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있는 천장이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하나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었기에 조용하였지만 알 수 있었다.
어두운 색만 존재하지 않는 곳, 모든 존재들이 살아있는 이곳.
그녀는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으며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내가… 이승으로 돌아온 거야….’
그가 살아주기를 원해서 큰마음 먹고 이승으로 돌아왔는데….
어떡하지? 나 벌써… 월과 팀원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놀란 하나가 “어?”라면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았지만 그것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병실 문이 열리고 그녀의 부모님이 지친 얼굴로 들어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누워있었던 딸이 깨어난 것을 본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엄마가 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딸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그 사이 아빠는 의사를 찾으러 갔고, 엄마는 옛날과 같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계속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제야 하나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지 우는 이유를 물어보는 엄마.
“왜 울어? 혹시 어디 아파? 그런 거니?”
다급한 듯 숨을 제대로 쉬지도 않고 말하는 그녀였다.
하나는 엄마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팀원들을 기억하지만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잊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차라리 이럴 거면 기억을 지워주지.
왜 염라는 자신의 기억을 지우지 않은 것일까?
혼수영혼이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오거나 영혼들이 새로운 환생을 할 경우에는 저승의 기억을 모두 지워야했다.
하지만 왜인지 한성은 하나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고 모든 기억을 가진 채 이승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가 자신을 많이 봐주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갑자기 다애가 생각났다.
염라는 하나와 저승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아마 다애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언급해서 그런 것이겠지.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도 다애처럼 천령과 한성에게 많은 총애를 받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금 이 저승의 기억은 염라의 선물이었던 거야.
자신이 아끼던 저승차사의 감정을 다시 되찾게 해준 보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그녀였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이승의 하늘은 저승과 다른 느낌의 하늘이었다.
똑같이 어둡고 달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왜인지 저승의 하늘이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던 하나가 한 손으로 자신의 목에 있는 달 목걸이를 만져보았다.
저승에서 월에게 건네주었던 그 달 목걸이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열쇠가 될 테니까.
* * *
“하나야~!”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벌써 1년이 지난 하나는 어느덧 스무 살이 되어 아가씨 티가 나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던 그녀는 나이에 맞게 학년을 다니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갔다.
겉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곁을 주었다.
늘 부정적이었던 그녀는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무표정보다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족들과 잘 지냈고, 유정과는 정말 친한 사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보다는 서로를 위했으니까.
이제 하나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상처를 받으면서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저승에서 배운 것들을 이승에서 그대로 간직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라는 월의 말도 잊지 않고 계속 행동하였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갔고, 먹고 싶으면 먹었으며,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배웠다.
모든 것을 다 하는 듯한 그녀는 많이 자유로워 보였지만 딱 한 가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개팅 안 할래? 진짜 우리 과 선배 중에 정~말 괜찮은 선배 있는데, 내가 너하고 찍은 사진 프사로 해놨잖아. 그거 보고 네가 마음에 들었나봐. 응? 한 번만 만나봐!”
남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하나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절대로 쉽게 바뀌지 않았다.
벌써 월과 이별을 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마음에는 그가 있었다.
고민을 하는 것은 사치라는 듯 단호하게 싫다는 하나.
대답을 들은 유정은 두 손을 간절히 모으고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아, 한 번만……. 내가 너 때문에 선배들한테 깨진 게 몇 번인 줄 알아? 너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선배들은 엄청 많은데 네가 계속 거절하니까 그 후폭풍이 다 나한테 오잖아~!”
“너, 내가 거절했는데 계속 강요하는 거 엄청 싫어하는 거 알지?”
하나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을 알았던 유정은 그 한 마디에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개를 조금씩 젓고는 그런 선배들이 있다면 자신한테 말하라는 하나.
유정을 뒤로하고 먼저 앞으로 걸어가는 하나의 뒷모습을 본 그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았던 하나는 여자가 보아도 정말 멋있는 여자였다.
실제로 남자뿐만 아니라 시원시원한 성격과 무심한 듯 챙기는 성격에 여자 선배들이나 후배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너인데 왜 좋은 남자를 다 걷어차는 것인지….
유정이 하나를 쫓아가며 그 이유를 물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내겐 그 사람이 너무 멋져서 다른 남자들은 눈에 안 보여.”
피식 웃으며 말하는 하나의 표정을 본 유정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형을 좋아했을 때보다 더 행복해 보이고 예뻐 보이는 친구였다.
놀란 듯 조금 커졌던 유정의 눈이 이내 반달처럼 휘었다.
에휴, 이제는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들 내가 먼저 방어해야겠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나보라고 할 수 있겠어?
자신의 친구가 푹 빠져 있는 남자에 대해 궁금했던 유정은 씨익 웃고는 하나에게 궁금한 것들을 모두 물어보았다.
“어떻게 만났어? 몇 살이야?”
“비밀이야.”
“성격은 어때? 잘 맞아?”
“잘 맞으니까 좋아하지. 사실 처음에는 별로였는데 같이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행복했어.”
“오올…. 얼굴은? 얼굴은 어때?”
“완전 내 이상형이야.”
하나의 대답을 들은 유정이 두 뺨 위에 손을 올리고는 꺅꺅거렸다.
