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휘를 태운 헬기는 bloody ellipse 본부에 착륙했다.
진탁은 깊은 한숨을 쉬었고, 고개를 돌렸다.
헬기 내부는 아직 시동을 끄지 않아 조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상황실과 연결된 헤드폰을 쓰고 있었는데, 살짝 벗어 목에 걸치고서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은국이는 민환이 치료부터 하자. 다휘는 로이드가 방까지 데려다 줘. 그리고 상황실로 집합. 다휘는 일단 씻고 나서 로이드한테 전화 하도록 하자. 로이드, 다휘한테 번호 알려줘.”
진탁의 지시에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은국과 민환은 복귀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은 들고 갔던 무기들을 챙기고 있었다.
“예. 핸드폰 가지고 있나요?”
“아, 아뇨··. 집에 있을 텐데.”
“아차. 이 아가씨 집에 핸드폰 두고 나왔다 그랬지. 어떡할까요?”
다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또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걸까? 혼자 있는 건 이제 더 이상은··.
“그럼 네가 다휘 방 앞에서 기다려.”
“예이, 예이.”
진탁이 눈썹을 치켜뜨며 말하자, 로이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헬기의 앞좌석에서 내렸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검은 양복 자켓을 벗었다.
로이드는 다휘가 내릴 문을 두드렸다.
민환이 문을 열며 은국에게 부축을 받으며 내렸고, 다휘도 그 뒤를 이어 내릴 준비를 했다.
“·· 아?”
다휘는 자신의 앞에 로이드가 내민 손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 싶어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이드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귀찮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휘저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자켓을 걸쳐주었다.
“다리에 힘은 들어가나요?”
“아, 아아··. 네. 조금은.”
“그럼 그냥 몸에 힘을 풀도록 하세요.”
“네?·· 아!”
로이드는 그녀의 무릎 뒤로 팔을 넣었다.
그러자 그녀는 손쉽게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고, 로이드는 가볍게 그녀를 품으로 안아들었다.
다휘가 부끄러운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끈거리는 느낌에 손으로 얼굴을 식혔지만, 따뜻해지는 저녁 날씨라서 소용도 없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로이드는 그녀를 안은 채, 헬기의 진탁에게 한 번, 은국과 민환에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숙소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보며 은국은 민환의 어깨를 지지하면서 본관을 향했다.
진탁은 다들 사정거리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헬기를 다시 이륙시켰다.
.
.
은국은 은호에게 전화를 걸어 병동으로 오라고 전했다.
그는 민환을 침대에 눕힌 후, 붉은 피가 묻은 흰 셔츠를 벗겨냈다.
무리들 중 칼을 가지고 있던 녀석들이 제일 만만해 보이는 민환에게 달려든 결과였다.
민환은 쓰라려오는 상처에 이를 악물었다. 기어코 소리는 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복부만 다쳤나?”
은국이 침대 옆 서랍장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며 물었다. 그는 은호의 일을 조금 도울 생각이었다.
“예··. 뭐. 또 은호 녀석에게 혼나게 생겼네요.”
민환이 씁쓸한 미소를 띠며 병실의 바닥을 내려다봤다.
은호는 민환이 다쳐오면 항상 잔소리를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잔소리가 심한 편이다- 작은 상처든, 큰 상처든 눈물을 꾹 참고 결국엔 깨끗한 치료를 선물한다.
곧 은호의 구두소리가 딱딱한 복도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다급한 템포가 그녀가 민환을 꽤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 했다.
은호는 병실의 문을 세게 열어젖히며 나타났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민환이 누운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하얀 라텍스 장갑을 꺼내 착용하고, 아무 말 없이 민환의 상처를 살폈다.
“··· 수건 적셔올게.”
은국이 말했다. 두 사람의 시간을 갖게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마른 수건들을 담은 바스켓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
조용해진 병실, 은호는 민환의 상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민환은 어쩐지 싸해진 분위기에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 내가 뭐라 했지?” 은호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바깥 공기처럼 시렸다.
민환은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은호에게는 닿지 못했다.
“안 들려. 다시 말해.”
“··· 배는 다치지 말라고.”
“그래. 근데 또 배를 다쳐왔어? 오빠가 이 일을 한지 15년이야. 그간 배를 얼마나 다쳐왔는지 알아? 내가 복대라도 하고 다니라고 했잖아.”
“·· 미안해.”
은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낸 건, 민환에게 있어서 오랜만이었다.
그는 팔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켜서 은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됐어. 말을 해도 안 듣는데, 이젠 마음대로 해. 나는 그냥 치료하는 사람이니까.”
