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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너에게 나를 보낸다[To You From Me]
작가 : 해모
작품등록일 : 2018.12.12
너에게 나를 보낸다[To You From Me]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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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가 느꼈을 불안.
내가 느꼈을 두려움.
동시에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은 알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해 외로웠던 사랑.

부칠 수 없는 편지인걸 알면서도 뒤늦게 펜을 든 소녀와 초여름의 어느 날, 필시 주소가 잘못된 듯한 편지를 받은 소년. 서로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주고 받을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담긴 편지 속 이야기.

 
《그 후 이야기. To You From Me》
작성일 : 18-12-31 23:24     조회 : 279     추천 : 0     분량 : 8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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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가 출렁인다. 모래사장을 덮으며 하얗게 부서졌다 되돌아가는 파도가 찰박찰박 마음을 건드렸다. 모래사장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을 보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돌아갈 준비가 되었나. 아직 준비가 덜 된 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발자국의 수를 더하며 바다 앞을 서성이는 건 아닌가. 바다는 점점 붉게 물들었다. 수평선 너머 주홍빛을 내뿜는 해를 보니 그만 떠날 시간이란 걸 알았다. 그래, 준비가 됐네. 나는 다시 앞을 보며 나아갈 수 있겠구나. 다시 만나자던 그 사람을 위해 그만 훌훌 털고 일어나야겠다. 이 얼마나 꿈같은 시간이었는지. 이 꿈에는 왠지 모르게 단내가 난다. 서늘하면서 짭짤한 소금기가 묻은 바다 바람과 마음속에 요동치는 파도 소리가 분명한데도 희한하게 단내가 난다. 그 단맛을 잊지 못해 이따금 꿈결을 헤매게 만드는 그날들은 믿기 힘들 만큼, 꿈같은 시간이었다.

 

 “엄마! 빨리 와. 이러다 해지면 아빠 보이지도 않겠어.”

 “얘는 무슨 그런 농담을, 듣는 아빠 서운하겠다―.”

 “서운하기는. 오늘 사랑하는 것들 이렇게 다 모였는데 아빠 분명 행복할걸.”

 

 바다 주위가 노랗고 붉은빛으로 얼룩덜룩하다. 시린 겨울 바다의 매서운 바람 탓인지 엄마의 뺨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유골함을 바닥에 내려두고 엄마의 옷을 여며주었다. 오래 있지는 않을 거지만 바다는 무척 추울 거니까 꼭 단단하게 챙겨 입으라던 내 말에 엄마는 여러 겹의 옷을 꼼꼼히 챙겨 입고 나왔다. 목도리는 왜 안 했어? 춥다니까. 그러는 너는 옷이 그게 뭐니, 코트만 입고 감기 걸릴라.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자 푸스스 웃어버리니 허공에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허리를 숙여 유골함을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걸 엄마에게 넘겨주었다.

 

 “엄마가 보내드려. 나는 할 말이 많아서.”

 “정말 이걸로 괜찮아?”

 “괜찮지.”

 

 오래전 그리 쉬이 아빠를 보낼 수 없다고 엄마에게 애원하다시피 말했던 내가 생각났다. 엄마는 바다를 좋아했던 아빠니까 당신 바람대로 보내주자 했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살아생전에도 아빠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아예 아빠를 볼 곳이 없어진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까운 곳에 아빠를 안치했었다. 하지만 점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가 보낸 편지에 힘입어 아빠가 살았던 이 마을의 납골당으로 옮기게 됐고 그 후로 두 달이 지난 지금 다시 이 마을로 왔다. 아빠에게 완전히 인사를 하려. 풍장 준비를 마치고 바다 앞에 이르렀다. 엄마는 어느새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에 못 본 척 바다를 응시했다.

 

 “수지야, 사실은 엄마도 네 아빠 편지 받고 싶었다?”

 “어? 엄마랑은 편지 안 했었어?”

 “너처럼 자주 하진 않았었지. 딸이랑 편지하는 걸로도 시간이 부족하다나 뭐라나. 그래서 조금 부럽고 그랬지.”

 “매정했네 아빠―.”

 “그래도 어쩌겠어.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주는 딸바보인데 엄마인 내가 이해해야지.”