자신보다 더 설레어하는 듯한 유정의 표정과 행동을 본 하나가 피식 웃어 보였다.
월과 둘, 셋을 만나고 이승에서의 생활은 나름 즐거웠다.
매일매일 죽고 싶어 하던 자신이 이제는 내일을 기대하고 있었고, 무거웠던 마음은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졌으며, 행복하다는 말을 아무 고민 없이 바로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망자를 데려가는 저승의 심부름꾼들에게 이 모든 것들을 배우다니….
나보다 더 대단하고 신기한 일을 경험한 사람이 있으려나.
그 사실에 웃겼던 하나가 후후 웃음이 나왔다.
유정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도중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을 멈춘 하나에, 유정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어디 아픈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녀의 질문을 들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하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거지…?
불안해서 뛴다기보다는 오히려 설레어서 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도겸 오빠!”
익숙한 이름과 목소리가 들려오자 놀란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가 나는 쪽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다가 건너편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남학생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두 눈이 점점 커져갔다.
몇 년 만에 보는 그들의 모습, 하나와 같이 저승에서 소원을 위해 업적을 쌓은 그들이었다.
환히 웃으며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는 이야기를 나누는 둘과 셋을 빤히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나를 보고는 두 눈이 커졌다.
건너편에서 자신들을 보며 슬픈 미소를 짓는 하나에, 도아 역시 환히 웃어주었고, 도겸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였다.
그들 사이로 차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지만 차 때문에 모습이 가려져 이제 볼 수 없었던 그들은 한동안 그곳에 가만히 서 있다가 자신들의 길을 걸어갔다.
하나의 표정을 본 유정은 피식 웃어 보였다.
정말 보고 싶었던 사람을 본 것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기억을 혼자 간직하게 해주고 싶었기에 건너편에 있었던 학생들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원래 소중한 것은,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에 소중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던 유정은 못 본 척 다른 대화를 하였다.
.
.
.
어느덧 보육원에 도착한 하나와 유정은 이만 헤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 자주 찾아왔던 하나는 혼수상태가 되었을 때 찾아오지 못한 미안함에 매일 보육원에 들렀다.
입구를 지나치자 많은 아이들이 그녀를 보고는 해맑게 웃으며 달려와 안겼다.
자신을 향해 순수한 미소를 보여주는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하나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린 원장이 이렇게 자주 오는 것이 힘들지 않냐며 걱정해주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다는 듯 헤헤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하나.
아무튼, 고집이 유난히 센 것은 주형과 정말 많이 닮았다니까.
학교를 마치면 이렇게 보육원으로 바로 달려와 동생들을 돌봐주는 것도 그렇고.
하나에게서 주형의 모습이 자꾸 보인 원장은 그들이 정말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네가 저 맑은 곳에서 이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면, 아마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겠지.
그 생각에 미소가 나타난 원장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너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분이 이곳으로 봉사를 왔다는구나. 한 번 얼굴 보고 인사를 해보는 것은 어떠니?”
“남자요? 그분이 여길 어떻게 알고 와요?”
“글쎄…. 하지만 인상도 좋아 보였고 너랑도 아는 사이인 것 같았어.”
나랑……?
그녀의 주변에는 남자가 늘 끊이지 않았지만 보육원으로 봉사를 올 만한 사람은 있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하고는 남자가 있는 위치를 물어보았다.
어렸을 때 하나가 자주 갔던 언덕에 있다는 원장의 말에 자신을 감싸고 있는 아이들을 간신히 뚫고 그곳으로 가보았다.
보나마나 내 주변에서 보육원에 봉사를 하러 왔다고 하고 나를 보러 온 것이겠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하나는 한숨을 푸욱 쉬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점점 보이는 한 남자의 모습은 꽤나 익숙한 것 같았다.
그래봤자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고 생각한 하나가 그의 뒷모습을 마주보았다.
“저를 아신다고 들었는데 누구세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다.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말에도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하나가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저기요, 사람이 얘기를 하면 좀 대답 좀 해줄래요?”
“……정말 달라진 것은 하나 없고 좀 더 여성스러워진 것 같네.”
“예?”
“하지만 여전히 달 목걸이는 하고 있고…….”
하나는 자신이 차고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아닐 거야.
설마…… 정말로……?
떨리는 목소리로 달 목걸이를 가지고 있냐는 질문을 하는 하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침묵이 찾아왔다.
바람이 약하게 불어오고 하나의 긴 머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남자가 몸을 돌리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머릿결을 만지자,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하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의 목에도 자신과 똑같은 달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사리지지 않았어…….
정말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주는 열쇠였던 거야…!
잊을 수 없는 사람, 잊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
“월……!”
“약속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구나. 정말 다행이야.”
그 말을 들은 하나가 환하게 웃었지만 이내 눈물을 흘렸다.
웃으면서 우는 하나의 모습을 본 월이 피식 웃고는 다정하게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와 같은 시간에 살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어.”
“응……. 잘했어요.”
“이제는 너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해지는 시간이야.”
“아하하, 당연하죠! 내가 월을 기다린 시간만 몇 년인데!”
그들은 서로를 보며 싱긋 웃다가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여전히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그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행복한 이유가,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너’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
오늘따라 유독 맑았던 하늘은, 그들의 만남을 축복해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