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
서이호 선배의 덥다는 말을 듣는 게 이걸로 스물 세 번째다. 보통 같은 말을 스물 세 번이나 하는 사람을 보면 겉으로 표현하진 않더라도 내적으로 분노가 솟아오르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대가 선배라서가 아니다. 저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에 있는 이호 선배와 나를 포함한 넷이 전부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고 있다. 그 넷이 있는 이곳은 동아리실. 예전엔 밴드부가 사용한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런 흔적만 있을 뿐 어느 정도 의미가 변질된 곳이다. 이지민 선배는 기타를 조금 건드리다가 화가 난 듯 피크를 내던졌다.
“아 더워!! 학교가 드디어 미쳤나? 아니, 애초에 미쳤었을 테니 더욱 미친 건가? 이 날씨에 어떻게 에어컨을 안 틀어주지?!!”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하게 박주윤이 한마디를 날렸다.
“삼계탕 안에 들어간 닭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그 말에도 동의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들고 왔던 박주윤은 지민 선배의 말을 듣고 며칠 뒤, 동아리실에 찾아와 당차게 “가입시켜주세요!”라고 외쳤다. 선배들을 포함한 우리 셋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동아리에 받아줬다. 저번에 박주윤과 둘이서 있었을 때 그에게 그 후로 어떻게 했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조언을 받았잖아. 그 조언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렇게 했어.”
“그러면 학원을 끊은 거야?”
“맞아. 그리고 다른 학원을 알아보는 중이야.”
“음……? 무슨 학원? 설마 공부?”
“공부 학원을 그만뒀는데 비슷한 곳을 또 선택하겠어?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그 쪽으로 알아보고 있어.”
“그림이라면 어느 쪽?”
“웹툰이든 뭐든 상관없어. 그림이면 좋아. 고3 때 직업반으로 빠져보는 건 어떠냐고 여쭤봤는데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하시라고 그랬어.”
그 대화를 할 때 나는 박주윤에게서 저번에 지민 선배가 말했던 것을 봤다. 빛. 그가 밝게 빛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선배 둘 뿐이었던 동아리 인원은 넷으로 늘었다. 그래서 이쯤 되었으니 악기를 가르쳐주나 싶었는데 그러려는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 하고 이호 선배에게 물어봤다. 입을 여는 것조차 더워서 힘든 느낌이 들었다.
“저희한테 악기는 언제 가르쳐 주세요?”
“음…… 한 명만 더 모이면 가르쳐 줄 생각이야.”
“네? 그러면 다섯이잖아요. 보컬까지 포함해서 드럼, 기타, 베이스. 구성 요소는 넷 아니에요?”
“맞아.”
“그러면 숫자가 안 맞잖아요.”
“아마도 베이스를 빼고 보컬 둘에 기타 둘, 드럼 하나로 갈 것 같은데?”
“뭐,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자고.”
지민 선배의 한마디에 대화는 종결되었다. 저번에 선배들을 제외하고 셋을 더 모았을 때 악기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 셋이라는 수를 맞추려나 보다. 그 상태로 각자 할 일을 한지 몇 분, 이 더위를 버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겠지만 교무실로 내려가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자고 마음을 먹고 몸을 돌렸을 때 누군가가 동아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총합 8개의 안구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응시했다.
“저기…….”
“포스터 보고 오셨어요?”
“응.”
박주윤이 적당한 말로 들어올 때 가지고 있었을 것 같은 긴장감을 어느 정도 깨줬다. 이름표의 색으로 생각했을 때 이번 고민의 주인공은 2학년인 것 같다.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이호 선배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선배도 그녀를 보더니 같이 손을 들어 흔들어주며 말을 건넸다.
“민서, 네가 여긴 웬일이야? 아, 포스터를 보고 왔다고 그랬지.”
“응, 맞아. 그나저나 점심시간이나 동아리 시간 때 어디를 가나 했더니 여기였구나.”
“작년에도 우리 같은 반 아니었어? 그 때에도 나 밴드부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응, 공연도 봤었으니까 알고 있었긴 했는데……. 선배들 다 빠졌으니까 사람이 적어서 그만둔 줄 알았어.”
“하긴.”
이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민서 선배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지민 선배 쪽으로 시선을 돌려 몸을 움직이더니 그녀의 앞에 가서 반갑고 짧게 인사했다.
“너도 안 그만뒀구나.”
“당연하지.”
그리곤 뒤돌아 우리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너희가 새 부원이야?”
“네, 뭐. 그런 셈이죠.”
“다행이네.”
그녀는 입가를 누그러뜨리며 웃음 지었다. 뭐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었다. 민서 선배는 우리를 한 바퀴 둘러보곤 말을 꺼냈다.
“동아리 시간이여서 여기에 있는 거지? 사실 상 동아리 시간은 동아리에 속한 학생들 재량이니까 카페라도 갈까? 조금 무거운 이야기거든.”
망설임도 없이 동의가 목 끝까지 올라왔는데 돌연 이호 선배가 치고 올라왔다.
“잠깐만. 묻고 싶은 게 두 개 있어. 우선 너도 동아리가 있지 않아? 게다가 부장이잖아.”
“오늘은 애들 전부 먼저 보냈어. 알다시피 그건 우리 재량이니까.”
“그럼 또 하나. 카페에 에어컨은?”
“빵빵해.”
이호 선배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한껏 피우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가 여태 들은 선배의 목소리 중 제일 큰 목소리로 “가자!”라고 말했다. 아니, 소리쳤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카페에 도착해서 각자 음료를 주문하고 다섯이 앉기 편한 6인석에 앉았다. 선배들은 하나 같이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고 나는 아이스 홍차, 박주윤은 아이스 초코를 주문했다. 한 데 모여앉아 음료가 나오기 전까지 동아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작년의 밴드부가 어땠는지, 두 선배의 밴드부에서의 존재감 같은 이야기들이 즐겁게 오가는 사이에 민서 선배가 손목에 낀 손목 밴드의 밑, 그곳에 살짝 보이는 반창고 뭉텅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뭉텅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덕지덕지 붙인, 꼬마도 저렇게는 안 붙이겠다 싶을 정도의 것이었다. 저게 뭘까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직전에 주문했던 음료수가 나와서 잠시 이 생각을 머릿속의 구석에 넣어뒀다.
각자 빨대로 음료수를 한 입씩 마시며 “맛있네.”라던가 “달아.”같은 반응을 내뱉고 있었는데 민서 선배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 고민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는 모양이었기에 일제히 음료수로부터 거리를 두며 조용히 했다. 작은 배려를 눈치 챘는지 선배는 고맙다고 작게 이야기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가정의 문제라 올까 말까 고민을 했었거든. 그래도 막상 와서 고민이 있다고 해주니까 별 다른 반박도 없이 받아줘서 고마워.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본론을 말할게. 가정폭력이라고 들어봤어? 아마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해. 공익광고라던가, 고발 프로그램 비슷한 곳에서 자주 나오기도 하니까. 버스 같은 곳에도 스티커 같은 걸로 붙어있고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곳에서도 가끔 나오기도 하고. 내가, 그러니까, 음…… 그런 걸 받고 있어.”
선배는 분명히 조금 무거운 이야기라고 했는데 이건 그 범위를 벗어난 느낌이다. 아니, 확실히 벗어났다. 조금 무거운 정도가 아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아까 구석에 넣어둔 반창고 뭉텅이가 네온사인처럼, 사이렌처럼 밝고 붉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