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애들은 먼저 집으로 보냈다. 이 학교에서 출발하는 하굣길은 오늘이 마지막이니 같이 가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되지 않았다. 중간에 연진이가 내 말투에서 이상한 점을 찾았는지 내 눈치를 계속해서 보는 걸 애써 무시하는 건 정말이지 힘들었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가 오늘 도저히 어울려주기 힘들었던 이유는 1학년 애들의 탓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걔네들 앞에 나타나 걔네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줬고, 그들의 새 출발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응원해준 거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친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주위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도 굉장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더욱 나를 힘들게 한 사실은 그 사람이 얼마 전 바로 여기, 동아리실을 찾아와 고민의 해결을 부탁한 선배라는 점이다.
선배의 사망 원인은 자살이다. 선배 자신의 집에서 자살했으며 손목에서부터 흘러나온 많은 양의 피가 책상 위를 적셨다고 한다.
선배의 졸업을 축하해주기 위해 3학년 층으로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그 사이를 걸으면서 단편적으로 들리는 단어들 속에 선배의 이름과 자살이라는 단어가 섞여서 들려왔었고, 얼굴을 든 불길한 예감이 절대 맞지 않을 거라며 억지로 확신했으나 3학년 담당 교무실에서 나오시는 선배의 부모님에게 여쭤본 결과, 확신은 무너졌고 앞서 서술한 내용에 대해 알게 됐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저번에 이호와 함께 측정한 걸 떠올려보면 한 캔 따위는 거뜬하게 마실 수 있다. 그 때 당시엔 어린 마음에 내 주량이 이호보다 많다는 거에 기뻤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잔뜩 취해서 내가 알고 있는 선배에 관한 사실을 전부 잊어버리고 싶은 지금의 내 심정으론 내 주량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좀 괜찮아?”
내게서 선배에 대한 사실을 들은 이호가 옆에서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곁눈질조차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고개를 저었고, 이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나도 안다. 그가 한 말이 그냥 던진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예의 상 던진 위로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도 나만큼 슬펐으면 슬펐지, 덜 슬프진 않을 거다. 이호도 나와 함께 선배들을 따랐고, 좋아했으며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들과 한 모든 일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너 같으면 괜찮겠냐?”
닥쳐. 닥치라고, 이지민. 더 이상 말하면 안 돼. 너도 알잖아. 이호도 슬프다는 거 알잖아. 알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주둥이 좀 닫아, 제발.
아무리 마음속으로 자제의 말을 내뱉어대도 내 입은 그런 것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지금 괜찮을 것 같아? 정말로 그렇게 보여? 눈 이상한 거 아냐? 안구라도 교체해보는 게 어때? 마음 한 곳이 텅 비어버린 느낌을 네가 알아?! 그런데도 애들 앞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어야 했다고……. 웃었다고! 친했었고 친하며 존경하는 사람이 죽은 마당에 웃었단 말이야!”
왜 이호가 그 느낌을 모르냐, 등신아. 당연히 알지. 너한테 지지 않을 정도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애라고. 웃은 건 이호도 마찬가지잖아, 이호의 마음도 고려해서 말을 해, 멍청아.
“심지어 내가 막을 수 있었어! 내가 그 날 말만 제대로 했어도…… 좀만 더 잘 말했으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내 속에서 날 자제하려고 했던 또 다른 의견도 포기한 듯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 더욱 기세를 받아 일어났고 이호도 나를 따라서 일어났다. 난 성큼성큼 다가가 힘 빠진 주먹질을 이호의 어깨에 날리며 말을 토해냈다.
“아니, 애초에 나를 대신해서 네가 말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지. 아니다……. 처음부터 고민 해결이라는 포스터를 내걸지 않았더라면……!”
“그만.”
내 두 손목을 잡고 이호가 날 제지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 고인 눈물을 닦지도 못 하고 이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호는 흔들림이 없는 눈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고 있기를 몇 분, 이호가 묵직하고 확실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네 탓으로 돌려도 바뀌는 건 네 멘탈 뿐일 거야. 점점 더 쪼개지다가 부서지겠지.”
나도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러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일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망의 대상이 너무나도 많아져서 떠올릴수록 미워할 대상만 늘어가기만 할 뿐이니까. 하지만…… 네가 말했던 대로, 선배가 말했던 대로 현실은 냉정한 법이지. 그런 식으로 태도를 정해봤자 결국 손해를 보는 건 너고, 이미 떠난 선배는 돌아오지 않아.”
그것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다.
“머리를 비우고 천천히 생각해봐.”
“천천히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지 알아? 넌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야.”
내 통제를 벗어난 입이 움직여 이호에게 충분히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마음껏 나불댔다. 하지만 이호는 내 말을 곱씹는 것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며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웃어보였다. 생각하지도 못 한 반응이었기에 난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기가 막혀서 이호에게 물었다.
“어째서…… 웃어?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웃을 수 있어? 미친 거야? 이 상황이 웃겨!?”
내 질문에 이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다지 미치진 않았어. 그래, 어쨌든 대답은 해줘야겠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야……. 결론은 간단해, 네가 이유야.”
내가 이유라고?
“네가 그렇게까지 선배의 일에 대해 슬퍼해줘서 내가 슬퍼할 틈이 없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아슬아슬하게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고인 채로 두려고 안간힘을 썼던 눈물이 빠르게 한줄기 흘러내렸고 그것이 신호탄이 된 듯 고였던 눈물이, 슬픔이 폭포마냥 쏟아졌다. 간신히 이호와 나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졌고 자연스레 이호에게 기대듯 안겼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 중얼거렸다.
“너무, 너무 슬퍼……. 나 이제 어떡해……? 머릿속에서 그 날 선배가 지워지지 않아. 내게 고민을 가져온 그 날 선배의 표정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힘들어, 그리고 괴로워……. 하지만 선배는 이것보다 더, 더…….”
이호는 가만히 어깨를 빌려주다가 팔을 올려 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지난 날, 동아리에 소속되었던 선배를 떠올리게 해버렸고 결국 난 말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 한 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 동아리실에 최소한의 방음이 되어있다는 사실에 점점 울음소리를 높였고 절정에 치달아 머리가 아파올 때 쯤, 이호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선배의 환한 모습을 우리들은 기억할 수 있어. 그거면 된 거야. 진부하고 오글거리는 표현이지만 그렇게 쭉 기억하면 선배는 늘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있잖아.”
이호의 마지막 말에 울음을 서둘러 그치려 애썼다. 그 말을 듣고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고 그 말을 울음에 섞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발음으로 전하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애씀은 결실을 맺었고, 난 이호를 올려 보며 말을 던졌다.
“뭐야, 그게……. 프러포즈냐?”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법한 내 질문에 이호는 자연스럽고 막힘없이 대답했다.
“프러포즈면 좀 더 멋지게 했겠지. 네 주위의 누군가가 이 세상을 떠나 사라져도 또 다른 누군가는 네 옆에 있다는 말……. 단지 그 의미가 있을 뿐인 이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