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이호 선배, 김미주는 후문 쪽에서 핸드폰 통화 모드를 스피커로 켜둔 채 가만히 있었다. 지민 선배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서 이대로 기다려달라고 했다. 이런 말을 한 선배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 선배는 혼자 정문 쪽에서 핸드폰으로 우리와 통화 상태를 해둔 채로 서있다. 이따금 “잘 들려?”라고 질문이 날아와 그렇다고 답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대화는 없는 상태다. 이번엔 대체 뭔 방법일까, 어떤 방법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까. 호기심이 선을 넘어 기대로 변한 순간,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가지의 목소리. 하나는 익히 들어온 지민 선배의 목소리고 나머지 하나는 김미주의 반응으로 보아 그녀의 남자친구인 것 같다. 우리 셋은 숨을 죽인 채 온갖 신경을 스피커에 집중하며 두 목소리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들었다.
“저기, 네가 혹시 김민준?”
“네. 그런데 왜요? 이름표를 보니 선배이신 것 같은데.”
“아니 별 건 아닌데. 김미주라고, 알지?”
“네, 알죠. 제 여자친ㄱ……”
“걔가 헤어지자고 전해달래. 직접 말을 못 꺼내겠어서 나보고 대신 말해달라고 하더라.”
난 신속하게 김미주의 어깨를 눌렀다.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려는 기세가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상의도 없이 진행된 선배의 거짓말.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호 선배만이 무표정하게 대화의 내용을 듣고 있었다. 나랑 김미주는 의문만이 부풀어 가는데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화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무, 무슨 소리에요. 제가 그런 소리를 믿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와 걔랑 선배는 만난 적도 없잖아요.”
“잔뜩 흔들리고 있는 동공부터 진정시키고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겠냐. 아무튼, 나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만 받았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그 침묵은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어 여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깊게 깔린 침묵 속에 김미주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져 갔다. 뭐라도, 한마디라도 위로를 건네줄까 하는 마음에 입을 열려고 했는데 그 타이밍에 스피커 너머의 김민준이 입을 열었다.
“그럼, 선배.”
“왜.”
“……저랑 사귀어주세요. 첫눈에 반했어요.”
“쯧.”
예상외의 미친 전개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까지 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살짝 김미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던 김미주의 표정은 차마 글로 다 적지 못 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 감정들 중에 긍정적인 감정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라는 것 정도이다.
“어때요, 선배? 저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 정도면 외모도 나쁘지 않고, 성적도 중상위권이고……. 선배가 원하는 걸 대부분 들어줄 수 있는 능력도 있어요.”
“그럼 좀 뒤져줄래?”
“……네?”
“그래. 넌 딱 봤을 때 나쁘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있고 학교 안을 돌아다닐 때 네 이름을 선생들이 말하는 걸 들었거든. 꽤나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 앞날이 기대된다고. 그래서 그 아이한테서 네 이름을 들었을 땐 조금 의아했는데 말이야. 지금 와서 보니까 애초에 사람새끼가 아니었네.”
“하하……. 말이 좀 거치시네요.”
“웃지 마. 지금 얘는 웃을 기분 아닐 테니깐.”
“얘라뇨?”
“네 여자친구 말이야.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아까 한 말은 다 구라야.”
그리고 화상 전화를 신청하는 메시지가 와서 수락하여 김미주에게 건네줬다. 김미주는 혼이 빠져나가려는 것을 겨우 붙잡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응시했다. 건너편에선 김민준의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뭐야, 미주야? 이거 몰래카메라야?”
그의 질문에 옆에 있던 지민 선배가 두 마디 덧붙였다.
“아까부터 통화 상태였거든. 네가 나한테 한 소리 또한 다 들었을 거야.”
그 두 마디를 끝으로 다시금 내려오는 침묵. 김미주는 화면을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내게 건네며 일어났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 그녀의 옛 연인이 저 멀리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배의 말.
“애초에 그 스킨십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태도가 바뀐 시점에 너도 어느 정도는 생각했겠지. 여태껏 보여준 모습은 이 말을 위한 밑밥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넌 그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싶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한테 연락을 한 거야. 네가 돌아간 이후로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나 싶었어. 애초에 남의 연애사에 일일이 참견하는 것이 옳은가 싶기도 했지. 하지만 어쨌든 해결해주기로 했으니 나름 평화로운 방법을 모색한 게 이거야. 이 방법이면 만약 저 놈이 어떤 반응을 보여도 내가 거짓말을 친 거라고 해버리면 내 잘못에서 끝나니까 말이야. 그리고 좀 떠보고 싶었지, 저기 뒤에 보이는 놈의 너를 향한 사랑의 깊이를. 그리고 그 깊이는 아까 들은 대로야. 이별 통보에 대해 당황은 있어도 슬픔은 없더군. 애초에 저 새끼의 목적은 사랑이 아니었어. 그 사랑을 하는 데에 있어 하나의 부분이고 과정인 것이 목적인 거지.”
그리고 지민 선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한마디로 너랑 쟤는 인연이 아니었단 거야. 너무 실망하지는 마. 세상에 다 저런 새끼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김미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입을 벌렸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닫았다. 아랫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게 물고 있었는데 난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정도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다른 어딘가가 아프기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 짐작했다. 지민 선배가 어느새 이쪽으로 돌아와서 전화를 끊었다. 스피커로 통해 전해지는 기계가 섞인 목소리가 아닌 선배 본인의 목소리로 말했다.
“해코지를 하면 말해. 아까 그 통화는 다 녹음이 되었거든. 널 건든다면 방송부에 아는 친구한테 이걸 공유할 거야. 그럼 아마 전교에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거고 그럼 선생들도 가만히 있진 않겠지. 거기에 해코지의 강도에 따라 경찰까지 올 수 있어. 저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은 그대로 지 인생을 아침밥과 함께 말아 먹는 거야.”
지민 선배의 말이 끝나고 몇 초 뒤에 이호 선배가 김미주에게 조용하게 물어봤다.
“만족스러워?”
그의 질문에 쥐어 짜내듯이 그녀는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녀를 제외한 우리 셋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난 선배 둘에게 물었다.
“쟤는 어쩌실 생각이에요? 해결해주면 동아리 강제 가입 아니었어요?”
이호 선배가 내 말을 듣고
“해결이 전부가 아니야. 당사자가 만족해야지.”
라고 대답했고 연이어 지민 선배가
“아까 표정 봤잖아. 김연진, 넌 그 표정이 만족스러운 표정이라고 생각해?”
라고 물었다. 난 혼자서 생각하다가 작지만 확실하게 대답을 내뱉었다.
“그런 긍정적인 감정은 하나도 없는 표정이었어요.”
내 대답에 지민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비슷하게 작지만 확실하게 말을 덧붙였다.
“서로 바라는 게, 바라보는 게 다른 평행선 같은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건 등신 같은 짓이야. 서로만 피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