 

 그거 아니? 너 6살 때 목마 타는 걸 얼마나 좋아했으면 아빠가 너 목마 태워서 매일 동네 한 바퀴씩 도는 게 하루 일과였어. 동네 사람들이 모를 수가 없었지.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신기하면서도 한편 아, 기억나지 않는 기억까지 기억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외에도 엄마는 내가 태어났을 적 아빠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분만실 구석에 가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더란 이야기와 내가 5살 무렵부터 지방에 내려가서 일하다 서울에 올라올 적이면 내게 줄 장난감을 꼬박꼬박 챙겨와 거실이 커다란 장난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져 버렸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아빠와의 추억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렇게나 많았다. 그 사실이 너무 놀랍고 신기해서 조금씩 눈물이 났다. 내 어린 시절을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대신 기억하는 엄마와 기억했을 아빠가 있다. 그거면, 됐다.

 

 더 이상 해가 지기 전에 엄마는 유골함을 열었고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에 아빠를 맡기기 시작했다. 바람에 떠올라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아빠.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 사이로 아빠의 웃는 얼굴이 보인 것만 같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엄마 덕분에 항상 끼니도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고 있어요. 편지는, 더 안 써도 되죠? 아빠 대신에 써주는 사람이 생겼어. 아빠는 이제 그만 쉬어도 돼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렴. 항상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언제든지 편지해. 기다리고 있으마.'

 나는 언젠가 그 사람이 아빠 대신으로 써준 편지를 떠올리며 그에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다. 분명 아빠도 내게 그렇게 편지를 썼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차가운 손으로 눈을 문질러 닦고 조심스레 미소 지었다. 갑자기 파도가 한번 크게 철썩인다. 바위에 부딪힌 파도가 부서지며 튄 물방울이 얼룩덜룩한 주홍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해가 완전히 수평선 뒤로 넘어갔을 즘 엄마와 함께 바닷가를 떠났다.

 

 “근데, 편지한다던 그 사람이 누군데? 엄마도 좀 알자.”

 “얘기하자면 좀 긴데…. 가는 길에 얘기해줄게. 엄청, 엄청 좋은 사람이야. 또….”

 

 내가 엄청 좋아하는 사람.

 시선이 자연스레 한곳으로 향한다. 바다와 가깝게 붙은 낮은 담벼락에 옛날 기와집. 여기서 보이진 않지만 오래된 파란 대문과 대문 옆 기둥에 달린 녹슨 우체통. 한 쪽 구석에 빨랫줄이 걸린 넓지 않은 마당과 파도와 빗소리가 잘 들리는 대청마루. 따뜻한 시골 밥상과 한 솥 가득 옥수수를 쪄서 먹여주던 할머니. 그리고 그곳에 있을, 그 사람.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꿈같던 일주일을 살았던 그곳을 애정이 담긴 눈으로 응시하다 어느덧 저만치 걸어가 안 오고 뭐 하냐는 엄마의 외침에 마저 발길을 뗐다.

 

 

 ***

 

 

 돌아올 때도 긴 시간을 버스로 달려 집에 도착했다. 엄마와는 터미널에서 헤어졌고 혼자 사는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적엔 이미 날이 까맣게 저문 뒤였다. 겨울은 겨울인 건지 아무도 없는 집이었지만 밖에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훈기가 돌았다. 그 따뜻함에 추위에 지친 한숨을 내쉬고 코트를 벗는데 책상 위에 놓아둔 택배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맞다, 아침에 받았었지….”

 

 시골까지 내려가는 이동 시간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던 터라 택배를 미처 풀지 못했다. 따로 뭔가를 주문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도착한 택배라 의문이 들었지만 누가 보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달까. 뒤늦게 택배 상자를 살펴보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어…?”

 

 보낸 이 윤지민. 그 이름을 조심스레 더듬듯 읽어보았다. 두 달 만에 눈에 띈 그 이름이 이처럼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따뜻한 울림이 느껴진다. 택배는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다. 나는 책상 연필꽂이에 꽂혀있던 커터 칼을 꺼내 택배를 봉한 테이프를 뜯었고 이내 그 안에 더 작게 포장된 흰 박스를 꺼냈다. 이게 뭘까 싶어 앞뒤로 돌려보다 꺼내는 순간 딸랑, 청아한 종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그건 풍경종이었다. 천천히 형광등 아래 비춰보니 하얀 도자기로 된 종 겉면에 한 떨기 파란 꽃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소라색 종이로 장식된 풍경이었다.

