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고태성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박살냈다.
“빌어쳐먹을!”
방문이 쪼개지고, 아끼던 옷들이 들어있는 옷장이 부셔졌다. 사용인이 겁에 질려 벌벌 떨어도 고태성의 화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태성은 이른바 극도의 인간 중심주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이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그의 부모로부터 세뇌 수준의 교육을 받아온 탓이다.
일방적인 가치관의 주입이지만 고태성은 청년기에 들어선 지금도 그것에 반발하지 않았다. 실제로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었고, 어딜 둘러봐도 인간 위에 서는 생물체 따윈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고태성은 인간 외의 생명체를 함부로 대하거나 업신여기진 않았다. 그 생명체들을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도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마는 달랐다.
그들의 존재를 처음 목도했을 때, 고태성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분노했다. 다른 곳에서 온 불청객들 주제에 세상의 주인인 인간을 습격하고, 자신의 발아래에 두는 행위는 고태성의 세계관을 철저하게 짓밟는 행위였다.
얼마 후. 고태성의 마음속에서 위마를 몰아내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피어났다.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2년 전 정식 협회원이 된 고태성은 그 이후 휴일을 반납하면서까지 위마를 정화해왔다. 인류를 위해 헌신했다는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마음이 꺾였다.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는 은혈귀. 압도적인 힘을 가진 그 은혈귀에 의해 자신의 분신이 갈갈 찢겨나갈 땐 곧 자신도 그렇게 될 거라는 환각에 휩싸여 공황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죽기 싫다는 일념 하에 인류의 적에게 등을 보이면서까지 꼴사납게 줄행랑 쳤다. 그러나 은혈귀는 그런 행위를 비웃듯 손쉽게 고태성을 다시 궁지에 몰아넣었다. 시야가 절망으로 뒤덮였고, 공포심에 속옷에 실금까지 했다.
지원이 도착했을 때 고태성은 자신의 치태를 깨달았다. 참을 수 없는 치욕에 끝없이 분노를 표출 해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만이 차갑게 다가올 뿐이었다.
그 이후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든든한 아군이라고 여겼던 진고훈이 도착했을 때, 은혈귀는 가증스럽게도 인간 행세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었다.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진고훈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일갈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되레 자신을 쓸모없는 짐이라도 되는 듯 불편하게 쳐다보더니 자신을 기절시키고 은혈귀를 놓아줬다.
초유의 사태였다. 자신의 가문에 빌붙어 살던 놈이 은혈귀의 편에 선 것이다. 지부에 도착해서도 끝까지 ‘그 녀석은 아직 인간이다.’라며 고집만 부렸다.
“버러지 새끼들!”
자신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당장 은혈귀를 토벌하기 위해 팀을 소집해야 한다고 피력해봤지만 괜한 일을 벌이지 말라는 소리만 들었다.
진고훈은 그토록 강경했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년 전, 자신의 동생이 작전에 희생 된 이후 점점 나약해지던 아버지의 정신이 드디어 몰락해버린 것이다.
“제기랄!”
쾅!
마지막 남은 의자까지 완전히 박살내버린 고태성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렸다. 그 은혈귀를 잡기위한 방법을 강구해보아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태성은 이대로 사태를 관망할 생각은 없었다.
진고훈에게는 합당한 처벌을, 자신을 몰아넣은 은혈귀에겐 공포와 죽음을 선사해주기 위해서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고태성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곤란한 모양인데, 힘 좀 보태줄까?”
처음 듣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고태성은 뒤로 물어나며 자신에게 말을 건 상대를 바라봤다.
“…넌 누구지?”
그 말에 엎드려있는 사용인들을 위에 여왕처럼 도도하게 앉아있는 20대 초반의 여성은 웨이브 진 붉은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요염하게 말했다.
“너에게 힘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
쿠쿡.
뇌쇄적인 웃음에 고태성은 순간 혼이 빨릴 뻔했지만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 정신을 다잡은 뒤 다시 물었다.
“컴퍼니 쪽 사람인가?”
위마는 아니었다. 여자의 가슴팍에 꽂혀있는 붉은색 은장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용인과 자신을 홀리고 있는 이 힘 또한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협회원 또한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한국에 이런 은장도를 가진 순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남은 것은 컴퍼니뿐. 그러나 여성은 노골적으로 파인 가슴께를 강조하며 질문을 회피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을까?”
고태성은 절로 내려가는 시선을 바로잡고 여성의 고혹적인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내게 힘을 빌려주는 빌미로 무엇을 요구할 셈이지?”
