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만 한 하얀 손수건이 빨랫줄에 걸려 나풀거렸다. 꽃무늬 자수가 콕콕 박힌 손수건 너머로 햇볕이 넘어와 얼굴 위로 넘실댄다.
“날씨 좋다….”
가을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시골의 하늘은 참 유달리 맑은 거 같다. 내리쬐는 햇살이나 살랑대는 바람이나 눈 위로 새파랗게 내려앉는 하늘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바람이 통한다. 이런 사소한 여유가 마음에 큰 안정이 되는가보다. 다들 이래서 힘들 때면 훌쩍 여행을 떠나는 건가. 나는 해가 중천에 떴을 때야 일어났다. 덜 떠진 눈을 하고서 비척비척 마루로 나가니 쾌청한 가을 날씨가 나를 반겼다. 아, 마루에 앞발을 기댄 채 꼬리를 붕붕 흔드는 솜이도. 그런 솜이의 귀를 긁어주고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펴는데 문득 아침에 들었던 말이 떠올라 스리슬쩍 마당을 빙 둘러봐야 했다.
'수지 씨…? 아직 자요?'
똑똑. 이른 아침 미닫이문 너머로 지민 씨가 조심스레 무어라 말했던 거 같다. 비몽사몽 잠에 취해 그 목소리가 꿈결같이 멀게 느껴져 드문드문 기억나는 아침의 잔상이다.
'학교 가봐야 돼서 먼저 갈게요. 최대한 일찍 오긴 할 건데 그래도 아마 저녁이나 돼야 올 거 같아요…. 참고로 아무거나 먹어도 아무거나 만져도 돼요.'
대답은 제대로 했던가? 한참을 웅얼거리다 겨우 잘 다녀오란 말만 한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집이 영 조용했다. 맞다. 학교 가는 날이구나. 그나저나 아무거나 먹어도 만져도 된다니. 그래도 난 이방인인데 너무 편하게 대하는 거 아닌가 싶다. 방에 들어가 어제 못 한 짐 정리를 마저 하다가 바지춤에 넣어뒀던 지민 씨의 손수건을 발견했다. 아, 어제. 뒤늦게 전날 엉망으로 울었던 몰골이 생각나 화르륵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손수건을 깨끗하게 빨아 널어놓는 것이었다. 내 눈물이 자욱이 묻어 말라붙었을 손수건. 마당에 딸린 수돗가에서 손수건을 빨아 빨랫줄에 걸어놓았다. 나풀거리는 흰 손수건이 묘하게 지민 씨를 닮았다.
“프흐….”
역시 상냥한 사람. 나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흘리며 부엌으로 들어가 식탁 위 쟁반에 있는 사과 한 알을 집어 들었다. 깨끗이 씻어 통째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냉장고를 살피는데 음?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하기엔 너무 뭐가 없는 거 같다. 보리차가 담긴 물통과 탄산음료 몇 개가 다다. 그나마 있는 반찬통 하나를 열어보니 어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나물 같은 게 들어있었다. 킁. 상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뭐지? 어릴 적부터 할머니가 집안일은 손도 못 대게 했다더니 그래도 음식을 만들려고 시도는 했던 흔적 같다. 할머니가 집을 비운지 근 사 개월은 됐다니까 그동안 제대로 챙겨 먹긴 한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엌의 서랍을 여니 참치 통조림이나 3분 카레, 라면 따위의 인스턴트식품이 들어있었다. 어쩐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마른 거 같았더라니.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오래 자긴 했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장을 봐오려면 읍내로 나가야 했기에 금세 사과 하나를 해치우고 외출 준비를 했다. 아차차. 곧장 집을 나서려다 다시 돌아와 솜이의 밥그릇에 물을 채워주고 나왔다.
'혹시 나갈 일 있으면 우체통에 열쇠 넣어둘게요.'
