앉아 솜이와 장난을 치고 있던 수지 씨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밝은 갈색 눈망울이 곧이어 내가 들고 있는 스케치북으로 향했다.
“그냥, 수지 씨 그려요.”
“우와, 나요?”
“네, 그리고 솜이랑.”
그리 말하며 수지 씨 앞에서 배를 발랑 드러내고 누운 솜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만져달라는 거 같은데. 수지 씨도 그걸 알아챘는지 한 손으로 배를 살살 긁어준다. 수지 씨는 구태여 내게 보여달라 말하지 않았다. 정호원이나 안승연 같으면 득달같이 달려들며 보여달라 난리를 치는데 말이다. 흐음.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비음을 흘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어쩐지 그 시선이 민망해 괜히 갈 곳 잃은 눈을 스케치북으로 박았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림은 그냥 취미로 그리는 거예요?“
“어… 말하자면 그렇죠? 취미이자 특기? 라고 할까.”
꼭두새벽부터 목욕탕을 갔다 오느라 이제 겨우 해가 완전히 떴을 뿐이다. 아직은 새벽의 찬 기운이 남아서 마루에 앉아있는 몸이 쌀쌀했다. 할 일도 없고 아침을 먹기에도 이른 거 같아 수지 씨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마루로 나와 앉아있는 중이었다. 별안간 간만에 제대로 씻어서 개운하다며 눕다시피 늘어지게 앉은 수지 씨와 꼬리를 살랑대며 따라 올라온 솜이 그 옆에 앉아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낸 나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수지 씨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하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 이미 방의 작은 책장에는 여태 심심찮게 그려온 그림들로 채워진 노트나 스케치북 따위가 빼곡히 쌓여있었다.
“그럼 진로가 미술 쪽이겠네요?”
“음, 아니요. 그쪽으론 사실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참 수능을 한 달 앞둔 고삼의 말 꼬라지가 이렇다. 수능은 칠 생각이, 아니 각오가 안 돼있어서 수시를 넣긴 했었는데 결과는 다음 달 발표라 아직 미정이다. 예전에도 수지 씨랑 진학 문제로 고민을 털어놨었는데 그때 그녀는 내게 선택은 내 몫이지만 어찌 됐든 계속 내 그림이 보고 싶을 뿐이라 했다. 거기서 납덩이 마냥 묵직하던 고민은 새털 마냥 가벼이 무게가 덜어졌다. 사실상 본질적으로 해결되는 것 없다고 해도 별거 아닌 듯한 한마디의 위로와 조언이 큰 힘이 됐다. 적어도 뭐가 됐든 잘 헤쳐나갈 자신이 생겼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지 묵묵히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엇보다 엄청난 힘이다.
“왜요? 그냥 삭히기엔 너무 아까운데 지민 씨 그림.”
“옛날엔 학원 같은데 다니고 싶었는데 이런 시골에 그런 학원이 어디 있겠어요. 분명 꿈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취미로 남아버렸어요. 꿈을 목표로 해두면 좋아하던 것도 힘들어지니까 싫어질 수 있잖아요. 그걸 미연에 방지하고자 제 스스로 취미로 타협해버렸달까. 그럼 적당히, 즐기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수지 씨는 내 말을 듣고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고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하긴…. 좋아하던 건데 그거 때문에 힘들어지면 너무 슬플 거 같아요.
그래, 나는 이대로도 좋다. 물론 더 배우고 싶은 부분도 늘 마음속에 자리했지만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종종 생각하곤 한다.
“알았다―. 지민 씨는 아직 계기가 안 나타나서 움직이지 않는 거 같아요.”
“…계기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 같은 거요. 분명 지민 씨는 배우고 싶은 열망은 있는데 그걸 실현시키는 법을 모르는 거죠. 그래서 대신에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방향부터 잡은 거예요. 그게 간단하고 어렵지 않으니까. …아닌가?”
