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그대에게
제가 조금 늦었죠?
근 석 달 동안 책상에 앉아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여유가 있어야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지만 분명 당신은 제가 본래 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당신을 만나는 걸 바라지 않을 거란 걸 압니다. 지난여름은 무척 더워서 문득 당신의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생각났어요. 그마저도 너무 옛날 기억이라 점점 희미해지는 거 같아 슬펐습니다.
어느새 봄이 지나 여름이 왔습니다. 따스하던 봄에 생긴 일들을 말하지 못했다고 당신이 서운해할까 내심 걱정입니다. 또 서운해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되도록이면 편지를 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얘기하는 순간은 저도 놀랄 정도로 제 마음 한편이 차분해지는 걸 느낍니다. 다만 마침표를 찍었을 때에야 밀려오는 공허함을 참을 수 없어 결국엔 부치지 못한 편지만 수두룩합니다. 아, 너무 울적한 얘기만 했지요?
실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지내던 거처를 드디어 바다 근처로 옮길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간 빈자리가 나지 않아 포기했던 곳인데 이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찾으러 가기엔 멀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곳이니 제가 다 기쁩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진 저에게 당신의 바람대로 그곳으로 온전히 보내드릴 자신이 없습니다. 찾아볼 수도 없어진다는 건 제겐 너무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 안치하는 걸로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은기가 불러서 그만 여기서 말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거든요. 왠지 빈속에 술로만 채울 거 같지만 어쩔 수 없네요. 여름의 시작이라는 입하가 왔다지만 밤엔 아직 쌀쌀하니 아프지 않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언제가 될진 몰라도 또 편지하겠습니다.
ps. 오늘 저녁은 당신이 좋아하던 김치찌개예요. 엄마가 한 것과 가장 맛이 비슷하다며 제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던 수지 표 김치찌개요!
물론 그때보다 훨씬 맛있게 만들어요. 엄마를 뛰어넘기엔 아직 이르지만….
2017년 5월 10일.
사랑을 담아.
From. 수지
***
지민 ver.
갈색 마루 위에 놓인 소라색 편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감히 손대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 빛깔이 어여뻐서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마루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이맛살을 구긴 채 편지를 노려보다 말고 손을 들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뻣뻣한 질감이 느껴진다. 그저 잘못 온 편지라고 밖엔 생각할 수가 없다. 주인을 찾아주려면 우편물을 반송해야 되나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귀찮아서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한 시간 전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왔는데 칠이 벗겨진 파란 대문을 열다 말고 고지서나 안내문 따위로 그득히 쌓인 우편함 속에 유난히 눈에 띄는 소라색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무심코 지나치려다 호기심에 우편함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우수수 떨어지는 종이 더미들을 대충 손으로 수습하다 말고 소라색 편지를 먼저 집어 들었다. 나머지는 뭐 나중에 할머니가 알아서 어떻게 하라고 연락이 올 것이다.
'한종철? 처음 보는 이름인데.'
맨 위에 적힌 낯선 이름 석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지를 뒤집어보자 맨 아래쪽에 적힌 다른 이름 또한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한수지는 또 누구지.'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할머니 지인 중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머릿속은 뿌옇기만 했다. 한 종철이란 이름은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 몰라. 잘못 왔나 보지.'
그렇게 편지는 마루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이내 지저분한 흙바닥 위에 아무런 깔개도 없이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맨다리 위로 흙먼지가 끼여 손으로 대충 털어냈다. 후 하고 내뱉은 한숨이 허공을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 내지 불순물들을 저들끼리 뒤엉키게 만들었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나뭇가지를 집어 바닥에 둥근 구를 그리는데 그리면 그릴수록 집요하게 그리게 된다. 한창 흙바닥과 씨름하다가 이럴 바엔 그냥 종이에다 그리는 게 낫겠다 싶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려 할 때였나 저 멀리 닫히다 만 파란 대문 사이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 의문스레 눈길을 들었다. 녹슨 철문 아래 누런 솜 뭉텅이 같은 게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연신 흙바닥에 킁킁 코를 뭉개며 냄새를 맡는 작은 강아지가. 미처 닫히지 않은 문틈 새를 억지로 밀고 들어온 강아지는 흙이 묻은 코를 하고서 눈을 빛내며 내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까맣고 둥근 코와 반질하고 둥근 눈이 무색하게 누런 털과 목줄 없는 휑한 목이 참 처량해 보였다. 주인을 잃었나.
