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씨?”
파라락. 흰 종이가 다급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눈물이 순식간에 차가운 볼에 달라붙었다. 알 수 있었다. 사부작 모래알을 밟는 소리가 들려 돌아본 곳에 웬 남자가 서있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목덜미를 반쯤 덮은 길이의 반듯이 정리된 까만 머리와 그 아래 놀라 커져있는 유리알같이 맑은 눈부터 흰 셔츠에 반쯤 풀어헤친 남색 넥타이와 남색 교복 바지 차림의 남자. 그리고 남자의 손을 떠난 흰 편지지와 나머지 손에 들려있는 볼펜 한 자루.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가 부르는 익숙한 내 이름까지. 그 모든 걸 보고 듣는 순간 내 눈앞에 서있는 이 사람이 지민 씨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지민…씨?”
혹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물론 둘 다 만나자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에 지민 씨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나 보다. 어쩌면 서로 그 얘기를 피해왔는지도 모른다. 잘못 마주쳤다가 여태껏 유지해오던 결속력과 유대감이 깨져버릴까 봐. 적어도 나는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왈칵. 한번 터진 눈물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민 씨를 보자마자 그 기세가 불어나버렸다.
“어, 어? 잠깐 왜, 왜, 왜 울어요…?!”
“아, 아니 그러니까… 난 이러려던 게… 으, 흐엉…!”
“…! 수지 씨?”
아빠의 고향을 본 여파 때문인지 벅차오르던 감정이 지민 씨를 보자마자 한시름 놓이면서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렇게 그만 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저 멀리서부터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수평선 어귀쯤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파도를 물끄러미 주시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파도는 코앞까지 당도해 하얗게 부서지곤 했다. 언제쯤 오나 하염없이 수 초 수 분을 세던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것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 철썩 방심하고 있던 내 안에서 마구 요동쳤다. 추레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그의 앞에서 엉엉 소리 내 울고 말았다. 눈물을 닦는 것도 포기한 채. 엉망으로 갈라지는 목소리도 숨기지 못한 채. 나는 그제야 여태껏 맘 놓고 울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으흐윽….”
“저기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와 곱씹어 본 적 없는 말투로 지민 씨는 연신 내 이름을 부르며 허둥거렸다. 뿌연 시야 사이로 난감해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지만 쉬이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이윽고 어찌할 바 모르고 안절부절하던 지민 씨가 그 자리에서 뒤를 돈다. 이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멍멍한 내 귀로 내려앉았다.
“안 볼게요. 여기 이렇게 뒤돌고 있을 테니까 다 울면 말해요! 알았죠?”
힘이 거의 풀려 후들거리는 다리로 모래바닥 위를 겨우 딛고 서서는, 꼿꼿하게 서있는 저 뒷모습을 보다가 무섭게 몰아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종국엔 목이 쉬고 눈이 빨갛게 부어오를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서서히 울음이 그치고 감정을 추스르고 나자 민망함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직도 반듯이 서있는 지민 씨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크흠…. 저… 이제 괜찮아요….”
“네? 아아.”
“…….”
어떡하지. 엄청 쪽팔린다. 이게 무슨 추태야 나. 대성통곡한 여운이 남아 훌쩍이며 조심스레 입을 떼자 지민 씨가 다시 천천히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머쓱한 얼굴이 보인다. 동시에 나를 걱정스레 살피는 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얇은 코트 소매로 문질러 닦자 지민 씨가 황급히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이민다. 자수로 된 깨알만 한 꽃무늬가 콕콕 박힌 하얀 손수건이었다.
“이거! 이걸로 닦아요. 깨끗한 거예요. 할머니가 항상 챙겨주시던 건데 이럴 때 쓸모가 있네….”
“감사합니다…. 또 미안… 해요. 갑자기 이래서….”