수지 씨는 그렇게 말해놓고 끝에 가서 자신이 없었는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피실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완전히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뭔가를 그리는 행위는 아주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내 속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때야 의례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짧둥한 손에 쥐어졌던 크레파스로 정체불명의 낙서를 끼적이던 게 시작이었을 거다. 나는 유치원을 다닐 무렵부터 건담이나 게임같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바닥에 드러누워 하얀 스케치북에 낙서든 뭐든 무언가를 그려대는 걸 더 좋아했다. 왠지는 모른다. 솔직히 지금 봐도 무슨 생각으로 그렸는지 모를 해괴한 그림들이지만 늘 내 손은 색색깔이 뒤섞인 크레파스 자국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손에 크레파스 자국이 가득한 내 손을 본 부모님이 색연필을 사다 준 건 나중의 얘기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림에 취미를 붙인 건 10살 무렵이었다. 9살부터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됐고 그맘때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챙겨온 짐 속에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 한 장이 끼워져있었다.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뒷면에 햇님반 윤지민이라 큼지막하게 쓰인 삐뚤삐뚤한 글씨를 보고 아, 내가 옛날에 그린 그림이구나 싶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그때 맨 위 칸에 쓰인 주제를 발견했다.
“뭐가 그려져 있었는지 알아요? 그냥 단순한 가족 그림이었어요. 근데 그림 맨 위 칸에 유치원 선생님이 써 붙인 주제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주제가 뭐였는데요?”
“내가 좋아하는 것.”
엄마 아빠 나 할머니 이렇게 모두가 동산 같은 곳을 배경으로 해맑게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의 주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다른 애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 음식, 하다못해 엄마나 아빠를 그렸던 반면 나는 '가족'을 그렸었다.
“막 부모님과 떨어지고 할머니랑 단둘이 살게 된 10살짜리 애가 좋아하는 걸 가족으로 그렸던 과거의 자기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거예요. 그 좋아하는 걸 뭔가 잃은 듯한 기분이 든 거죠.”
“10살이면… 어렸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마 그때부터 일 거예요. 뭔가를 그리는 행위 자체를 좋아만 하다가 꿈으로 정하게 된 게. 순전히 충격 때문에 빚어진 오기 같은 거기도 했어요. 상상했던 이미지를 무수한 선이나 색으로 나타내다 보면 언젠가 내가 바라는 상에 가깝게 아니 비슷하게라도 닮아있지 않을까 싶어서?”
“상상하니까 왠지 귀여운데요?”
“치, 뭐가 귀여워요. 그땐 그 그림이 짜증 나고 꼴보기 싫어서 구겨서 서랍에다 처박아 넣을 정도로 다혈질이었는데요.”
“그래도 아무리 오기라지만 기특하잖아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그 당시를 떠올리며 입을 비죽거리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수지 씨가 별안간 가까이 다가와 한 손을 들었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구 기특해. 그렇게 말하며 쓰다듬는 손길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건 정말 순식간이어서 나는 얼이 빠진 얼굴로 가만히 수지 씨를 바라봤고 그 조심스러운 온기를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얼굴이 내가 느끼기에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뭐, 뭐예요….”
“아,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귀여워서 그만―.”
“…….”
“그럼 엄청 오래된 꿈이네요? 아아, 이제 꿈 아니라고 했지…. 지금은 취미래도 그렇게 올곧게 뭐 하나를 좋아하는 게 쉽진 않잖아요. 대단한 거예요 그거. 나는 지민 씨 그림이 좋아요. 얼마 보지는 못했지만 그간 편지를 주고받는 중에 받은 그림에도 지민 씨가 느낀 생각이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뭐가 됐든 마찬가지예요. 본인이 즐기면서 하는 것들은 그걸 보는 타인마저 즐겁게 만들거든요.”
조금 멍한 기분이다.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이때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뭐든지 처음을 일깨워주는 그녀다.
“……그 원동력이란 거, 지금 생긴 거 같아요.”
“으응? 뭔데요?”
있어요 그런 게―.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문제 될 건 없다. 그녀의 말마따나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고 나는 내가 좋고 즐겁다고 생각하는 길로 나아가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슬플 일은 없지만 동시에 행복할 일도 없게 된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수지 씨였다. 삼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핸드폰에 저장된 새로운 연락처가 언제까지나 남아있기를 내면의 스케치북에 간절히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