낡고 녹슨 우체통에 손을 넣어 헤집자 차가운 금속이 만져졌다. 달캉. 대문을 걸어 잠그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문득 새벽부터 갔다 오겠다며 손을 흔들던 지민 씨가 생각났다.
억지로 뜬 졸린 시야 사이로 내가 보는지도 모르면서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서 문을 살며시 닫고 나가던 그 모습이. 쾌청한 날씨에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쉬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읍내로 향했다. 자꾸 이렇게 여유 부리며 가다가는 해질 때나 돌아오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
역시나 너무 뭉그적거렸나 보다. 이건 그냥 동네 구경 간 김에 장을 본 격이다. 들뜬 기분으로 읍내의 곳곳을 누비다 양손에 짐을 챙겨 돌아왔을 땐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더라. 이러면 좀 빠듯하겠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간단히 준비할 수 있는 것들로 꾸려서. 한창 읍내를 구경하다가 작은 문방구 앞에 눈에 띄는 불꽃놀이 폭죽이 보여 덜컥 그것도 몇 개 사고 말았다. 불꽃놀이라고 하기도 뭐 하다. 타들어가며 반짝반짝 빛나는 폭죽 스파크 두어 개를 집었을 뿐이다. 글쎄, 이런 걸 본 지도 정말 까마득히 오래돼서 갑자기 하고픈 충동이 들었달까.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 짐을 풀었다. 식탁에 식빵 한 뭉치를 내려두고 냉장고에 간단히 요기할 거리를 채웠다. 솔직히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건 김치찌개뿐이다.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 8살 무렵 엄마가 하던 요리를 따라 해보겠다며 호기롭게 시도했던 찌개는 엉망 그 자체였지만 아빠는 한 숟갈 맛보더니 엄마가 한 맛이랑 똑같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결국 그때 꿋꿋이 내가 만든 찌개를 다 비운 아빠는 화장실을 종일 들락거려야 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 미소를 흘리다 바쁘게 움직였다.
“그래도 이제 잘 만든다 뭐―.”
김치찌개, 계란말이, 나물 무침 등 할 수 있는 만큼 소박하게 음식을 차렸다. 사실상 부엌에 있는 식탁은 잘 안 쓰는 모양새여서 벽 한편에 기대 있던 상을 펼쳤다. 얼추 모양을 갖추고 나니 벽에 걸린 시계는 6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고삼이지만 일찍 온다고 했으니 이제 슬슬 지민 씨도 하교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손을 씻고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리는데 덜컹, 끼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낑낑. 솜이의 우는 듯 짖는 소리도 들린다. 왔나 보다.
“지민 씨 왔어요? 방금 저녁….”
다다다 빠른 걸음으로 마루로 나가며 반기던 말이 미처 입 밖을 나가지 못하고 혀끝에서 스스스 흩어져버렸다. 대문을 넘어 들어온 건, 지민 씨가 아니었다. 한 손에 연분홍색 보자기로 감싼 짐을 들고 굽은 허리에 희끗희끗 하얗게 센 머리를 쪽지은 할머니가 마당에 서계셨다.
“……아가씨는 뉘슈?”
“어, 어어?”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마루에 멀뚱히 서서 허둥거렸다. 이런 분위기를 전혀 알 길이 없는 솜이는 아마도 처음 보는 지민 씨 할머니임에도 꼬리를 흔들며 난리가 났다. 할머니는 본인이 집을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지 대문 밖을 두리번거리셨고 나는 반쯤 얼이 나간 채로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할머니! 저는 그러니까….”
으아아. 내일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 왜 하필 이런 때 지민 씨는 없는 거야. 맞다, 전화. 빨리 전화를! …번호를 모르잖아아! 진작 물어볼 걸 나 혼자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란 거야. 혼돈에 빠진 난 속으로 마구 소리 질러야 했다. 텔레파시라도 어디. 지민 씨 빨리 와요. 네?