“아니요 전 괜찮아요. 뭐 때문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죠.”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지만 지민 씨는 이미 눈치챈 거 같았다. 그도 그럴게 우리는 이미 편지로 수많은 사정과 일상을 공유했다. 속속들이 서로를 꿰고 있는 게 당연했다. 불과 며칠 전 편지에 아빠의 고향이자 지민 씨네 동네인 이곳에 내려온다 얘기했으니까.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추하게 울어버리는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예상은 했지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상황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아마 나는 엄마 앞에서도, 윤기 앞에서도 이렇게 운 적은 결단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민 씨는 오랜 가족과 친구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나'를 마주한 기분. 나와 닮은 점이 아주 많은 사람. 그래서 이런 식의 난데없는 대화도 어색함 없이 이어갈 수 있는 걸까.
“솔직히 좀 놀랐어요. 아무리 사진을 봤다지만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너무 똑같아서….”
대충 얼굴을 닦던 손수건을 두 손에 꼭 쥐고 슬그머니 눈길을 올렸다. 웃는 나 때문에 안심이 됐던지 지민 씨도 덩달아 한시름 놓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도 하고 싶은 말이다. 아무리 많은 그림과 사진을 봤다지만 보자마자 바로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새 잊고 있었다. 고개를 틀자 수평선 너머 너울너울 저물어 가던 노을이 반 이상을 자취를 감추고 있다. 어슴푸레 하늘에 서서히 푸른 기가 돈다.
“미안해요. 많이 당황했죠? 방금 전에 여기로 왔는데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구요. 근데 거기서 지민 씨 보자마자 갑자기 긴장이 확 풀리지 뭐예요.”
“제가 또 옆집 동생 같은 편한 매력이 있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조금씩 웃음을 지었다. 뭐 그것도 그렇네요.
“아버지는 잘 모셔다드렸어요?”
“네, 좋아하실 거 같아요. 여긴 공기도 좋고 바다도 있고 하니까.”
“다행이네요. 수지 씨가 큰 용기 냈단 거 알아요.”
“그게 지민 씨 덕분인 거는, 알아요?”
“내 덕분이요…?”
지민 씨는 얼굴에 순수하게 감정이 다 드러나는 성격인 거 같다. 지금만 해도 자신을 검지로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눈을 키우고 있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데 동기부여를 해준 건 그와 주고받은 편지 덕분이었다. 아무리 덜고 덜어도 여전히 무겁기만 한 죽음이라는 짐에 굳게 움직이지 못하던 마음이 천천히 움직이게 된 건 순전히 지민 씨였다. 편지를 쓰는 때만큼은 평소처럼 웃을 수 있던 것부터 이장을 결심하게 된 일까지 전부.
“지민 씨랑 주고받은 편지가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나 하나 추스르느라 아빠의 바람까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을 거예요.”
“아….”
“고마워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예요.”
“네?”
바다를 사랑한 아빠. 마지막까지 바다에 있었던 아빠. 기어코 바다가 아닌 곳에서 아빠를 안치했던 지난날. 바다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던 지민 씨의 눈길이 내게 와닿는다.
“수지 씨 아버지의 바람은, 그게 다가 아닐 거라구요. 제가 넘겨짚은 건지도 모르지만 본인이 어디 있든 간에 분명 수지 씨가 행복해지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
“제가 보기에 지금 수지 씨는 한편으론 후련해 보여요. 그러니까 수지 씨의 행복이 아버지의 바람이었을 거라고 봐요 난.”
“하하…. 그럴, 까요?”
끄덕끄덕. 지민 씨는 굳게 앙다문 입술과 확신이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할 수가 있었을까. 혹시 편지와 다르면 어쩌나.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면 어떡하지. 여태 얘기한 모든 일이 허무하게 사라지면? 그런 일종의 두려움과 불안들이 알게 모르게 속에서 커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기왕이면 이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도 어딘가 존재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그와 마주한 순간 모조리 쓸데없는 잡념이 되어버렸다. 자꾸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의 우는 얼굴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할까요 우리?”
“아, 그러고 보니 인사도 안 했구나.”
“한수지예요. 새삼스럽지만 이렇게 얼굴 보는 건 처음이잖아요.”
“저도 새삼스럽지만, 윤지민이에요. 음 그리고 또… 웰컴! 잘 왔어요―”
“큽, 무슨 편지 음성지원 되는 거 같아요.”