 

 “…예쁘네.”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방이라 일부러 풍경을 살짝 흔들었고 다시금 딸랑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에 저절로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만 풍경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데 택배 박스 안 흰 편지가 바닥에 깔린 걸 발견했다. 그 편지를 보자 오랜만이라 반가워서인지 뭔지 가슴이 떨렸다. 두 달 만에, 그곳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온 편지였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조차도 우리는 편지를 또 쓰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그저 곧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했을 뿐. 그래서 편지가 오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았고 내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도 지민 씨는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다시,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쳐들었다.

 

 

 To. 수지 씨

 

 짜잔, 깜짝 새해 선물이에요! 최근에 새로 생긴 도자기 공방에서 산 풍경인데 겨울이라 맨 구석에 진열돼 있더라구요. 여름쯤에 판매할 예정이라고 한 거 겨우 졸라서 산 거니까 수지 씨의 마음에 꼭 들었으면 좋겠어요.

 겨울에 웬 풍경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름 의미가 있어요. 궁금하죠? 비밀이에요 크크. 정답인지 아닌지는 곧 다시 만날 때 확인할게요. 1월이라 날씨가 많이 춥네요. 따뜻해질 즘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S. 힌트는 '처음' 그리고 '편지'!

 

 2017년 1월 9일.

 From. 지민

 

 

 편지는 별로 길지 않았다.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지 않은 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말도 없었다. 마치 어제까지 편지를 주고받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지민 씨의 편지는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러웠다. 왜 풍경을 선물해 주었는지 퀴즈를 내는 지민 씨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힌트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프흐, 너무 쉽잖아요 지민 씨.”

 

 우리가 처음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날이 여름이니까. 그래서 여름 하면 생각나는 풍경을 준 것이리라. 따뜻해질 즘이면 봄인가? 봄이 되려면 아직 한참은 남은 거 같다. 어떻게 만난다는 건지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다시 만나자던 그 약속은 한치의 거짓도 없다. 기다리면, 봄은 반드시 오니까 우리는 꼭 다시 만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 아닌 봄이 시작됨과 동시에 풍경을 베란다 천장에 달린 빨래 건조대 위에 매달았다. 기다리고 있어.

 

 

 *

 

 

 바람이 부는 거 같다. 찰랑찰랑. 어디선가 들려오는 풍경종소리에 지금 바람이 부는가보다 싶었다. 풍경은 조용히 하지만 무시할 수 없도록 어여쁘고 맑은 소리를 냈다. 딸랑거리는 작은 종 같기도 찰랑이는 트라이앵글 소리 같기도 했다. 한편으론 길목 어딘가를 지나치는 자전거의 벨 소리 같기도 했다. 밥을 먹다가도 옷을 입다가도 저 멀리서 은은하게 풍경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던 양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바람이 부는가보다 한다. 그 사람이 오는가 보다, 한다.

 

 

 

 지민 ver.

 

 

 집 앞에 있는 바다는 항상 꼭 내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인적은 없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 동네와 날씨가 괜찮은 날이면 밖으로 나가 혼자서 만끽하는 바다는 꼭 내가 전세를 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그게 외롭기도 했다. 그 생각은 부쩍 할머니가 서울로 올라갔을 때부터 더 진해졌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기다려야 했으니까. 나는 왜 기다려야만 했던 건지. 얌전하고 착한 아이가 되고 싶던 어린 날의 나는 여전히 남아있는지. 나 혼자만의 것 같던 바다에 그녀가 들어온 뒤부터 나는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남들과 같이 당연히 사랑을 바라도 되고 해도 되는 사람이란 걸 절실히 알 게 해주었다. 수지 씨가.

 

 11월 수능이 끝나며 답안지에 한 줄로 죽 긋고는 망했다며 우는소리를 내는 정호원과 수능이고 뭐고 배고파 죽겠다며 분식집으로 돌격하는 안승연을 두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수지 씨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 않는 날이 어색하고 심심하고 궁금했지만 괜찮았다. 언젠간 꼭 만날 수 있을 거란 약속을 잊지 않았기에. 어느덧 가을은 완전히 안녕을 고하고 겨울이 찾아왔다. 동시에 이번 12월은 예년보다 빨리 찬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게 더 빨리 봄이 찾아오려는 신호인가 보다 웃음 지었다. 졸업식 날, 할머니만 올 줄 알았는데 부모님이 와서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지민아, 졸업 축하한다.'

