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돌벽으로 둘러진 골목을 지나 비포장도로까지 걸어갔다. 머지않아 주위가 텅 빈 대로변이 나왔다. 도로 양옆으로는 한창인 코스모스와 파랗고 하얀 지붕을 가진 낮은 주택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11월에 가까워질수록 시월의 가을은 점점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살랑살랑 일주일 전보다 차가워진 듯한 바람이 불어온다. 흘러내린 잔머리를 귓바퀴 뒤로 넘기며 버스 정류장 앞에 멈췄다. 전날부터 꺼두었던 핸드폰 전원 버튼을 꾹 눌러 켜는데 까만 액정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화면이 밝기 전 까만 액정에 비친 내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었다.
“어…?”
순식간에 나를 에워싼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 건 공허함 때문이었나. 바다를 돌아설 때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다. 골목을 지날 때만 해도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짧은 거리에도 가을을 숨 쉬며 왠지 모르게 뻥 뚫린 속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걸음을 멈추자마자 곧 마을버스가 올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켜자마자 나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갑작스레 눈물이 차올랐다. 지민 씨 앞에서는 참았던 갈까. 아니, 나는 분명 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이제 끝이라 슬프긴 했어도 그 마지막을 슬피 보낼 수는 없었다. 흐르는 1분 1초가 전부 행복해서 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웃는 얼굴과 밝은 기운으로 채워도 모자랄 시간이었으니까. 저 멀리 버스가 오고 있다. 그만 떠날 시간이다. 나는 눈가를 문질러 닦고 배낭에서 지갑을 꺼내 쥐었다. 부르릉. 끼익. 내 앞에 작은 마을버스가 멈춰 섰고 출입문이 열렸다.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 거 같아 흠칫 옆을 돌아보았다. '…지 씨!'
“아가씨 안 타요?”
잘못 들었나. 다시 고개를 돌리고 버스 계단에 한쪽 발을 올린 순간.
“수지 씨―! 잠깐만요!”
아까의 인사처럼 우렁찬 지민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아저씨께 죄송하다 인사를 한 후 버스에서 내렸다. 저 멀리 도로 옆 갓길을 뛰어오는 지민 씨가 보였다. 휘둥그레 커진 눈을 한 채 그쪽으로 다가가니 금세 가까워진 지민 씨가 내 앞에 헉헉대며 멈춰 섰다.
“지민 씨? 무슨 일이에요?”
왜? 내가 뭘 두고 가기라도 했나? 의아한 눈으로 지민 씨를 보는데 급한 숨을 고르는 그를 봐서 그런가 덩달아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 두근두근. 알 수 없는 떨림이 목 아래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지민 씨는 무릎에 손을 얹고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별안간.
“솜이가 없어졌어요!”
“……예?”
순간 무슨 말인가 이해를 하지 못해 당황한 목소리에 삑사리가 나고 말았다. 눈물마저 쏙 들어가 버렸다.
“나갈 때 대문을 제대로 안 닫았나 봐요.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는데….”
“아니 지금 이럴 때에요?”
“네?”
“빨리 안 오고 뭐 해요. 솜이 찾아야죠!”
배낭에 다시 지갑을 집어넣으며 다시 왔던 길을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
***
그렇게 닥치는 대로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솜이의 이름을 목청껏 외친 우리는 결국 솜이를 찾지 못해 다 쉬어빠진 목소리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차갑게 식은 얼굴을 가지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좁은 동네에서 그새 어디를 간 건지. 골목을 걸어가는 내내 까무룩 저물어버린 하늘의 어둠이 축 처진 지민 씨의 어깨를 덮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운 내요 지민 씨…. 동네가 좁으니까 멀리 가진 못 했을 거예요.”
“네에… 고마워요. 근데 미안해서 어쩌죠. 저 때문에 집에 가지도 못 하고….”
“그게 뭐 중요한가요. 솜이부터 찾아야… 어어, 솜아!!”
끼익. 힘없는 손으로 파란 대문을 열어주는 지민 씨에 내가 먼저 마당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기 무섭게 솜이가 번개처럼 달려오는 게 아닌가. 뛰느라 팔랑이는 두 귀와 동글동글 까만 눈과 코, 솜방망이 같은 앞발까지. 어디 밖에 있다가 온 상태라기엔 너무 멀쩡했다. 나도 지민 씨도 그 자리에서 바로 얼음. 그런 우리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 앞에 발라당 누워 애교를 부리는 솜이다. 얼음 상태를 땡 하고 깨준 건 마루 한켠에 앉아있던 할머니였다.
“짐까지 어디 있다 들어오노?”
“하, 할매. 얘… 얘 어디서 찾았어?”
“찾기는? 내내 집에 있었고마.”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길래 난 얘 없어진 줄 알고…!”
“아~ 아까 딸아 데려다줄 때 말이가? 내 요 앞에 산책 쪼매 시켜주다 왔제. 온종일 마당에서만 노는데 좀 심심하겠나.”
“할매!!”
하하. 하…. 그 짧은 시간에 있었던 소동을 모르는 할머니의 아무렇지 않은 말에 우리는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내다 긴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진이 쭉 빠진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솜이는 그저 좋다고 낑낑. 풀썩 무릎을 굽혀 앉은 지민 씨가 솜이의 까만 코를 톡 때린다. 너 때문에 못 산다 내가. 지민 씨와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우리는 크게 웃고 말았다.
“아아 지금 너무 쪽팔리고 미안해서 뭘 어째야 할지. 근데 이렇게 빨리 다시 볼 줄은 몰랐네요.”
“그러니까요. 이게 뭔 난리인지…. 저, 그래서 말인데 이제 버스도 없고 하루만 더 신세 져도 괜찮…을 까요?”
“하아, 수지 씨. 괜찮을 게 당연하잖아요.”
역시 마지막은 마지막이 아니었나 보다. 괜히 마지막이라 정해놓고 미리 슬퍼할 필요는 없는 거였나 보다. 이 자그마한 우연이 가을처럼 서서히 찾아와 내 소박한 날을 풍요롭게 채워주더니 어느덧 우연으로만 둘 수 없게 만들어두었다. 그걸 알았을 땐 이미 세상 모든 만물이 쉬는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아야 한다고. 아주 잠시 자고 일어나면, 봄이 된 인연이 다시금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현재의 가을이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늦은 밤, 마루에 나란히 앉아 마지막 남은 사과를 깎아 먹으며 지민 씨가 말했다.
“뭐, 슬퍼해도 괜찮잖아요? 어떤 모습이든 함께 했다는 게 중요하니까. 사실 나도 헤어질 때 쪼―금 슬펐어요. 아, 진짜 조금이에요. 그보다 기쁜 게 더 컸으니까.”
“나 운 거 봤어요?!”
“에이, 괜찮다니까요―”
아마도 마지막 날일 가을을 만끽하며 먹는 사과는 여전히 처음 이곳에 온 날처럼 달았고 흐흐하고 웃는 지민 씨 특유의 웃음소리에도 단내가 풍겼다.
나중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마을버스 안에서 뒤늦게 그에게 받은 책이 생각나 앞장을 펼쳐보니 자그마한 그림이 나타났다. 곧은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와 바닷가에 앉은 나와 지민 씨 그리고 할머니와 솜이의 점처럼 작은 뒷모습이었다.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지만 노란색 속지 덕분에 꼭 노을이 지는 바닷가처럼 보였다. 그림 맨 끝 귀퉁이에 마찬가지로 연필로 연하게 써진 글자가 보였다. 그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림 편지는, 처음이네.”
2017년 10월 7일.
사랑을 담아.
From. 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