“갭 차이 없는 진실된 남자입니다.”
결국엔 빵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서로 주고받는 인사가 편지와 다를 것이 없어서 그런데 마음엔 성큼 더 크게 와닿아서 그게 또 신기해서 도저히 웃지 않고는 버틸 수 없더라.
***
지민 ver.
고마워요. 수지 씨의 그 한마디에 가슴이 바쁘게 뛰었다. 어쩐지 바로 대답할 수가 없어서 몇 초간의 짧은 침묵 속에 침만 삼켜야 했다. 수지 씨가 돌아보던 그 순간 사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밝은 갈색 눈동자가 머릿속에 온통 들어차고 말았다. 최근에 갈색으로 염색했다던 머리칼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내가 수지 씨와 주고받는 편지로 온기를 나눠가진 것처럼 수지 씨에게도 이 편지들이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다행히 나와 주고받은 편지가 큰 도움이 큰 힘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거 참, 다행이다. 노을로 붉게 물들었던 바다와 모래사장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낀 나는 힐끗 수지 씨를 곁눈질한 후 물었다. 바다를 보던 시선이 내게로 돌아선다.
“바로 올라가는 거예요?”
“아니요? 당분간은 편지 못 할 거라고 했던 내 말 기억나요? 한 일주일쯤 이 동네에 있을 생각이에요.”
“아하…. 어디서 지내게요? 이 동네 주변엔 마땅한 숙소도 별로 없을 텐데.”
“…….”
“수지 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히 대답하던 수지 씨가 연이은 내 질문에 어쩐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게 이상해서 슬며시 그녀를 살피니 표정이 딱 그짝이었다. 아차 싶은 표정. 뭐지?
“미쳤다. 그 생각을 못 했어!”
“네?”
“지낼 곳 알아보고 온다는 걸 깜빡, 했어요….”
“네?! 그걸 까먹으면, 그럼 어떡하게요!”
“일단 근처에 민박집 같은 곳 없을까요…?”
아니 나 참. 편지로 대화할 땐 무척이나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이란 느낌을 받았는데 의외로 허당기가 있다. 수지 씨가 허탈한 얼굴을 한 채 점점이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했다시피 이 근처는 마을과 좀 동떨어진 곳이라 우리 집 말고는 민가도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 그런데 숙소니 민박이니 있을 리가. 끽해 봐야 뱃사람들 하루 이틀 묵을 용인 아주 협소한 간이 민박밖에는…. 나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내 표정이 가관이었는지 수지 씨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숙소 찾으려면 읍내까진 나가야 돼요.”
“아아…, 역시 안되려나.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있고 싶었는데….”
그 난처한 목소리를 듣는데 왠지 나도 아쉬운 동시에 어디서 일지 모를 열의가 샘솟았다. 으음. 그러던 그때 번뜩하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나도 모르게 화색을 띤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집은 어때요?”
“네? 지민 씨 집…?”
수지 씨가 눈에 띄게 화들짝 놀라길래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한지 몇 초 뒤에나 깨닫고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알잖아요 저 할머니랑 사는 거!
“할머니 치료가 이제 다 끝나서 낼모레쯤 내려오신다고 하셨거든요. 수지 씨 지금 지낼 곳도 없고 하니까 괜찮으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신세를 져요.”
“저―어기 기와집 보이죠? 저기가 할머니랑 제가 사는 집이에요.”
“…와, 바닷가랑 되게 가깝네요?”
“바다랑 아버지 뵈러 왔다 갔다 하기도 편할 거예요. 난 괜찮아요. 집도 넓고 할머니도 수지 씨 아버지 얘기 전해드리면 분명 괜찮다고 하실 거고.”
바로 근처에 있는 우리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리 말하자 수지 씨는 밝은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또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열심히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를 으쓱여댔다.
“그래도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
“아녜요, 괜찮아요.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럼 죄송하지만 일주일만, 아니 사흘 만이라도 신세 좀 져도 될까요?”