 '바, 바빠서 못 오실 줄 알았는데….'

 '아들 졸업식인데 아무리 바빠도 와야지. 그동안 자주 못 찾아와서 서운했을 텐데 혼자서 고생했어.'

 

 부모님은 꽃다발을 안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그에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나는 환하게 웃었다. 아주, 아주 환하게. 얼마나 바랐던 날인지. 부모님이 돌아와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이 얼마나 따스했었는지 기억이 나고야 말았다. 성큼 들어선 겨울 1월, 드디어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아가 까먹은 거 없제, 다 챙깄나? 함 더 보고 온나.”

 “아, 할매! 몇 번째야. 진짜 다 챙겼어 짐도 별로 없는데 뭘―.”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또다시 안방으로 들어갈 기세인 할매를 말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다 챙겼다니까 참. 웬만한 건 거기 다 있으니 간추린다고 간추린 건데도 할매가 이것저것 챙겨 넣어주는 바람에 등에 진 배낭이 빵빵하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집과 마당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다리에 머리를 부비적대는 솜이를 발견하고 허리를 굽혀 쓰다듬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식탐이 장난 아니던 솜이는 어느덧 훌쩍 커서 한 품에 들기에 꽤 무거워져서 데려갈 수가 없다. 또 할매도 혼자 남으면 외로울 테니까 솜이 네가 같이 있어야지 그치?

 수시로 원서를 넣었던 몇몇 대학에 최종 합격까지 했는데 그중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그 길로 목표가 생겼다. 미술은 돈이 많이 든다고 해서 걱정이 앞섰지만 부모님은 내가 그림을 더 배우고 싶다는 말에 반대하지 않으셨다. 또 대학교가 부모님이 사는 곳과 근처라서 당분간은 부모님과 함께 살기로 했다. 으차. 허리를 펴고 할머니를 돌아봤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걱정 말라며 찡긋 웃자 그제야 표정을 풀고 묻는다.

 

 “좋나?”

 “응, 아무래도 부모님은 바쁘니까 나 혼자 사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좋다 할매. 아, 역시 할매랑 헤어지는 건 좀 그렇지만….”

 “그려, 좋으면 됐다. 몸조심하고 차 조심하고 올라가그라.”

 

 가만히 그런 할머니를 보다 다가가서 할머니를 껴안았다. 야야, 숨 막힌다. 놔라 이러다 버스 놓칠라.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쑥스러워서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란 걸 알고 있다.

 

 “할매, 고마워. 나 키워주고 사랑해줘서.”

 

 자주 올 거니까 건강 꼭 챙기고 알았지?

 할머니가 내 등을 토닥이는 투박한 손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떼고 파란 대문을 열었다. 저 멀리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바다도 오늘로 자주 보기 힘들겠구나. 한낮의 햇살과 차가운 겨울바람이 섞여 따스하고도 시린 기분이 들었다. 딸랑, 풍경종 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에 공방에서 산 풍경종을 어제 처마 밑에 달아놨었다. 아직 2월이라 풍경을 달기엔 한참은 이른 계절이지만 미리 달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곧 겨울은 끝날 것이다. 그럼, 기다리던 봄이 올 것이다. 수지 씨도 이 풍경을 달 준비를 하고 있을까. 이번에는 편지를 쓰는 게 왠지 어려워서 몇 장을 찢어버렸는지 모르겠다. 결국 쓴 말이라곤 새해 선물로 풍경을 준다는 얘기가 다였다. 아, 정답을 맞혔을까?

 

 풍경종을 보자마자 그녀가 생각났다고. 초여름의 어느 날, 내 앞으로 날아온 소라색 편지가. 그 속에 담긴 그녀의 따스하고도 애절한 사랑을 읽고 만 나와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편지가 떠올라서 다시금 편지를 쓸 수밖에 없어진 나를 알아챘을까 궁금했다.