“야, 저리 가. 워이―.”
나는 가라는 의미에서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강아지 근처로 집어던졌고 그러자 강아지는 제 다리 사이로 둥글게 꼬리를 말다 가도 내가 좀 전에 그려뒀던 삐뚠 원을 넘어왔다. 어이가 없어서 허어? 하고 내뱉은 숨이 다시 한 번 햇빛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를 뒤엉키게 했다. 주춤거리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강아지를 안아들었더니 강아지는 낑낑대며 내 턱 언저리를 연신 핥아댔다. 내가 그어둔 선 안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온 강아지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쩐지 주인을 잃은 얘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이 든다. 다만 밀어내도 밀려나지 않고 해코지를 해도 금방 돌아서지 않는다.
아니 넌 나랑은 다르구나.
강아지를 안아들고 등지고 있던 마루 가까이 다가갔다. 턱을 밟고 올라서자 한층 높아진 시야에 텅 빈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살짝 고개를 돌린 담벼락 너머로 초여름의 따사로운 햇빛을 받아 푸른 바다가 반짝였다.
“어떻게 나만 두고 홀랑 올라가냐. 무책임한 할매….”
품 안에 꾸물대는 온기가 느껴진다. 혼자가 돼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턱을 내려오자 마루 위 편지가 또 눈에 띄었다. 바다색과 흡사한 소라색 편지가 시야 가득 들어찼다. 강아지의 배를 긁어주다가 재차 편지를 끌어왔다. 망설이다 말고 입구를 뜯자 편지봉투의 색과 달리 밋밋한 하얀 배경의 편지지가 나왔다. 그닥 많지도 적지도 않은 두 장 분량이었다. 한자 한자 꾹꾹 눌러쓴 자국이 엿보이는 검고 간결한 글씨체가 하얀 편지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긴 글만 보면 잠이 오던 터라 그냥 읽지 말까 망설일 즘에는 이미 첫 문장을 눈으로 읽고 있었다.
“…이게 뭔 소리래.”
두서가 없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적혀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평범한 안부 편지 정도로 보이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특별한 구석이라곤 말간 편지 봉투의 색감뿐인데 왜 이런 묘한 기분이 드는 걸까.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어쩐지 이 사람이 잘 만들 수 있게 됐다던 김치찌개의 맛이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그걸 먹지 못하는 거 같은 당신이란 사람이 불현듯 안타까워져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 거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 야! 위험하잖아!”
얌전히 품에 안겨있던 강아지가 낑낑대더니 풀쩍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강아지가 안겼던 품을 내려다보자 흰 반팔이 흙으로 엉망진창이다. 한숨을 폭 내쉬다 눈가를 찌르는 햇빛에 슬쩍 고갤 들었다. 우수수 돋아난 나뭇잎 사이로 초여름의 햇살이 어룽지고 있었다. 공기는 선선한데 햇빛은 날이 갈수록 따가워진다. 이제 정말 여름이 오려나보다.
낑낑대더니 풀쩍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강아지가 안겼던 품을 내려다보자 흰 반팔이 흙으로 엉망진창이다. 한숨을 폭 내쉬다 눈가를 찌르는 햇빛에 슬쩍 고갤 들었다. 우수수 돋아난 나뭇잎 사이로 초여름의 햇살이 어룽지고 있었다. 공기는 선선한데 햇빛은 날이 갈수록 따가워진다. 이제 정말 여름이 오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