“히―, 일주일 있어도 돼요.”
내가 밝은 표정으로 그리 대답하자 그제야 한시름 짐을 덜은 얼굴을 하는 그녀였다. 편지를 주고받는 중에도 느낀 거지만 수지 씨는 생각이 지나친 경우가 종종 있는 거 같다.
하고 싶은 말은 곧잘 하지만 제가 한 말이 폐가 되진 않았을까 속으로 염려하는 편이다. 지금도 그렇고. 아니면 아직 내가 어색해서 그런가. 어쩐지 분위기는 편지를 쓰던 때와 같이 편한 느낌이 드는데 우리는 좀 다른 거 같다. 편지로만 얘기를 나눴기 때문일까 처음 만난 사람에게만 생기는 조심스러움과 배려가 한가득 묻어났다. 나는 괜히 더 그녀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웃었다.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원체 살가운 성격이기도 하고.
이제 해도 다 졌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들어가자며 길을 안내했다. 바닷가를 나와 좁은 골목을 지나야 했다. 가끔 그냥 담장 넘어서 들어가 버릴까 싶을 때도 있어요 귀찮아서. 내 농담 섞인 어조에 수지 씨가 웃음을 터뜨린다. 대문 앞엔 금방 도착했다.
“어, 저번에 보내준 그림 속 우체통!”
“실제로 봐도 되게 낡았죠? 그래도 요즘 제가 제일 아끼는 거예요. 맨날 수지 씨가 보낸 편지 들어있나 열어보거든요.”
얼마 전에 집 대문 풍경을 색연필로 그려 동봉한 적이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건 참 가지각색이었는데 그중에 집이 모델이 되던 적이 많아서 그런지 수지 씨는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끼익. 곧 내가 대문을 여는 틈에 들릴 듯 말 듯 작은 톤으로 말하는 목소리가 섞였다.
“…나도, 그래요.”
그 말을 듣고 보이지 않게 웃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저 멀리 마루에 앉아있던 솜이가 와다다 우리 앞까지 뛰어왔고 나를 따라 마당 안으로 들어오던 수지 씨가 탄성을 질렀다.
“와아! 얘가 솜이예요? 그림에서보다 많이 컸네요!”
“한 달은 더 지났으니까 뭐…. 요즘 간식 맛을 알아가지곤 어찌나 먹어대는지 내 용돈이 다 얘 밥값에 나간다니까요?”
“안녕 솜아. 이리 와―.”
아마도 내가 하는 말은 반쯤 흘린 거 같다. 수지 씨는 이미 솜이에게 정신이 팔린 후다. 나를 보며 달려왔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수지 씨를 보고 멈칫 마당 중간쯤에 멈춰 선 솜이.
별안간 수지 씨가 쪼그려앉아 손을 벌리자 경계를 풀었는지 종종 걸어와 하얀 꼬리를 마구 흔든다. 곧이어 솜이를 품에 안아 올린다. 으차. 와, 너무 귀엽다.
“강아지 좋아하는데 난 혼자 살아서 강아지 키울 여력이 안 되거든요. 얘가 지민 씨 집에 제 발로 막 걸어들어온 거네요?”
“그렇죠. 어째 나보다 수지 씨를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요?”
낑낑. 아주 핥고 꼬리 흔들고 난리가 났다. 저번엔 정호원 보고는 짖고 경계하더니(소시지 어택에 금세 넘어갔지만).
“그림에서만 보던 풍경이라 이렇게 보니까 또 되게 색다르게 느껴지고 그러네요.”
“여기 담장 밖으로 바다도 잘 보여요.”
마당에 서서 집 곳곳을 소개하다가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갔다. 어디 보자, 낼모레면 할머니도 오니까 방은 내 방을 내주면 되려나.
“안쪽에 안방이랑 작은방 하나씩 있는데 여기 작은방 쓰면 돼요. 난 나중에 할머니랑 같이 자면 되니까.”
“마루에서 자도 괜찮은데….”
“괜한 소리 마요. 이제 밤 되면 추운데 무슨 소릴. 여긴 바닷가 주위라서 더 그렇고.”