 

 

 ***

 

 

 봄, 봄이다. 완연하진 않지만 입춘이 왔으니 봄은 봄이다. 아직 꽃샘추위는 매섭고 겨울은 완전히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것 같지만 봄이 온 것이다. 일찍부터 등교를 했지만 아직 수업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은기와 캠퍼스 주위를 도는 중이었다. 저 멀리 캠퍼스 입구부터 시끌시끌한 게 보인다. 하품을 한 은기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벌써 4학년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엊그제 신입생이었던 거 같은데.”

 “저기, 신입생들인가 보네. 이야 다들 동아리 홍보하느라 바쁘다 바빠.”

 “…너 학생회잖아?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안 되지. 아 씨, 내가 이래서 입부하기 싫었는데…. 먼저 간다. 수업 끝나면 전화해. 점심에 학식이나 같이 먹자.”

 

 왠지 여유 부린다 싶더라니 농땡이었나. 손을 털며 인사한 은기가 캠퍼스 입구 쪽에 진을 친 수많은 동아리 틈에 끼어드는 걸 지켜보다 걸음을 옮겼다. 캠퍼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작은 연못 가까이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앉았다. 아직 좀 추운 거 같은데 견딜만하다. 한 20분 남았나.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한 뒤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이번에 새해로 넘어가면서 사 본 다이어리인데 수업 시간표 적는 거 말고는 그다지 쓸 일이 없는 거 같다. 앞장만 닳았네. 수업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는데 속지에 끼워두었던 반으로 접힌 종이가 눈에 띄었다. 모서리가 닳은 종이를 조심스레 펼치자 눈앞에 새하얗게 바다가 펼쳐졌다. 어디선가 파도소리가 들린다.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짭짤한 소금기 가득한 바다 향기가 맡아진다. 나는 순식간에 그곳을 살고 있게 됐다.

 

 “…….”

 

 언젠가 아빠의 편지와 함께 날아온 바다 그림. 그것을 납골당 아빠 사진 옆에 두었었고 얼마 후 아빠의 유골함을 정리하며 따로 챙겼던 그림이다. 오랜만이네. 살풋 미소 지은 채로 그림을 펼쳐보다가 그만 다이어리에 끼우려는데 삐끗 바람에 종이를 놓치고 말았다.

 

 “어, 어?!”

 

 붕, 눈앞을 스쳐 허공으로 떠오른 종이는 내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지만 애석하게도 닿지 않았다. 연못에 빠져버릴까 찰나 아찔한 기분이 돼버렸다. 파라락, 옅은 바람에도 머리칼은 가닥가닥 흩어지고 눈앞을 하얗게 지나가는 그림을 눈으로만 허망하게 쫓다 다행스럽게도 연못 바로 앞에 종이가 떨어졌다. 행여 그 사이에 날아가 버릴까 종이만 쳐다보며 황급히 뛰어갔는데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내 눈앞으로 천천히 건네지는, 바다.

 

 “잘 지냈어요? 수지 씨.”

 

 못 본 사이 키가 훌쩍 크고 소년티도 전보다 많이 벗었지만 목덜미를 덮은 까만 머리와 한쪽에 보조개가 들어가며 올라가는 입모양, 유순하게 반달로 휘어지는 눈꼬리의 웃는 얼굴은 여전히 소년 같은 그가 서있었다. 지민 씨의 손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작은 연못은 마치 지민 씨와 바다 앞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을 연상케 했다. 나는 왠지 목이 매였다.

 

 “답장… 못 했는데….”

 “괜찮아요. 이렇게 만나자고 약속했잖아요.”

 “그림도,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는데….”

 “그것도―, 문제없어요. 내가 더 멋지게 그려주면 되니까.”

 

 지민 씨의 손에 들려있던 바다는 내 손으로 넘어왔다. 그 바다 그림을 쥐고 지민 씨를 응시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나를 보는 그의 눈도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을 담고 사랑한다 얘기하고 있었다. 허투루 흘러갈 인연이 아니다. 그러니 당신이 이어준 소중한 인연이라고 믿을게요. 아빠.

 

 잘 지냈나요?

 혹 아픈 곳은 없고요?

 

 나는 내가 사랑한 두 사람에게 같은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바다를 사랑한 두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항상 사랑을 담아 돌아왔다. 나는 늘 그 마지막 말이 좋았다. 사랑을 담아, 너에게 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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