***
지민 ver.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학교고 뭐고 땡까고 싶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고삼이었다. 사실 지금도 다른 애들에 비해 충분히 여유롭지만. 새벽 동도 트지 않은 시간에 부스스 일어나 한숨부터 쉬었었다. 집이 너무 조용해서 어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바로 나가려다 내 방문이 보여 멈칫거렸다.
'역시 꿈이 아냐.'
여기에 수지 씨가 일주일 간 머무를 예정이라는 게 새삼 믿기지가 않았다. 전날 여기까지 오느라 분명 피곤할 테니까 나는 조심스레 노크를 했고 미닫이문을 살짝 연 뒤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수지 씨…? 아직 자요?'
'으으음….'
어제 새로 꺼내 정리해준 이불을 푹 덮고 엎드린 채 자고 있던 수지 씨가 내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한참을 무어라 웅얼거리다 부스스 눈을 뜨길래 나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러쿵저러쿵 간단히 얘기를 해줬는데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다.
'잘 다녀와요오….'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다시 잠에 든 것 같던 수지 씨가 그 와중에 잠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배웅을 했다. 분명히 최대한 일찍 오겠다고 했는데 나는 6시가 넘어가는 내내 학교에 묶여있었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종례에 턱을 괴고 창밖을 응시하며 딴 생각에 빠졌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수지 씨한테 마을 구경을 시켜줄까. 아니다. 내일도 아버지 보러 가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드디어 학교가 끝났고 반 아이들 대부분이 교실에 남아있었지만 나 혼자 쏜살같이 교실 밖을 튀어나갔다. 뒤에서 정호원이 부르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밖을 나오니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학교 앞을 지나가다 만두 가게가 보여 걸음을 늦췄다. 가만 집 냉장고의 현황을 되짚어보니 역시 뭐가 있을 리가. 고민하다 수지 씨와 저녁으로 먹을 만두까지 포장해갔다. 처음엔 물어보려고 핸드폰을 꺼냈는데 아직 번호를 모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번호… 물어보면 이상하게 볼까.”
평소에도 학교와 집 거리가 멀다곤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멀게 느껴졌다. 겨우 버스에서 내려 빠르게 골목으로 들어갔다. 높은 돌담벽과 좁은 길목 끝에 다다르면 우리 집이 나온다. 타박타박. 부스럭부스럭. 한쪽 손엔 포장된 만두를 들고 한쪽 손은 교복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고선 정돈되지 않은 골목길 바닥을 보며 걷다가 대문 앞에 걸음을 멈췄다. 우체통에서 아침에 넣어두고 간 열쇠를 다시 꺼내 대문에 꽂았다. 덜컹. 녹슨 대문을 열고 한 발짝 발을 들였다. 동시에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멍청히 두 눈을 끔뻑거려야 했다.
“어, 지민 씨 왔어요?”
“어여 온나. 밥 다 식는다.”
“…….”
이게, 뭐지? 사 개월 만에 보는 내일 온다던 할머니와 편한 차림의 수지 씨가 마루에 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상 위에는 곧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던지 갖가지 반찬들이 올라가 있었다. 얼빠진 얼굴로 그 이상한 조합을 보고만 있는데 어서 오라며 재촉하는 할매의 손짓이 참 오랜만이기 그지없다.
“뭐야 뭔데! 할매 언제 왔어? 내일 온다며!”
“하이고, 와 할미가 늦게 오길 바랐드나?”
“그게 아니라….”
“글고 니는 집에 손님이 왔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이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수지 씨와 눈이 마주쳤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눈으로 물었지만 수지 씨는 그저 어깨만 으쓱여 보였을 뿐이다. 아아, 할머니한테 미리 말한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렇게 불쑥 신세 지게 돼서 죄송해요 할머니.”
“아이다―. 옛날에 그 양반한테 딸아 얘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이리 만나기도 하네. 내는 왔드만 집에 고운 처자가 있길래 놀라가지고 우리 손주 애인인가 싶었제.”
