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려가서 한숨 잘까.’
털썩.
고개를 떨어트리고 고민하는 내 옆에 누군가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인용이겠지. 한솔이와 여자애 사이에 낄 만큼 눈치 없는 녀석은 아니고, 혼자서 산을 탈 정도로 열정이 있는 놈도 아니니 그냥 내 옆에서 쉬기로 한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아무 말 않고 있는 인용이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기회가 오늘만 있는 건 아니잖아? 상심하지 말라고.”
돌아오지 않는 답변. 나는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 인용이 아닌가?
확실히 인용이와 내 거리가 가깝긴 했지만,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 옆에 앉은 걸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한테 말을 건 거고.
미친놈처럼 보였을 가능성에 나는 아는 애인 줄 알았다고 재빠르게 변명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뭐해?”
그곳에 있던 건 다행히 인용이였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인용이가 벤치에 바로 앉아있지 않고 기대듯이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야. 자냐?”
나는 인용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툭 때리며 물었지만 인용이는 마치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인용이뿐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우왕좌왕하며 쓰러진 사람들을 살폈다. 몇몇 사람들을 살펴본 결과 다행히 모두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열도 나지 않고 넘어질 때 생긴 걸로 보이는 가벼운 생채기만 제외하면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이상은 없었다.
마치 잠에 빠진 것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119를 누르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이런 미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으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통신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도, 전화 먹통이다. 최근 통신요금을 미납한 적이 없으니 통신사 문제는 아닐 거다. 기기의 문제도 아니다. 방금 뺏어서 확인한 결과 인용이의 폰도 신호가 터지지 않고 있다.
그럼 남은 건 하나.
‘재밍이라고?’
통신방해전파로 인한 통신 장애 상태. 과거, 나는 이런 사태를 한 번 겪은 적 있다.
모노폴라이즈. 그들이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언제든 갑옷을 입을 준비를 하며 주위를 경계했다.
‘억지로라도 마법을 배워둘 걸.’
기초 트레이닝으로 몸을 연마하기도 벅차 마법을 배워보겠냐는 제의를 거절한 과거의 나에게 원펀치를 날리고 싶었다.
저번 통신방해가 들어왔을 때 어떻게 본부와 연락할 수 있었는지 한소윤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한소윤은 마법을 통해 본부와 연락했다고 간단하게 답했었다.
물론 서유진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통신 방해 외에도 안티매직 필드가 펼쳐져 있어서 그걸 뚫기 위해 상당량의 대가를 치뤘다고 말했다.
이곳에도 안티매직 필드가 펼쳐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마법을 배웠다고 해도 뚫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모른다. 안티매직 필드의 코스트가 비싼 만큼 펼쳐있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하니까.
그럼 기초적인 수준으로도 통신이 가능했을 텐데.
‘여기까지 하자.’
후회는 이만하면 됐다. 투덜거려봤자 바뀌는 게 없다는 건 뼈저리게 알고 있으니까.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다.
사람들을 쓰러트린 방법은 모르겠지만 이 일이 인위적인 것이라면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을 때려눕히면 되지 않을까.
좋은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지 않으니, 대화는 필요 없을 터. 가득이나 피곤한데 일을 사서 만들게 해주신 고마운 분에게 대접을 할 시간이다.
나는 기합을 넣고 몸을 움직였다. 목표는 하산. 산 아래까지 재밍 범위에 넣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눈에 띄기 딱 좋으니까.
목적이 무엇인진 모르지만 정보가 새나가는 건 막고 싶을 터. 이곳에서 벗어나려 하면 가로막겠지.
안 찾아오면 그냥 나가서 협회와 연락하면 되고.
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원하는 곳으로 옮길 수 없었다. 기절해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일어섰기 때문이다.
헐레벌떡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안색을 살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 지 않나보네.”
복도에서 한 번 마주친 적 있던 학생부터 처음 보는 관광객까지. 주위 모든 사람이 마치 좀비처럼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힘없이 서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아가 없는 인형처럼 가만히 서있던 그들이 어딘가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기 시작했다.
팔도, 목도 축 늘어진 채로 다리만 움직이며 아무 말 없이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B급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그 중 팔과 머리를 똑바로 움직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내 죽마고우인 인용이였다.
인용이는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가리키며 나를 보고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더니 다른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가볍게 졸랐다.
노골적인 협박.
‘따라가야 되나?’
나는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이건 분명 함정이다. 이대로 사람들을 따라가면 적의 계략에 그대로 빠지게 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
…젠장.
잠시 고민한 나는 결국 사람들의 뒤를 쫒기로 했다. 이대로 나몰라라 하산했다가 저 사람들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돌아오는 건 자책밖에 없을 테니까. 그건 아마 평생의 짐으로 남겠지.