“없어. 나도 그 ‘은혈귀’가 미치도록 싫을 뿐이니까.”
여자의 눈빛이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눈으로 바뀌었다. 그건 틀림없이, 증오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고태성은 여자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비록 정체는 의심스럽지만 자신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방도가 없었으니까.
“힘을 빌려준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냐.”
“어머. 들어볼 마음이 생겼나봐? 후훗. 좋아. 알려줄게. 그건….”
이어지는 여자의 미혹적인 말을 들을수록, 고태성은 눈은 점점 더 커졌다.
한라산 인근 등산코스 중턱에 있는 벤치. 나는 비틀비틀 거리다 그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뭐야. 더 안 올라가?”
“피곤해.”
“거의 다 왔잖아?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졸려 죽을 거 같아. 좀만 쉬자.”
한솔이에 독려에도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새벽의 사건 때문에 수면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에게 오전 등산이란 컨텐츠는 너무 고된 일이었다.
그렇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수학여행은 중단되지 않았다.
협회는 이 사건을 박물관에서 일어난 마약성분이 가미된 무색무취의 가스 테러로 왜곡해버렸다. 하루. 아니, 반나절도 안 돼서 들어본 적도 없는 마약과 가짜 가해자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매스컴에는 난리가 났다. 가짜 가해자의 이력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협회는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가짜 가해자를 최대한 자극적으로 만들어냈다.
덕분에 언론은 북측의 소행이다. 신흥 종교단체의 테러다. 범인은 게임 중독의 독신이다 등 아침부터 기사가 쉬지 않고 올리고 있다.
언론이 가짜 가해자를 목표로 포착해서인지 간접적인 피해자라 볼 수 있는 우리는 아침에 기자들이 찾아와 선생님들에게 어제 밤 상황에 대해 인터뷰를 요청한 것만 빼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원인이 마약으로 규명 돼 추가적인 피해는 없을 거라 판단한 선생님들은 수학여행 일정을 강행하기로 합의를 봤다. 사건의 규모가 컸지만 중상자 이상의 부상자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 그렇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기로 한 거 까진 좋은데, 하필 첫 일정이 등반이라니. 눈이 저절로 감기고 있는 나에겐 고문 그 자체다.
피로를 핑계 삼아 버스에서 한숨 잘까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와놓고 안 올라가긴 또 아까워서 꾸역꾸역 걸어와 봤지만 이제 한계다.
“으어어.”
옆에서 들리는 괴상한 소리에 나는 밤을 설치게 된 원흉인 인용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쟤는 그렇게 잘 잤으면서 왜 나보다 상태가 안 좋아?”
내가 이렇게 피로한 건 새벽의 은혈귀 사태 때문이 아니다.
항상 내가 먼저 잠에 들어서 몰랐는데, 인용이의 코골이 패턴은 정말로 끔찍했다. 내가 자려고 할 때 두세 번 정도 아주 크게 코를 골아 깨운 다음, 다시 눈이 감길 때쯤에 또 코를 두세 번 곤다.
차라리 계속 곤다면 잠깐 깨우기라도 하는데 잠잠하다 골고 잠잠하다 골아 언젠가 그만 두게 되리라고 믿거나 내가 다음 코골이 사이에 잠들 거라는 희망고문에 빠지게 된다.
침대가 2층인 것도 한몫했다. 괜히 내려갔다 올라오면 내 잠만 깨버리니까.
어쨌든 그런 나와 다르게 아주 푸우우욱 자버린 주제에 왜 저리 기운이 없어?
“그럴 만하지. 한소윤이 없으니까.”
“아. 그랬지.”
졸려서 잊고 있었는데, 지금 한소윤은 이 자리에 없다. 특이한 위마를 정화하는데 손을 보태달라는 제주지부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성지를 향해 떠났기 때문이다. 파륜이 있다면 쉽게 정화할 수 있다던가.
저녁쯤엔 돌아오겠지만 지금. 조별활동의 영역인 이 등산 코스에서 한소윤과 친해지겠다는 계획을 세운 인용이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으리라.
꼴좋다. 내 잠을 방해한 대가지.
평상시라면 안타깝게 쳐다봤을 나지만 내 잠을 설치게 한 오늘만큼은 그렇게 볼 수 없었다.
분노에 찬 나에게 한솔이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여자애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안 올라갈 거면 나 먼저 간다?”
“그래. 가다 제발 꼴사납게 넘어져라.”
내 악담에도 한솔이는 뭐가 좋은지 실실 거리면서 나를 내버려두고 빠르게 사라졌다.