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그대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사실 감이 잘 잡히질 않습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은 많았던 거 같은데 하얀 편지지를 마주하니 덩달아 머릿속도 새하얗게 변한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편지로도 채워지지 않는 이 마음을.
언젠가 당신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저마다의 걱정거리를 떠안고 살아간다고. 그 크기와 무게가 어떻든 간에 누구든 책임지고 살아갈 삶의 무게는 같은 것이라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 속에서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가끔 당신이 말했던 그 문장을 곱씹곤 합니다. 동시에 당신의 각진 글씨체가 선명히 떠오르는 날엔 생각하는 걸로도 모자라 다시금 편지를 꺼내 들여다봅니다. 당신도 이랬을까요? 제가 보낸 편지를 수없이 읽고 또 읽어 보았을까요? 매번 같은 얘기와 몇 자 되지 않는 글들을 보면서 저를 떠올렸을까요?
오늘은 왠지 감정이 쉬이 가라앉질 않습니다. 한편으론 불안하고 또 한편으론 기쁘지만 마음 한구석은 왠지 모를 슬픔이 자리를 틀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만 보내는 편지가 맞는데 현실적으론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겠죠. 괜찮냐고 묻는 당신이 아닐 걸 압니다. 아마도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겠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말했던 대로 삶의 무게를 견디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최근에 이 편지를 받아주는 마음씨 상냥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혹 그저 빈 집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알 것 같아요. 누군가 당신을 대신해 이 편지를 받아줬다는 것을. 그러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제가 배우고 싶은 공부를 하고 주말엔 친구를 만나고 이젠 따로 살지만 엄마와도 별 탈 없이 지냅니다.
제가 괜찮다는 걸 누누이 얘기하는 까닭은 아무래도 이 편지가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거 같아서입니다. 역시 이 편지를 받아주는 분에게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비록 이게 마지막이어도 가끔 생각날 때면 제 편지를 꺼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마음 변치 않은 채 편지에 그대로 녹아있을 테니까요.
…아빠. 별 건 아니고 그냥 한번 불러보고 싶었어요.
PS. 사랑하는 당신과 감사하는 그분에게.
2017년 6월 3일.
사랑을 담아.
From. 수지
***
지민 ver.
여름이라지만 밤이 내린 바다는 꽤나 쌀쌀하다. 반팔만 입은 채로 바닷가 근처에 앉아있자니 금세 팔뚝이 차가워졌다. 바다에선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손에 쥐고 있던 편지까지 연신 팔락거렸다. 밤바다는 이 소라색 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푸른 물결을 닮은 것이지 바다 자체를 닮은 건 아닌가 보다.
'너가 그 이름을 어찌 아는 겨?'
수화기 너머로 흘러드는 할머니의 음성이 의문에 가득 차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할머니의 그 말에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툭 터놓는 걸 선택했다.
'아니 얼마 전부터 웬 편지가 오길래. 주소는 여기가 맞는데 받는 사람 이름에 한 종철이라고 써있길래 혹시나 해서.'
'하이고 마 진짜 가? 할미가 말하고 간다는 걸 깜빡했다. 설마 지금도 올 줄은 몰랐다이가….'
'왜? 누군데 그래.'
설마 했지만 놀란 목소리를 듣고 나자 정말 할머니가 아는 사람이란 사실에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지인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었나. 할머니는 뜸 들이다 재차 물었다. 보내는 이 이름이 한 수지냐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할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됐다. 니 데리고 시골로 내려갔을 때 이 할미가 구멍가게 차렸던 건 기억 나나?'
'기억하지. 지금은 망했지만.'
아마 초등학생 저학년 때였던 거 같다. 할머니를 따라 이 시골집에 오게 된 게. 도시에서 살던 애가 시골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할머니는 금세 제 집처럼 곧잘 지내는 내가 신기했다고 하던 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할머니는 거의 구멍가게 수준의 작은 슈퍼를 운영하고 있었다. 몰래 알사탕 따위나 꽁쳐먹던 게 어렴풋 기억난다.
'니는 모르겠다만 가끔 담배 한 갑씩 사가는 양반이 있었다. 뱃사람이었는디 가족들 대도시로 보내버리고 저 혼자 바다에서 고기잡이 한다고 카더라.'
'그 사람이 한종철이야?'
'그체. 언날은 저가 하나뿐인 딸내미랑 편지를 주고받는데 바다에 나가있는 날이 많아서 제때 받아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겨.'
사정이 딱해서 그때 내가 대신 받아주기로 했었제. 그 양반이 가게로 오면 딸한테 온 편지를 전해줬구마.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그러면 할머니가 없는 지금은 누가 그 사람에게 편지를 전해준단 말인가?
'그럼 가게 망했으니까 편지 받으러 여기로 오겠네? 이상하다…, 찾아오는 사람 없었는데.'
'못 온다 인제.'
'어? 왜?'
'죽어버렸으니께.'