거기다 함정을 돌파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은 곧 힘이라니까.
내가 도망가지 않자 등산하기 싫다고 투덜거렸던 아이도, 열심히 걷던 어르신도 모두 아무 말 없이 오와 열을 맞춰 군인이 행군하는 것처럼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산을 묵묵히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가장 마지막 꼬리가 된 인용이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멈춰선 곳은 산 어딘가에 있는 절벽이었다. 갑옷을 입을 수 있는 나에겐 그렇게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사람이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이라도 해주듯이 절벽 아래엔 썩어 문드러진 야생동물의 시체가 보였다.
나무하나 없는 절벽 위, 일정 간격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을 모세처럼 가르며 누군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이 은혈귀 자식아.”
나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며 걸어오는 남자는 어제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고태성이였다. 설마 협회원이 사람들을 미끼로 나를 불러낼 줄 몰랐던 나는 그를 향해 험악하게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한 거고?”
대위마 정화협회의 가장 중요한 철칙은 위마를 정화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등한시해선 안 된다. 꼭 협회의 방침 때문이 아니어도 윤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저 남자는 인권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위선 떨고 있군. 괴물 새끼 주제에.”
고태성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나를 혐오스런 벌레 바라보며 자신의 몸을 둘로 나뉘었다. 어제 본 적 있는 분신 능력이다. 그렇게 나눠진 분신은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브로드 소드를 놓지 않겠다는 듯 파지한 뒤 내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급작스러운 공격이지만 계속 경계하고 있던 나는 갑옷을 입고 들어오는 분신을 향해 레이크의 칼날을 뽑는 것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분신의 브로드 소드는 내 갑옷을 뚫지 못 한 반면 분신은 레이크의 칼날에 꿰뚫렸다. 고태성은 축 늘어지는 분신을 내려다보더니 내게 말했다.
“호오. 반격을 했다 이거지?”
멀리 있던 고태성은 그걸 지켜보며 뭐가 즐거운지 씩 웃더니 박수를 한 번 쳤다. 그러자 가만히 서있던 사람 중 한 여자가 절벽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깜짝 놀란 내가 달려가서 그 사람의 허리를 꽉 붙들었지만 여자는 보물이라도 있는지 절벽으로 가기 위해 멈추지 않고 계속 발버둥 쳤다. 기절시키기 위해 명치를 가격해도, 뒷목을 가격해도 통하지 않았다.
“막아? 좋아. 그럼 한 사람 더.”
협회원이 타인을 조종하는 것도 모자라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하는 나를 뒤로하고 다시 한 번 박수를 치는 고태성.
메아리치듯 박수 소리가 산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 무리 속에서 또 다시 한 사람이 튀어나와 지금 내가 막아서고 있는 여성처럼 절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발버둥치고 있는 여성의 뒷덜미를 붙잡아 끌고 새로 절벽으로 뛰어가려는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가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또 다른 사람이 절벽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방금 내가 한 사람 더라고 했던가? 실수했군. 두 사람이었어.”
이번에 나는 그 사람이 절벽 아래로 투신하는 것을 막지 못 했다. 양손이 봉쇄된 탓도 있지만 고태성의 분신을 보내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아래로 추락한 사람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평일인 오늘 휴가를 얻었는지 가성비 좋은 등산장비로 중무장을 하고 산을 타던 중 변을 당한 것이다.
양 손에 잡혀있던 두 남녀가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쓰러졌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사람이 찌그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차마 절벽 아래로 시선을 둘 수 없던 나는 대신 격분하며 고태성에게 소리쳤다.
“이… 미친 새끼야!”
내 외침에도 고태성은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천진함에 나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사람을 죽이다니, 제정신이냐고 미친놈아!”
“죽여? 내가? 아니지. 저들은 스스로 희생하고 있는 거다. 너라는 은혈귀를 잡기 위해 한 몸 바치는 건 바라 마지않은 일이라 여길 거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고태성에게서 반성의 기색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여차하면 고태성을 죽일 각오로 레이크를 뽑아 들었다. 분신이 나오던 뭐가 나오던 한 번에 다운 레이로 쓸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 했다. 남자가 으쓱 거리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해볼 테면 해보시지.”
고태성의 자신만만한 말은 나로 하여금 많은 번뇌에 빠지게 만들었다. 만약 다른 조력자가 있어서 그 녀석이 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거나, 고태성을 죽이면 사람들이 투신하게 되어 있다면 낭패를 보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허세일 가능성도….
“네가 이 사람들을 살리고 싶으면 딱 한 가지만 하면 돼.”
고민하고 있던 내게 고태성은 마치 사탕을 주듯이 은근하게 말했지만, 그건 절대 탈콤한 사탕 따위가 아니었다.
“갑옷 벗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