“…두 사람 벌써 통성명은 끝난 거예요?”
“오신지 얼마 안 됐는데 그렇게 됐네요. 아, 지민 씨 빨리 와서 밥 먹어요! 제가 대충 만들기는 했는데 할머니께서 가져온 게장이랑 깍두기도 있어요.”
내가 없는 사이 고새 소개를 마쳤는지 할머니와 수지 씨는 곧잘 편히 대화를 했다. 맑게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나중엔 나도 그 틈에 끼어들어 마루에 털썩 앉게 됐다. 당황스러운 기분이 가시고 나자 자연히 마루 안쪽으로 시선이 갔다. 적막하다. …안 오신 건가?
“할매. 엄마랑 아빠는, 같이 안 왔어?”
“내일 같이 내려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가꼬 오늘 급하게 델다주고 올라가버렸다.”
“아…, 그래? 어쩐지 일찍 왔더라니. 그래도 다행이다 할매, 허리 괜찮아져서.”
어쩔 수 없지 뭐. 억지로 웃음을 짓고선 괜히 바쁘게 수저를 놀렸다. 와, 이거 수지 씨가 만든 거예요? 맛이 장난 없는데요? 들떴던 기분이 차게 식는 게 느껴졌다. 기대하지 말자고 매번 생각하면서도 항상 이런 식이다. 사정이 생겨서 못 볼 수도 있는 거고 부모님이 바쁘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실망하지 않으려 해도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두 사람이 하는 대화에 간간이 흐리멍텅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밥은 깨끗이 비웠지만 어쩐지 속은 텅 빈 것만 같았다. 그 사이로 수지 씨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도운 후에 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내가 그저께 사뒀던 사과를 깎아두고 마루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하…….”
결국 체했다. 이불도 깔지 않은 맨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답답한 숨을 푹 내쉬었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는 기분으로 꾸역꾸역 밥을 삼켰더니 속이 진창 더부룩하다. 팔을 베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전칠기 서랍 위에 놓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족사진이다. 아주 어릴 적의 나와 지금보다 흰머리가 적었던 할머니 그리고 엄마랑 아빠. 동네 사진관에서 찍은 딱딱한 배경을 두고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
“뭘 기대한 거야….”
탁. 사진을 덮어버렸다. 굳게 감은 까만 시야 위로 사진의 잔상이 남았다. 들떠서 웃고 있던 어제의 내가 바보 같다.
***
수지 ver.
이런 상황도 닥치고 보니 은근 재미있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선 겪을 수 없는 일상이랄까. 이런 일상의 순환을 매일매일 겪는 지민 씨는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겉만 보면 각박한 세상살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고민이나 걱정도 크게 없이 밝게 자란 느낌이다. 하지만 말마따나 그건 역시 '겉'으로만 봤을 때의 얘기다.
할머니는 긴 길을 이동한 탓에 금방 잠자리에 드셨고 나도 마저 솜이와 놀다 일찍이 잠에 들었다. 잠결에 갈증이 나 깨어난 건 그로부터 3시간 뒤 한 새벽의 일이었다.
“……음?”
부엌에서 물을 한 컵 따라 마시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지붕 처마 밑에 희미하게 전구 불이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누가 있나 싶어서 마루로 나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저 수명이 거의 닳은 전구의 희미한 노란빛이 간신히 시야를 밝혀주고 있을 뿐이었다. 전구를 끄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 마당에 나와있는 신발 중에 지민 씨의 신발만 없는 걸 발견했다. 이 새벽에 설마 어딜 나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을 내려다보기를 몇 분. 어딘가 마음이 쓰인다.