넉 달 전에 사고를 당해갔고 그리돼버렸다. 뱃사람이 바다에서 죽는 일이야 흔하제. 딸아한테서 여즉껏 편지가 오더나? 하이고 어짜노.
할머니의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음성이 수화기를 넘어왔고 그 상태로 반쯤 굳은 채 수화기를 고쳐잡았다. 고작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불현듯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가늠할 수 없는 후회와 슬픔 짙은 그리움이 뒤섞여 눈물 자욱 마냥 번진 문장들이.
'근디…, 니 지금 학조에 있을 시간 아이가?'
'어어, 할머니. 뭐라고? 잘 안 들리네.
건강 잘 챙기고 다음에 또 전화할게―.'
의심스레 묻는 할머니의 물음을 모른 체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었다. 그리곤 마당으로 나가 마루 밑에 숨겨둔 상자를 다시금 꺼내들었다. 별안간 소라색 편지 두 장을 펼쳤고 첫 번째 편지를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다.
「당신이 지내던 거처를 드디어 바다 근처로 옮길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가까운 곳에 안치하는 걸로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문장들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아무래도 납골당을 옮긴다는 얘기 같았다. 곧바로 다음 편지를 다시 읽었다.
「비록 답장이 오지 않을 걸 알지만 자꾸 질문만 하게 되네요. 그건 여전히 당신을 모두 알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진작 알 수 있을 때 잔뜩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그래, 여기서 후회가 가장 짙게 느껴졌다. 이 편지들엔 전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이 뭉근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미 어릴 때부터 아주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거 같았다.
“나도 그런데…. 좀, 닮은 거 같네.”
그런데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도, 편지를 보내더라도 더는 답장을 받지 못할 것도 알고 있으면서 편지를 쓰는 이유가 뭘까.
자주는 아니지만 잊고 지낼라치면 찾아오는 편지가 사실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주인도 아닌 내가 그 편지를 읽자니 양심에 찔렸고 정작 받아야 할 사람은 그 내용조차 모른다는 게 안타까웠다. 이렇게 깊고 절절한 사랑이 느껴지는데 그걸 모를 이 사람은 얼마나 슬플까 싶었다. 가족이란 이런 걸까 하고. 또 한편으론 나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심통이 나서 편지를 버려버릴까도 생각했었다. 물론 실천에 미치진 못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니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나와 닮아있었다. 음, 별로 좋은 점을 닮은 거 같진 않다.
손에 들린 편지를 내려다보다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시골의 밤은 칠흑같이 어둡다. 도시와 달리 최소한의 불빛만이 밝혀져있는 시골의 바다는 검고 깊다.
“이걸로 세 번째 편진가.”
아니 이제 마지막 편지겠구나.
할머니에게서 한 종철이란 사람에 대해 알게 된 후로 또 편지가 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어째 불안히 있던 모습이 무색하게 편지는 며칠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그리고 2주가 지난 6월이 되어서야. 또 잊혀질 때쯤에서야 불현듯 편지가 도착했다. 그게 이틀 전. 학교를 마치고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을 즘에 집으로 돌아왔던 때였다. 한꺼번에 우편물을 빼냈기에 말끔해진 우편함에 비죽 고갤 내밀고 있던 소라색 편지가. 낚아채듯 편지를 빼내놓고선 지금에서야 읽어봤다.
“…괜찮기는.”
저는 괜찮습니다. 라니. 잘도 그런 말을 한다. 순 거짓말투성이다. 괜찮지 않다는 것쯤은 이 편지를 보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 것도 같다. 괜찮지 않더라도 그건 그저 무거운 짐이 될 뿐임을.
'할매, 그 아저씨가 보낸 편지는 무슨 색깔이었어?'
모래 위 옆자리에 두었던 밋밋한 흰 편지지를 손에 들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편지지다. 집에 아무리 뒤져보아도 편지 형식의 종이 쪼가리도 없어 하교하는 길에 사온 편지지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무릎 위에 종이를 올렸다. 그림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어설프게 쥔 펜이 어색했다. 한자 한자 조심스레 종이에 글을 썼다.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지만 분명 그 아저씨도 하고 싶은 말일 거다.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이게 심심찮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그 순간 잘게 불던 바람이 불어닥쳤다.
“왁―!”
다 쓴 편지를 동봉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하마터면 내가 쓴 편지는 물론 받은 편지까지 다 날아갈뻔했다. 나는 좀 더 힘주어 편지를 손에 쥐었다. 아까 그린 그림도 고민 끝에 같이 보내기로 했다. 엽서만 한 크기의 빳빳한 종이에 색연필로 그린 한낮의 바다가 담겨있다. 아마 생판 남에겐 처음으로 보여주는 그림일 거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내는 거지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양손에 쥔 편지가 바닷바람에 정처 없이 팔락인다. 바람이 심하네 새벽에 비가 오려나.
To. 딸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렴.
항상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언제든지 편지해. 기다리고 있으마.
2017년 6월 19일.
From. 사랑하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