“고마워요. 그럼 내일모레 할머니 오시는 거예요?”
“네, 그렇다고 아까 전화 왔더라구요.”
“이참에 감사하단 인사도 드려야겠다.”
“안쪽에 짐 풀고 쉬어요. 아, 저녁은 먹었어요?”
“여기 오기 전에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먹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수지 씨가 배낭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방 꼴이 어땠더라.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가구도 별로 없고 하니까 그렇게 더럽진 않을 거다. 아마도. 할머니랑 살면서 들인 청소 습관이 있기도 했고. 일단 불편한 교복부터 갈아입기로 하고 안방으로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회색 후드티와 검은색 트레이닝복 바지. 저녁은 먹었다니까 이 정도면 밤에 배고프진 않겠지? 주방에서 쟁반에 과일 몇 개와 과도를 챙겨 나왔다. 마루로 가니 그새 짐 정리를 마쳤는지 수지 씨가 마루에 앉아 솜이와 놀고 있었다.
“과일 먹을래요?”
“아, 좋아요. 사과네요?”
“이제 사과가 제철이라고 아까 읍내에서 강매 당했지 뭐예요.”
오늘 학교 마치고 오는 길에 읍내 버스 정류장 앞에서 사과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의 말솜씨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그래도 제철이라더니 빨갛게 익은 사과가 꽤나 먹음직스럽다.
수지 씨를 따라 마루에 앉아 사각사각. 사과 한 알을 깎기 시작했다.
“와, 과일 진짜 예쁘게 깎네요? 나는 한번 깎으면 껍데기에 떨어져 나가는 게 반인데.”
“이거 밖에 못 해요. 워낙 어릴 때부터 할머니랑 살아서 집안일은 절대 손도 못 대게 하셨거든요. 4B연필을 자주 깎아서 그런가 이런 건 자신 있어요.”
“오, 새로운 점―.”
어느새 까맣게 어둠이 내린 마당 위로 밤하늘에 별이 하나둘 뜨기 시작했다. 맑은 밤하늘에 매끈하게 휘어진 반달도 걸렸다. 벽면에 달린 전구에서 불빛이 들어와 마루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차곡차곡 사과를 깎아 접시에 올려두면 수지 씨는 포크로 콕 찍어 사과를 먹었다. 깎는데 열중인 내게도 나머지 포크로 사과 한 조각을 콕 찍어 내민다. 그걸 받아들며 아까 마저 말하려던 얘기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낼모레 할머니랑 같이 부모님도 오시기로 했어요.”
“진짜요? 바빠서 자주 못 본다고 했던 거 같은데 진짜 오신대요?”
“네, 거의 1년 만에 보는 거예요.”
다른 설명은 필요 없다. 이미 편지로 속속들이 꿰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조금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들뜬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수지 씨도 연신 잘 됐다며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좋겠네요! 잘 됐다.”
숙였던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이젠 솜방망이 같은 솜이의 앞다리를 잡고 살살 흔들며 밝게 웃음 짓는 수지 씨의 모습이 보였다.
솜아 잘 됐다 그치? 너도 지민 씨 부모님은 처음 뵈겠구나?
더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는 나를 가장 잘 알게 된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나 그렇게 다 얘기해본 사람, 수지 씨가 처음이에요.”
처음이다. 친구들한테까지 그렇게 일일이 다 얘기해본 적은 없었다. 대화의 화제가 그쪽으로라도 갈라치면 얼버무리고 회피하고 넘어가던 게 일쑤였다. 신기하게도 그녀에게는 다 얘기할 수 있었다. 시키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풀게 되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란 사실이 안심이 됐던 걸까. 그럼 이렇게 만나게 돼버린 지금은, 변하면 어떡하지. 우리가 주고받던 편지가, 그 의미가 변질돼버리면 어떡하지. 기쁨도 잠시 미세한 불안이 스며들고 있었다. 결국엔 만나고 말았지만 이 사이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나도 처음이에요.”
아삭아삭. 사과가 참,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