“아까 표정 안 좋던데….”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할머니를 보고 놀라고 반가운 심정이 고스란히 떠올랐던 지민 씨의 표정이 곧 불편하게 바뀌던 게 문득 떠올랐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곁눈질로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과 부모님이 오시지 않은 걸 알고 금세 실망으로 뒤덮였던 얼굴이. 혹여 실망한 게 겉으로 드러날까 봐 괜찮은 척 애써 웃던 그 모습이 계속 신경 쓰였다. 1년 만에 본다고 쑥스럽게 웃던 지민 씨가 곧 눈앞을 아른거렸다. 얕은 한숨을 폭 쉬고 고개를 들었는데 담벼락 너머 푸르스름한 새벽을 낀 바닷가에 어렴풋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실루엣을 응시하다가 그게 지민 씨 같아서 퍼뜩 들고 있던 물 한 컵을 단숨에 마시고 방에 들어갔다.
“여깄다―!”
낮에 반찬거리와 함께 사 왔던 폭죽을 가방에서 꺼냈다. 혹시 몰라 같이 사 왔던 라이터도 챙겨 급하게 신발을 구겨 신은 뒤 집을 빠져나왔다. 골목을 한 바퀴 빙 돌아 드문드문 자갈이 깔린 모래사장 안으로 들어가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에 새벽의 한기가 훨씬 짙게 느껴졌다. 가을이라 일교차가 커서 꽤나 서늘한 바깥공기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금방 지민 씨의 뒷모습을 찾아냈다. 눈치 없이 놀래주려던 것도 잠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선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 그냥 천천히 다가가 옆에 섰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는데도 생각에 잠겨있었던 모양인지 지민 씨는 옆에 선지 5분이 지나서야 나를 발견하고 어깨를 흠칫거렸다.
“깜짝이야…. 언제 왔어요?”
“방금요. 안 자고 뭐 해요? 새벽이라 추운데 옷도 그렇게 입고선.”
“음, 그냥요. 속이 답답해서 바람이나 쐬려고.”
달랑 면티 위에 후드집업 하나 입고 쌀랑한 바닷바람을 맡고 있던 지민 씨는 조심스레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항상 웃을 때면 반달처럼 휘던 눈이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웃고 싶지 않으면서 웃고 있는 모양이다.
“할머니랑 무슨 얘기했어요?”
“아 맞아. 낮에 갑자기 지민 씨 할머니가 오셔서 얼마나 놀랐다구요. 나 진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니까요?”
“하긴 우리 할매 포스가 한가닥 하죠?”
“그래도 사정 말씀드리니까 살갑게 대해주셔서 금방 편해졌어요. 나한테도 할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은 느낌? 또 아까 저희 호칭이 뭐 그러냐고 타박하시더라구요. 나이도 엇비슷한 것끼리 누구누구 씨가 뭐냐면서―”
“음, 다른 사람 눈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구구절절 일부러 더 오버하면서 얘기하는 내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이때까지 신나서 즐겁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던 쪽은 지민 씨였는데 오늘은 그 반대가 된 거 같다. 묘하게 가라앉은 두 눈에 나는 아직도 마음이 쓰였다.
“그러니까요. 우리 친한데.”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말하자 잠시 말이 없던 지민 씨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대답에 얕은 웃음기가 스며들어있었다. 호칭이 무슨 문제겠는가. 남들이 알 리 없는 우리의 모습도 분명 이렇게 선연하게 존재하는데 말이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불자 금세 얼굴이 차게 식었다. 하지만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둡고 고요한 바다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지민 씨와 나는 한참을 그렇게 바다를 보며 아무 말 없이 모래사장 위에 서있었다. 잠시 후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혹시 제 말이 내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고스란히 말투에 배어있었다.
“수지 씨는, 어릴 때부터 떨어져 지냈잖아요. 보고 싶지 않았어요? …아버지요.”
“……아빠요?”
“아니 그것보단, 언제 오실까. 진짜 오기는 하는 걸까. 날 떠난 건 아닐까. 그런 생각, 한 적 없나 해서요. 나는 할머니한테 완전히 맡겨지면서부터 그랬거든요.”