“아니·· 은호야. 오빠가 미안해. 화내지 마.”
“네가 다쳐온 게 미안한 일이야?! 내가 이 일 하면서 제일 스트레스 받을 때는 지금이야! 오빠를 치료할 때! 얼마나 속상한데···. 둘 밖에 없는 가족이잖아, 우리··.”
민환은 은호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며,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복부의 고통과는 다른 쓰라린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은호야. 울지 마. 오빠 이제 복대 하고 다닐게··. 응?”
민환이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올려다봤다.
은호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닦았다.
은호는 민환이 일을 할 때 무모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3년 전의 ‘그 일’ 때문에 아직까지도 힘들어하며 휘원과 얘기했을 정도니까.
“··· 됐으니까, 누워. 은국 님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다휘 상태도 걱정되는데.”
은호는 씩씩한 여자였다.
민환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눈가의 눈물을 다 닦아내고, 그의 어깨를 눌러 침대에 완전히 눕혔다.
민환은 은호의 말에 몇 십 분 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은호야. 다휘 성폭행은··”
“그건 들었어. 컨테이너에 들어간 이후로 통신이 끊겨서 그렇지. 이미·· 당한 상태였어?”
은호는 민환의 복부에 째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도구를 준비하다가는 조심스레 물었다. 민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옷을 다 벗기는 것까지 봤어. 그 자식들한테 물어봤는데, 다휘는 창고에 발을 들였을 때 수면제로 재운 상태였어. 다행이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아니다. 이건 있다가 회의에서 얘기하자.” 민환이 말했다.
다휘는 자신이 나체로 있었던 것에 대해 아무런 물음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두려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환은 점점 그런 다휘의 정신이 걱정이 되어갔다.
연호에게 할 이야기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 * *
한편, 다휘와 로이드의 쪽.
로이드는 다휘를 그녀의 방 안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방 밖에서 기다릴 테니, 나올 준비가 다 되면 문을 두드려요.”
그리고 그는 다휘에게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방에서 나갔다.
다휘는 며칠 만에 온 자신의 방이라고 소개받은 장소가 반갑게 느껴졌다.
단 하루 이틀 정도였는데, 그녀에게 편안함을 주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로이드의 자켓을 벗고, 자신의 몸을 가렸던 담요도 스륵 벗어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담요를 두고 그녀는 옷장 옆에 있는 전신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 하아.”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체로 있었을까. 도담들은 자신이 납치된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눈을 뜨니 은국에게 안겨있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컨테이너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지?
나를 데려온 남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유 환씨는 왜 그 장소에서···.
다휘는 머리를 붙잡으며 휘청거렸지만, 이내 다시 중심을 잡았다.
수면제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지, 졸리면서도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했다.
“나는 내일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겠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 어두운 집으로, 아무도 없고, 찾아 올 사람도 없는, 그녀의, 자신의, 보금자리로.
가기 싫어.
혼자는 싫어. 무서워.
무서워···.
다휘는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접힌 다리를 팔로 감싸고, 그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많이 울어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왔다.
“싫어··. 무서워···. 무섭다구··. 오빠, 휘원 오빠···.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마···.”
붉은 색의 부드러운 융단 카펫과 고급스런 기하학적 모양의 조명, 다휘는 벌거벗은 자신을 꽉 끌어안고 싶었다.
위로가 필요했다.
갑자기 사라진 가족들, 죽음, 피, 마피아, 장례식, 다시 떠오르는 피, 납치, 눈을 뜨지 않는 휘원의 모습, 부모님의 온몸에 묻은 피, 딱딱해져갔던 피부, 바닥을 물들인 붉은 피,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나체가 된 자신.
그녀는 방 안이 떠나가도록 울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쓸쓸하고 고독한 소리였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아 훤히 보이는 그녀의 피부가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있던 나쁜 기억들 사이로 bloody ellipse의 사람들의 얼굴이 서서히 그려졌다.
따뜻한 손으로 자신을 안아준 연호.
밤새 이야기를 들어준 은호.
무서운 얼굴이지만 상냥함이 느껴지는 은국.
자신을 슬픈 시선으로 내내 보던 선우.
중절모 밑의 날카로운 눈매, 그러나 따뜻한 커피 향이 나는 도담.
다정하게 자신을 봐주었던 진탁.
민환, 우목, 로이드의 얼굴도 떠올랐다.
“혼, 자는·· 싫어요, 이제···.” 다휘는 더욱 자기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들의 곁에 함께 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