할머니 앞에선 늘 괜찮은 척하느라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할머니도 몰랐을 거예요.
나는 지민 씨가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던 게 그는 아주 천천히 말을 떼고 있었기에 내뱉는 발음부터 중간중간 섞여든 숨소리까지 아주 가깝게 들렸다. 지민 씨가 묻는 말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물어보곤 했다. 내가 아빠와 따로 산다는 걸 알면 누가 됐든 마치 통과의례처럼 묻던 말이었다. '보고 싶지 않아?' 숱하게 듣던 그 질문에 나는 항상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헤매곤 했었다. 실은 정말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보고 싶다고 대답하면 어쩔 거고 보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면 또 어쩌려고 그런 질문을 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가. 순간의 호기심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설마 모르는 건가. 빙빙 헤매곤 하던 고민의 종착지는 늘 모난 마음이라 '그냥 뭐….' 하고 얼버무렸던 거 같다. 하지만 지민 씨가 묻는 말은 그런 껍데기뿐인 말이 아니었다. 그야 본인이야말로 그런 빈 껍데기 질문을 진저리 나게 들어왔을게 분명하니까.
“보고 싶다거나 기다렸다거나… 그런 쪽보단 나는 잊어버릴까 무서웠던 거 같아요.”
“아버지가 수지 씨를 잊어버릴까 봐요?”
“아뇨, 내가 아빠 얼굴을 잊어버릴까 봐요. 한 중학생 때였나. 그쯤 되니까 이미 아빠 목소리는 가물가물하더라고요. 가장 쉽게 잊혀지는 게 목소리라고 들었지만…. 지민 씨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는데요? 전에 편지에도 말했던 것처럼 내가 느끼기엔 다정한 분들 같았는데.”
“음, 평범해요. 딱히 못 해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해준 것도 아니지만. 그냥… 부모님이 불편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자꾸 할머니만 따르고 할머니만 쫓아다니다 보니까 그게 익숙하고 당연해졌어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까 미워도 미워할 수 없었어요. 아, 이렇게 말하는 거 맞나? 제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알아요, 이해했어요―.”
가느다랗게 미소 짓다가 지민 씨의 시선이 내 손으로 가는 걸 보고 퍼뜩 손에 쥐고 있던 폭죽이 생각났다. 눈을 한번 굴린 뒤 다짜고짜 폭죽 스파크 하나를 내밀었다. '응? 뭐예요 불꽃놀이?' 나는 낮에 읍내에서 샀다고 대답하며 칙칙 라이터를 켜 내가 든 스파크에 불을 붙였다. 바람 때문에 쉽게 붙지 않아 애를 좀 먹었지만 곧 불이 붙었고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이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민 씨가 멍하니 들고 있던 나머지 스파크에도 내 스파크를 맞대서 불꽃을 옮겼다. 이내 그의 동그랗게 말린 입술이 오오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푸르스름한 바다 가운데 불빛이 반짝반짝거렸다. 나는 스파크를 앞뒤로 움직이며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주시하던 지민 씨가 별안간 말했다.
“난 부모님의 소중함 같은 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에 자라서 그냥 할머니가 주는 사랑이랑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치만 그건 달라요. 아마 분명, 다를 거예요 그쵸?”
어릴 적 그가 느꼈을 불안. 내가 느꼈을 두려움. 동시에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은 알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해 외로웠던 사랑.
쏴아아 파도소리에 섞여드는 나와 그의 목소리가 마치 하나의 소리처럼 들렸다. 타닥타닥, 불꽃은 환하게 빛났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그의 눈동자 안에 빛이 담겨있었다.
“뭐 어때요―. 지민 씨가 받는 사랑도, 내가 받는 사랑도 다 저마다 다른 형태일 뿐이지 사랑받고 있다는 건 확실하잖아요.”
그제야 지민 씨는 천천히 동시에 밝게 웃었다. 둥글게 휘어지는 눈매가 진심으로 웃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